|
|
[책자 원고] AI는 원전을 부르지 않는다 ㅡ네 개의 물음으로 따라가 본 증설 논리의 허구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이 글은 현재 준비중인 '무모한 원전 증설, 중단되어야 할 이유 '의 책자에 수록할 예정인 것으로서, 언론 게재도 가능한 상태입니다.
들어가며 ㅡ 대통령이 이미 한 말
2026년 7월, 정부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의 전력수요를 이유로 신규 원전과 소형모듈원전을 더 짓겠다고 밝혔다. 9월에는 주무장관이 외신 인터뷰에서 인공지능이 불러올 전력수요만으로 25~30기가와트가 늘어난다고 했다. 원전으로 치면 스무 기다. 몇 기가 필요하냐는 물음에는 전문가들이 검토 중이라고만 답했다. 같은 달 원전 공론화 계획을 확정한 국무회의에서도 국무총리는 AI 확산과 첨단산업 육성에 따른 전력수요 급증을 공론화의 배경으로 들었다.
그런데 이 정부의 출발점은 달랐다. 대통령은 2025년 9월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신규 원전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다. "원자력발전소를 짓는 데에만 15년 걸린다." "발전소를 지을 곳도 없고 소형모듈원전은 기술 개발이 아직 안 됐다." 가능한 부지가 있고 안전성이 확보되면 하겠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있는 원전은 쓰고 안전성이 담보되면 연장해서 쓰되, 새 원전에 기대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 진단은 옳다. 이 글이 아래에서 확인하려는 것이 바로 그 내용이다. 문제는 그 말을 한 정부가 지금 스무 기 분량의 계산을 내놓고 있다는 데 있다. 사람은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다만 바꿨다면 무엇이 틀렸고 무엇을 새로 알게 되었는지 말해야 한다. 그 설명이 없다면 바뀐 것은 판단이 아니라 바람의 방향이다.
증설의 논리는 세 단으로 되어 있다.
"AI 때문에 전기가 급격히 더 필요하다. 그 전기는 24시간 끊김 없이 안정적이어야 한다. 그러니 탄소를 내지 않으면서 24시간 돌아가는 원전이 답이다."
한 단 한 단은 그럴듯하다. 그런데 차례로 밟아 보면 어느 단에서도 원전으로 가는 길이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물어야 할 것은 "AI 시대에 원전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AI 시대에 가장 빠르고 안전하고 경제적이며 유연하게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은 무엇인가"이다.
이 글은 그 물음에 네 갈래로 답해 본다. 얼마나, 언제, 어디에, 그리고 무엇과 짝을 맞출 것인가.
첫째 물음 ㅡ 얼마나 필요한가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실무그룹이 2026년 8월에 내놓은 2040년 최대전력수요 전망은 158.4~165기가와트였다. 같은 작업반이 넉 달 전인 4월에 제시한 숫자는 131.8~138.2기가와트였다. 차이가 27기가와트, APR1400으로 열아홉 기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현재 최대전력수요가 100기가와트 안팎이다.
무엇이 바뀌었나. 반도체 제조 수요가 3.7~4기가와트에서 24.3~24.6기가와트로 여섯 배가 되었다. 넉 달 사이에. 넉 달 사이에 달라진 것은 공장이 아니라 가정이었다. 수십 년을 돌리고 수만 년을 관리할 시설을 짓겠다는 근거가 넉 달마다 여섯 배로 움직이는 숫자다.
전망은 확정된 수요가 아니라 계획의 전제다. 60년을 돌려야 본전을 뽑는 설비를 이런 숫자 위에 올려도 되는가. 3장이 투자자의 눈으로 보여주듯, 수요가 불확실할수록 자본은 작게 나누어 단계적으로 늘릴 수 있는 설비를 고른다.
'AI 전력수요'라는 말도 한 덩어리가 아니다. 그 안에는 성질이 정반대인 두 가지가 섞여 있다. 하나는 계산이 먹는 전기, 곧 데이터센터의 전기다. 한곳에 모여 있고, 양이 많고, 한번 자리를 잡으면 수백 메가와트짜리 덩어리 부하가 된다. 다른 하나는 몸을 가진 AI, 곧 공장과 논밭과 병실에서 일하는 로봇의 전기다. 사람 크기 로봇 한 대가 걷고 물건을 드는 데 드는 전기는 순간순간 300~800와트, 하루 종일 일해도 7~19킬로와트시다. 흩어져 있고, 띄엄띄엄 쓰고, 한 대가 쓰는 양은 킬로와트 단위다. 그런데 우리 논의는 이 둘을 한 덩어리로 놓고 발전소 수를 센다.
둘째 물음 ㅡ 언제 필요한가
장관은 같은 인터뷰에서 원래 2045년쯤 완공될 반도체 사업들이 2030년대 초로 앞당겨졌다고 했다. 공장이 15년을 당긴 것이다. 데이터센터는 대개 2~3년이면 짓는다. 반면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담긴 신규 대형 원전 두 기의 준공 목표는 2037년과 2038년이다. 부지가 정해진 것이 올해 상반기이고 아직 착공도 하지 않았다. 해외의 최근 원전들이 착공에서 준공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계획'에는 공장은 15년을 당겼고, 원전은 15년이 걸린다. 2030년대 초에 돌아갈 공장에 2038년의 발전소로 전기를 대겠다는 것이 지금의 계획이다. AI 수요가 가파르게 오르는 구간과 새 원전이 전기를 내기 시작하는 시점 사이에 10년 가까운 간격이 있다. 그 10년의 전기는 원전 아닌 다른 무엇이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무엇이 제 몫을 해낸다면, 10년 뒤 원전이 들어설 자리는 이미 채워져 있다.
미국 빅테크의 선택이 이것을 보여준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메타가 모두 원전 전력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은 원전 확대론의 단골 근거다. 그런데 계약의 속을 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네 회사 가운데 가장 먼저 원전 전기를 받게 될 곳은 마이크로소프트인데, 새로 짓지 않고 2019년에 멈춘 스리마일섬 1호기를 재가동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아마존이 받는 원전 전기도 이미 돌고 있는 서스쿼해나 발전소에서 온다. 새로 짓는 소형모듈원전 계약은 대부분 2030년대에야 전기를 낸다. 빅테크가 당장의 전기를 구하는 곳은 태양광과 풍력, 저장장치, 그리고 이미 지어진 원전이다. 새 원전은 그들에게 10년 뒤를 겨냥한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시간표는 반대쪽 끝에서도 어긋난다. 지금 결정해서 2030년대 중반 이후에 완공되는 원전은 60년을 돈다. 2090년대까지 간다. 그런데 로봇이 실제 현장에 널리 들어가는 것은 2020년대 말 이후이고, 아래에서 볼 분산형 전환의 조건이 무르익는 것은 2030년대 중반일 것이다. 10여 년 뒤에 조건이 달라질 것을 알면서 60년짜리 결정을 지금 못 박는 셈이다.
셋째 물음 ㅡ 어디에 필요한가
우리 데이터센터의 상당수는 수도권에 있고, 원전은 동해안과 남해안에 있다. 전기를 만드는 곳과 쓰는 곳이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면, 문제는 발전소가 아니라 그 사이의 길이 된다. 지금도 동해안 발전설비는 송전 제약에 걸려 만든 전기를 다 보내지 못하고, 수도권 데이터센터 신청은 전력망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불허되는 일이 잇따른다. 지금 우리 계통이 겪는 것은 발전설비의 부족이 아니라 지역과 시간대별 공급과잉과 송전 병목이다.
발전소에 15년이 걸린다면 송전선로는 그보다 더 걸리기 일쑤다. 송전망이 갖춰지기 전에 준공되는 원전은 돌리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짓기 위한 사업이 된다. 그동안의 주무장관의 발언, 곧 남서부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새 원전이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전기를 받아 쓰는 지역에 태양광과 가스가 필요하다는 판단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물음은 거꾸로 서야 한다. 전기를 수요가 있는 곳까지 끌고 갈 것인가, 수요를 전기가 있는 곳으로 옮길 것인가. 연산을 하는 쪽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넷째 물음 — 무엇과 짝을 맞출 것인가
이 논리의 가장 약한 고리가 여기 있다. 데이터센터의 연산에도 성질이 다른 두 가지가 섞여 있다. 사람이 화면 앞에서 기다리는 검색이나 대화는 지금 그 자리에서 계산해야 한다. 그러나 AI를 학습시키는 일, 쌓아둔 자료를 한꺼번에 처리하는 일, 큰 모의실험 같은 일은 몇 시간 미루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도 된다. 지금 AI 데이터센터 전기의 절반가량이 학습에 쓰인다. 앞으로는 사람의 물음에 답하는 추론의 몫이 더 커지겠지만, 추론 가운데서도 급하지 않은 일괄처리는 미룰 수 있다. 데이터센터는 24시간 불을 켜 두지만, 그 안의 계산이 모두 그 시간 그 자리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24시간 끊김 없는 전기'라는 둘째 단이 흔들리는 곳이 여기다.
구글은 2020년부터 급하지 않은 계산, 이를테면 사진 필터를 만들거나 동영상을 변환하는 일을 태양광과 풍력이 많이 나는 시간대로 미루고 있다. 검색이나 지도처럼 사람이 기다리는 일에는 손대지 않는다. 2021년에는 시간뿐 아니라 장소로도 넓혀, 지역별로 깨끗한 전기가 얼마나 나올지를 하루 전에 예측해 옮겨도 되는 계산을 데이터센터 사이로 보낸다. 당시 구글이 올린 글의 제목이 요지를 그대로 담고 있다. "우리는 이제 더 깨끗한 에너지가 있는 곳에서 더 많이 계산한다." 구글 연구진의 논문과 후속 연구들은 시간을 옮기는 것만으로 탄소 배출이 8~19퍼센트 줄었다고 보고한다.
중국은 이것을 국가 인프라 전략으로 삼았다. 동쪽의 데이터를 서쪽에서 계산한다는 '동수서산(東數西算)'이다. 2022년부터 베이징·상하이·광둥 같은 동부 연안에서 생기는 데이터를, 땅이 넓고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서부 내륙으로 보내 처리한다. 2024년에는 국가 거점에 새로 짓는 데이터센터가 2025년 말까지 쓰는 전기의 80퍼센트 이상을 녹색전력으로 채우도록 했다.
물론 다 옮길 수는 없다. 사람이 기다리는 서비스는 신호가 먼 곳을 오가는 만큼 늦어지고, 개인정보를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게 하는 법도 있다. 구글 스스로 이 두 가지를 한계로 밝힌다. 옮길 수 있다는 것과 옮겨서 이익이라는 것도 다르다. 중국 서부의 데이터센터들은 가동률이 낮아 경제성 논란을 겪는다. 그러니 옮길 것은 연산 전부가 아니라 미뤄도 되는 연산이다. 그것만으로도 원전 몇 기 분량의 수요가 시간과 자리를 바꿀 수 있다.
로봇은 더 좋은 짝이다. 충전을 미룰 수 있기 때문이다. 햇빛이 나면 충전하고 흐리면 기다려도 대개 일에 지장이 없다. 태양광과 풍력의 최대 약점은 전기가 나는 시간을 사람이 정할 수 없다는 것인데, 기다려 줄 수 있는 손님에게는 그것이 약점이 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전기차에 담긴 전기를 필요할 때 거꾸로 전력망에 내보내는 기술을 V2G(Vehicle-to-Grid)라고 부른다. 로봇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햇빛이 넘치는 한낮에 몸에 전기를 담아 두었다가, 해가 진 뒤나 전기가 모자란 시간에 필요한 곳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자면 R2G(Robot-to-Grid)쯤 되겠다.
로봇 한 대의 배터리는 작지만 공장과 물류창고와 농장에 수만 대가 모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흩어진 배터리를 한데 묶어 하나의 발전소처럼 부리는 가상발전소의 한 조각이 되는 것이다. 전선을 새로 깔기 어려운 자리에는 로봇이 전기를 몸에 싣고 걸어 들어갈 수도 있다. 배터리 수명과 보상 규칙처럼 풀어야 할 숙제는 남아 있다. 그러나 V2G도 십여 년 전에는 그런 숙제를 안은 구상이었다. 로봇은 전기를 쓰는 손님이면서, 남는 전기를 맡아 두었다가 돌려주는 창고가 될 수 있다.
로봇에는 계산 장치도 달려 있다. 한 대에 100~200와트급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논다. 그 노는 시간에 급하지 않은 계산을 나눠 맡기면 어떻게 되는가. 셈은 간단하다. 로봇 한 대의 계산 장치를 밤에 대여섯 시간 돌리면 1킬로와트시쯤 쓴다. 로봇 10만 대면 하룻밤에 10만 킬로와트시, 곧 100메가와트시다. 중형 데이터센터 하루치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100메가와트시에는 부지도, 송전선도, 냉각탑도, 주민 동의도 따로 들지 않는다. 이미 사 놓은 기계의 노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 연산이나 되는 것은 아니다. 수천 개 반도체가 매 순간 신호를 주고받아야 하는 대규모 AI 학습은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를 견디지 못한다. 가능한 것은 조각으로 쪼개 따로 돌려도 되는 계산이다.
그중 하나가 특히 눈에 띈다. 로봇이 일하는 시대에 가장 귀한 자원은 현실 세계에서 모은 데이터인데,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그 로봇들이다. 지금 구조라면 현장에서 모은 데이터를 수도권으로 보내 학습시키고 결과만 내려받는다. 로봇이 자기가 모은 것을 자기가 쉬는 시간에 그 지역의 전기로 가공한다면, 셋째 물음에서 던진 질문은 답을 얻는다. 연산을 전기 있는 곳으로 보낼 필요조차 없다. 이미 그곳에 가 있기 때문이다.
공장도 재생에너지의 짝이 될 수 있다. AI와 로봇이 공정을 짜는 공장은, 고온을 유지해야 하는 공정이나 납기에 묶인 공정은 그대로 두더라도, 운반차의 충전과 부품 이송, 대기와 검사 같은 일의 시간을 몇 시간씩 당기고 미룰 수 있다. 독일은 'SynErgie'라는 국가 연구사업으로, 자국 산업이 전기가 남을 때 15분 동안 최대 9기가와트를 더 쓰고 모자랄 때 10.7기가와트를 줄일 수 있음을 확인했다. 육상 풍력발전기 5,600여 기의 출력이다.
피지컬AI가 공장에 들어갈수록 이 유연성은 커진다. 그 유연성이 가장 절실한 곳은 인력난에 시달리면서도 스스로 전환할 힘이 없는 지방의 중소 산단이다. 공장 지붕의 태양광과 공장 안의 로봇을 한 사업으로 묶으면, 봄철 한낮에 버려지던 전기가 쓰이는 전기가 된다.
그래도 해가 지면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이 남는다. 세계가 찾은 답은 저장이다. 2026년 봄 캘리포니아에서는 태양광이 잦아들고 퇴근한 시민들이 불을 켜며 수요가 치솟는 저녁 시간에, 주 전역의 배터리가 12기가와트를 내보냈다. 예전 같으면 가스발전소가 맡았을 시간이다. 미국의 2026년 신규 설비 전망에는 태양광 50.8기가와트 옆에 저장장치 24.3기가와트가 나란히 선다. 블룸버그NEF 집계로 4시간짜리 배터리 사업의 세계 기준 비용은 2025년 한 해에만 27퍼센트 떨어져 메가와트시당 78달러가 되었고, 국제에너지기구는 2025년 한 해에 세계에 새로 들어선 배터리가 108기가와트로 2021년의 열한 배라고 밝혔다. 원전 건설비가 오르기만 하는 동안 저장 비용은 반대 방향으로 달려왔다.
옮길 수 있는 수요와 저장장치의 짝은 출력이 오르내리는 재생에너지다. 반대로 원전은 한 번 켜면 출력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수요를 가장 경직된 전원에 묶는 것은 짝을 잘못 맞추는 일이다. 봄철마다 원전 출력을 줄이고 태양광을 강제로 끄는 일이 이미 되풀이되는 우리 계통에서, 그 잘못 맞춘 짝이 무엇을 낳는지는 4장이 보여준 그대로다.
남은 물음 — 누가 돌보고, 누가 갖는가
여기까지 오면 반문이 나온다. 그렇게 좋은 짝이라면 분산형 재생에너지는 왜 지금까지 큰 발전소를 이기지 못했는가. 세계 시장에서 발전 단가는 이미 뒤집혔다. 3장이 보여주듯 자본은 이미 재생에너지 쪽으로 움직인다. 뒤집히지 않은 것은 돌보는 비용이다. 원전 하나는 수백 명이 지킨다. 같은 양의 전기를 지붕 수십만 개로 만들면 그 수십만 곳을 점검하고 닦고 고치러 다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마을 앞 소수력 발전기는 낙엽이 걸려도 누군가 보러 가야 안다. 그 사람의 품삯이 발전 수익보다 크면 설비는 애초에 지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재생에너지가 안 되는 이유를 날씨와 땅값과 주민 반대에서 찾았지만, 계산서를 무너뜨린 것은 돌보는 손이었다. 그리고 농촌은 늙어가고 지킬 사람은 줄어든다.
피지컬AI가 바로 이 자리에 들어온다. 중국에서 네 발로 걷는 로봇의 가장 큰 시장은 전력설비 순찰이다. 태양광 패널을 닦는 로봇은 우리 업체가 이미 2016년부터 일본 시장에서 써 왔고, 닦은 뒤 발전 효율이 18퍼센트 올랐다는 실증 보고도 있다. 로봇은 전기를 쓰고, 맡아 두고, 전기 설비를 지키는 쪽이다. 이것이 분산과 집중의 경제성 비교를 뒤집을 만큼 커질지는 아직 아무도 셈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돌보는 손의 값이 내려가는 만큼, "규모가 작아 수지가 맞지 않는다"며 물렸던 축사 지붕과 농로 옆 빈 땅과 저수지와 폐교가 다시 계산에 들어온다. 원전 증설을 서두르는 것은 그 계산이 나오기도 전에 답을 정해 버리는 일이다.
산업의 셈도 같은 쪽을 가리킨다. 원전 생태계를 지켜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그런데 우리 기업이 세계 공급망의 윗자리에 이미 올라 있는 곳은 태양광과 저장장치 쪽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테슬라와 43억 달러 규모의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고 미시간 공장에서 2027년부터 생산하며, 마이크로소프트는 한화큐셀과 대규모 태양광 공급계약을 맺었다. 지켜야 할 생태계가 있다면 이쪽도 그 목록에 올라야 한다.
마지막은 소유다. 지붕 천만 개에 패널이 깔려도 그 소유와 운영이 몇 군데에 몰려 있으면 그것은 분산이 아니다. 산단의 로봇이 모은 데이터와 마을의 설비가 밤새 돌린 계산의 결과가 바깥으로만 빠져나간다면, 지역은 다시 자리를 빌려주고 삯을 받는 처지가 된다. 설비는 나중에 바꿀 수 있지만 소유 구조는 한번 굳으면 바꾸기 어렵다. 지금 지역의 발전설비를 어떤 소유 형태로 깔아 두느냐가, 2040년에 그 전기와 그 연산이 누구의 힘이 되는지를 정한다.
맺으며 — 서두를 까닭이 없다
네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모으면 이렇다. 수요 전망은 넉 달 만에 원전 열아홉 기만큼 흔들린다. 새 원전이 전기를 낼 날은 AI 수요가 가장 가파른 구간보다 10년 늦고, 60년 수명은 조건이 달라질 2030년대를 훌쩍 넘어간다. 전기가 모자란 곳은 발전소가 아니라 길이다. 그리고 AI가 만드는 수요는 원전보다 재생에너지와 저장장치에 훨씬 잘 맞는 짝이다.
가장 빠르고 안전하고 경제적이며 유연한 시스템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원전은 어느 항목에서도 첫 번째 답이 되지 못한다. AI 시대의 전력수요는 원전을 불러야 할 이유가 아니라, 재생에너지와 짝을 맞추고 수요를 다시 설계해야 할 이유다.
그렇다면 지금 할 일은 분명하다.
첫째, 60년짜리 결정을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지을 것인가보다 언제 정할 것인가가 먼저다. 이 시나리오에서 가장 아까운 손실은 잘못 지은 것이 아니라, 조금만 기다렸으면 짓지 않아도 됐을 것을 지어 둔 것이다.
둘째, 가장 오래 걸리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발전설비는 몇 해면 짓지만, 한 방향으로만 흐르도록 만들어진 배전망을 전기와 데이터가 양쪽으로 오가는 길로 바꾸는 데는 10년이 걸린다. 그 길이 열려야 전기차의 V2G도, 로봇의 R2G도 가능하다.
셋째, 데이터센터의 입지와 가동 시간, 산단의 공정과 로봇을 처음부터 재생에너지의 짝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넷째, 그 전환의 열매가 지역과 작은 공장에 남도록 소유의 틀을 지금 짜는 것이다.
이것은 원전이 영원히 필요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10년 뒤의 조건을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는 지금, 60년을 묶어 두는 결정을 서두를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일수록 늦게, 그리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내려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