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실용' 뉴이재명이 파괴하는 '원칙'
조선규(서울시민, 사업가)
2026-08-20
(제목은 편집자 주)
실용이라는 이름의 유령, ‘뉴이재명’의 민낯, 성과의 언어가 원칙의 언어를 목 졸라 죽이고 있다. 한국 정치에서 요즘 가장 남용되는 단어는 '실용'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다산 정약용의 실사구시를 반복하며 정책에서 편을 가르지 않겠다고 선언해 왔고, 정부 출범 이후에는 국정의 간판 상품으로 성장과 성과를 내걸었다.
해외 언론조차 집권 1년을 평가하며 한국을 실용주의 균형 외교를 추진하는 전략적 중견국 이라 호명한다. 그 틈에서 '뉴이재명'이라는 신조어가 튀어나왔다. 전통적 진보 지지층이 아니라, 이념 대신 성과라는 계산기 하나만 들고 이 대통령에게 새로 몰려든 신흥 세력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실제로 중도·보수 성향 인사들 중 일부는 이 정부의 노선을 이념 대립이라는 철 지난 레코드를 끊는 실용주의 라며 추어올리고, 여당 내부에서도 이들을 외연 확장의 전리품으로 삼기 위한 노골적인 구애가 오간다.
현상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진영 논리에 지친 시민이 성과를 갈망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이념적 경직성을 내려놓는 유연성 역시 민주주의의 자산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물어야 할 것은 현상의 존재가 아니라 그 정체다.
정치철학의 교과서를 다시 펴 보면 답은 냉정하다. '뉴이재명'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이른바 실용주의는 고전적 의미의 실용주의가 아니라, 목적을 위해 도덕적 규범을 헐값에 처분하는 탈도덕적 성과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실용주의와 성과주의를 뒤섞는 지적 사기, 먼저 개념의 팩트체크가 필요하다. 실용주의는 찰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로 이어지는 철학 전통에서, 추상적 교리보다 구체적 결과로 사상의 가치를 검증하자는 방법론 이었다. 특히 듀이에게 실용주의는 더 나은 공공선을 향한 지성적 실험이었지, 가치 자체를 해체하는 만능 열쇠가 아니었다.
정통 실용주의는 무엇이 옳은가 라는 도덕적 지향점을 먼저 세워 두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의 유연성을 논한다. 원칙 없는 실용 이란 실용주의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조어이며, 그것을 실용주의라 부르는 것은 지적 사기다.
다산의 실사구시 역시 마찬가지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쓰면서도 그 모든 실학의 종착역을 민본(民本)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좌표에 못 박았다. 사실에 근거해 옳음을 구한다는 실사구시의 본래 뜻은, 유불리에 따라 사실 자체를 편집하고 원칙을 갈아 끼우는 오늘의 정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뉴이재명' 현상은 어디에 서 있는가. 구조를 해부하면 두 지점에서 균열이 드러난다. 첫째, 원칙의 지위가 다르다. 정통 실용주의에서 원칙은 수단을 검증하는 심판대지만, 성과주의에서 원칙은 성과를 위해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소모품이다. 어제의 선언과 약속이 오늘의 상황에 따라 손쉽게 재해석되거나 폐기될 때, 그것은 유연성이 아니라 무원칙 이며, 이를 실용이라 포장하는 순간 언어 자체가 부패한다.
둘째, 정당화의 논리가 다르다. 실용주의는 결과와 함께 절차의 정당성을 묻지만, 성과주의는 결과를 냈는가 혹은 이익이 되었는가를 모든 비판을 잠재우는 최종 심판으로 삼는다. 유시민 작가가 같은 진영 내부에서 이 정부의 권력 구조와 개혁 방식을 비판하자, 친명계 정치인들이 논리가 아닌 인신으로 응수하는 풍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논쟁이 무엇이 옳은가 에서 누가 이기는가로 이미 격하되었다는 자백이다.
결국 '뉴이재명'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것은 방법론으로서의 실용이 아니라, 도덕을 성과의 발치에 무릎 꿇리는 정치적 자산화다. 이것은 실사구시가 아니라 실리구리 이며, 실용주의가 아니라 수단을 가리지 않는 노골적 결과주의다. 명명은 정확해야 한다. 부정확한 이름은 언제나 부정직한 정치의 은신처가 된다.
도덕 규범을 하위 변수로 강등시키는 정치 문법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릴 때, 그 청구서는 세 가지 형태로 되돌아온다.
첫째, 사회적 신뢰의 잠식이다.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가 못 박았듯 시장과 정치 제도는 신뢰라는 무형의 윤활유 없이는 작동 비용이 폭등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시 신뢰가 두터운 사회일수록 협력의 거래비용이 낮아진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정치가 이익이 되면 약속도 조정 가능하다는 신호를 반복해서 발신할 때, 규칙과 약속을 지키는 시민은 성실한 바보로 전락한다. 원칙을 지킨 사람이 손해를 보는 사회에서는 결국 아무도 원칙을 지키지 않으며, 그 손실은 특정 정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신뢰 자본에서 무자비하게 차감된다.
둘째, 공적 언어의 파산이다. 공론장에서 무엇이 옳은가 라는 질문이 밀려나고 무엇이 이득인가 라는 타산만이 남을 때, 정치는 공공선을 논하는 광장이 아니라 욕망과 이익이 부딪히는 뒷골목 시장으로 전락한다. 막스 베버가 소신윤리와 책임윤리를 구분하며 경고했듯, 책임윤리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지 도덕적 심판 자체를 소각하는 면허가 아니다. 결과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서 새겨 넣은 명제, 곧 최종 심판자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문장이 정치의 문법으로 부활한다. 성과라는 유일신 앞에서 절차와 정직은 한낱 장식품이 된다.
셋째, 지지층 자체의 자멸이다. '뉴이재명' 현상이 품고 있는 결정적 역설은, 성과만으로 결속한 지지는 성과가 흔들리는 순간 아무런 점착력 없이 흩어진다는 사실이다. 가치에 의한 지지는 실패를 견디고 재기를 기다리지만, 효용에 의한 지지는 실패를 배신으로 즉시 번역한다. 도덕적 기반이 없는 정치적 동맹은 그래서 늘 유능함을 증명해야만 연명하는 구조이며, 그 증명을 위해 점점 더 극적인 성과와 점점 더 사나운 적의 프레임을 요구하는 악순환에 스스로 갇힌다. 이것은 승리의 문법이 아니라 파산 예약의 문법이다.
물론 공정하게 덧붙일 것은 있다. '뉴이재명' 현상의 등장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오랜 진영 대결과 명분 정치가 빚어낸 국정 교착에 대한 대중의 피로는 실재하며, 실용주의 외교와 성장 중심 국정에 대한 외신의 긍정 평가 역시 실재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실용이 어느 자리에 서느냐다. 수단으로서의 실용은 마땅히 예찬받아야 하지만, 가치를 대체하는 실용은 단호히 경계되어야 한다. 이 구분을 놓치는 순간 실용주의는 유능함의 오만으로 변질되고, 정치는 도덕적 나침반을 잃은 채 안개 속을 질주하는 폭주 열차가 된다.
정치의 본질은 단순한 문제 해결사가 아니다. 정치는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제시하고, 공정한 절차를 통해 시민의 신뢰를 축적하는 장기의 공사다. 도덕적 가치가 배제된 실용은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성과로 정당화된 무원칙은 공동체의 도덕적 자산을 고갈시키는 속물적 유령에 불과하다.
'뉴이재명'이라는 이름으로 배회하는 그 유령을 걷어내는 길은 정치학 교과서의 첫 장으로 돌아가는 것, 그 단순한 용기가 전부다. 수단은 도덕적 목적 아래에 있어야 하고, 절차는 결과에 앞서 지켜져야 하며, 약속은 유불리가 아니라 신뢰의 언어여야 한다. 효율과 성과라는 달콤한 언어 뒤에 웅크린 탈도덕성의 위험을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히 명명하지 않는다면, 한국 정치는 유능함이라는 얇은 껍질 아래에서 도덕적으로 서서히 붕괴할 것이다. 실용 이라는 단어의 진짜 값을 되찾는 일은, 그 유령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것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용 대 원칙 이라는 낡은 싸움이 아니다. 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실용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더 어려운 질문이다.
다산의 실사구시도 단순히 ‘이익이 되는 것을 찾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현실을 정확히 보고 문제를 해결하자는 정신이다. 현실을 본다는 것은 불편한 사실도 보는 것이다. 내 편의 잘못도 보는 것이고, 상대편의 옳음도 인정하는 것이다. 성과가 나왔으면 인정하고, 잘못이 있으면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실사구시다.
따라서 ‘뉴이재명’ 현상에 던져야 할 질문도 단순하지 않다. 이 정부가 실용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실용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가. 성과의 대가는 누가 부담하는가. 그 과정은 공정했는가. 오늘의 성과가 내일의 신뢰를 훼손하지 않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성과가 사라져도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은 무엇인가. 정치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실용은 어느 순간 유령이 된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유령이다.
실용은 정치의 목적이 아니다. 실용은 목적을 현실에서 이루기 위한 도구다. 성과 역시 정치의 최종 목적이 아니다. 성과는 국민에게 약속한 가치를 현실로 증명하는 결과다. 따라서 가장 위험한 정치는 무능한 원칙주의가 아니라 유능함을 이유로 원칙을 면제받으려는 정치다.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뉴이재명’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화가 아니다. 성과를 내되 설명할 줄 알고, 유연하되 기준을 잃지 않으며, 현실과 타협하되 정의와 공정을 포기하지 않는 정치다.
결국 실용의 진짜 시험대는 성과가 아니다. 성과를 내는 과정에서도 원칙을 지킬 수 있는가다. 그 질문에 끝까지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실용은 정치의 기술을 넘어 국민의 신뢰를 얻는다. 그렇지 못한다면 실용은 아름다운 간판일 뿐이다. 간판이 아무리 화려해도 건물의 기초가 무너지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정치도 다르지 않다. 성과는 박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원칙만이 역사를 견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 글은 저의 순수 지적 산물이므로 인용시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사람으로 사람들과 사는날 말랑말랑한 뇌와 관점의 감성으로 전등이 등불을 전합니다. (조선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