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창동우회의 결성
1) 조직 동기
해방(1945)과 동시에 의무 교육의 실시로 말미암아 모교 대창학원(大昌學院)의 학생수가 크게 감소되는 한편 재정 곤란으로 폐문(閉門)의 지경에 이르게 되매 모교 장래를 걱정하는 몇몇 졸업생들이 여러 차례 회합하여 이 타개책을 강구한 나머지 모교를 살리는 방법으로 중등과(中等科)를 설치하자는 의견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니, 그 이유로는 첫째로 국가적으로 보아서 과거 일제 교육을 받은 청소년의 재교육이 시급히 요청되는 바이니, 국민학교를 졸업한 청소년으로 하여금 비록 일제 교육이나마 이미 받은 보통 교육을 토대로 하여 국가 민족적인 중등교육(中等敎育)을 베풀어 준다면 훌륭한 국민이 될 수 있으므로, 모교로 하여금 국가사업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다음으로 현실이 요청하는 이런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시킨다면 모교는 저절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 뜻을 달성하기 위에서는 누구보다도 모교 출신자가 아니고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 추진력으로 졸업생회(卒業生會)를 조직하기로 하고, 당시의 김석희 원장(金碩熙院長) 선생과 정종덕(鄭鍾德) 선생께 그 뜻을 전달하여 절대적인 찬의(贊意)를 받게 된 것이었다.
2) 창립까지의 경과
1946년 7월 김석희 교장(金碩熙校長) 선생, 정종덕(鄭鍾德) 선생 중심으로 졸업생회 조직 준비를 개시하였고, 동년 10월 모임 결성의 여러 가지 준비를 완료하고 결성식(結成式)을 거행하려던 날 불의의 10.1사건으로 인해서 중단되었다. 1947년 7월 노성석 씨(盧聖錫氏) 개포면 토지 관계의 문제가 있었고, 1948년 1월 전체 조직은 불가능하여 일부 주동자들의 힘을 모아서 모교 재건을 위해 주선한 결과 예천여중(醴泉女中, 當時 新興中學), 예천농중(醴泉農中), 군 학무계(郡學務係)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대창공민학교(大昌公民學校)를 설치하였다.
1948년 11월 그 동안 혼란하던 사회는 안정되어가고 일부 회원의 활동으로 대창공민학교(大昌公民學校)란 명칭 밑에서 중등과(中等科)를 설치하게 되었으나, 다시 정식 중학교 설립의 필요를 느껴 널리 모교 출신자를 규합하여 대창동우회(大昌同友會)를 결성하고, 사업 목표를 세웠는데, 그 목표는 학교 공로자 표창, 학교 도서관 설치, 재교생 학업 장려, 중학교 승격을 위한 준비였다. 그래서 재단 설립을 위하여 읍내 유력자들을 여러 차례 심방(尋訪)하였으나 여의치 못하고 교장 김석희(金碩熙) 선생의 전 재산 희사(喜捨)로써 모교는 새 발전의 본 괘도에 오르게 되었다.
1949년 7월 제1차 총회를 개최하고, 사업 목표를 기념 강당(講堂)을 설치하기로 사업 목표 변경 결정하고, 사업 추진의 준비로 출신자 명부를 작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1950년 2월 제2차 총회 개최에서는 각 읍면지부(邑面支部)를 설치하고, 그 지부를 통하여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읍면별 담당자는 다음과 같다.(생략)
1951년 12월 23일 총회를 개최(29名 參席)하였는데, 이날 운동장 신설, 선교장(先校長) 선생 기념비(記念碑) 건립, 동상 건립(銅像建立), 동우회지(同友會誌) 발간 등 사업에 대한 안(案)이 제안되었으나 우선 모임 자체의 기초 확립이 선결 문제라는 결론으로, 유능 회원 규합, 모임 운영 자금 조달을 제1차 목표로 1951년도 내에 회비 3천 원 갹출과 동시에 회원 명부를 작성하기로 하고, 이 사업이 완료되면서 제2차 목표로 학교 발전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그 실천 방법은 1주일 이내로 역원회(役員會)를 개최하여 역원회에서 적의(適意) 결정 실행하도록 일임하기로 가결하였다.
1952년 1월 3일에는 역원회를 열었는데, 이 날 결의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현재 건축 중인 강당(講堂)의 전비용을 조달하기로 목표를 세웠다. 이미 학교에서 계획 세운 강당을 사업 목표로 하는 것이 우스운 것이나, 종래의 계획이 있을 뿐 자금 조달에 유리한 방법이란 데서였다.
2) 추진 방법 결정 : 위선 회원 명부를 작성 회원에게 교부하여 회원이란 인식을 준 뒤에 자금 조달하여야 한다는 견지에서 오는 1월 말일 내로 확실한 회원을 조사하여 2월 10일 이내로 각 회원에게 회원 명부를 전달하는 동시에 2월 15일 모교 개교기념일(開校記念日)을 기해서 임시총회를 열기로 가결하였다. 명부 작성은 수료생 명부에 의하여 각 면위원(面委員)의 책임 하에 작성키로 하였다.
3) 기타 회원 명부 작성에 필요한 경비는 역원(役員) 중에서 갹출하자는 의견이 있어 각자 신고에 의하여 수합하기로 한 결과 39원의 수입금이 있었으며, 총회 때 추대하지 못한 고문(顧問)을 역원회(役員會) 석상에서 추대하자는 의견이 있어 전원찬동으로 학교장 김교용(金敎容) 선생, 이만녕(李萬寧) 씨, 김현종(金炫鍾) 씨를 추대하였다.
1953년 11월 14일에도 역원회를 열었는데, 이날 결의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한국전쟁 등으로 지연되어 온 사업(學校 建設 事業 協調)을 금년 추수기를 이용하여 성과를 올리도록 하기 위하여 별지(別紙)와 같이 읍면별로 분담하여 회원 1인당 쌀 2말(斗) 이상씩 갹출시키도록 함을 결의하였다.
2) 회원 방명록(芳名錄) 작성의 건 : 회원 간 친목을 두터이 하고 동시에 사업 추진의 한 방편을 삼고저 과거 몇 년 간 정리한 초고(草稿)에 의하여 회원 방명록을 작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3) 기타 : 동우(同友) 현석호 씨(玄錫虎氏) 국회의원 출마의 원조 건에 관한 제안이 있어 동우로서 당연히 원조하여야 할 일이나, 회(會)를 위한 상당한(會員이 認定할만한) 물적 희사를 기다려서 원조하기로 결의하였다.
1953년 12월 9일 역원회(役員會)를 열었는데, 결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사업 추진의 건 : 작성 완료된 명부를 각 회원에게 교부하는 한편 사업을 추진시키기로 하는데, 예천읍내 회원이 다수임에 감하여 전임 위원(專任委員)을 두자는 발안(發案)에 전원 찬성하여 임명성(林明成)이 그 임무를 맡기로 하였다.
2) 회원 명부 대금 처리의 건 : 명부 대금 13,500원을 현석호(玄錫虎) 씨로부터 담당한다는 청이 있어 그대로 응락할 것을 전원 찬성 가결하였다.
22. <대창동우회 명부> 발간(大昌同友會名簿發刊)
1950년 11월에 18x25cm의 갱지에 19쪽으로 가리방 글씨로 등사하여 발간하였다. 취지서(趣旨書)에서 이르기를,
"과거 30성상(星霜) 하루같이 왜정(倭政)과 싸우면서 지방 청준(聰俊)을 길러오던 모교 대창학원(大昌學院)이 현실적 요청에 호응하여 중등교육 기관으로 역사적인 새발전을 하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예천의 한 자랑인 동시에 일찍이 학(學)을 구하여 교문을 오르내리던 우리들이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기쁨이다. 이에서 책보 끼고 교문을 오르내리던 옛날 학창 시대 심정으로 돌아가 옛 정을 새롭게 하는 동시에 모교 발전의 한 추진력이 되며 한편 국가 대업에 이바지하는 바 되고자, 뜨거운 정성을 모아 대창동우회(大昌同友會)를 결성하게 된 바이다. 앞날 모교의 문을 두드릴 수천수만의 학우들 이 뜨거운 정성을 헛되이 돌리지 말기 위하여 단단히 묶이어 주기를 빌고 바라는 바이다. 단기 4283(1950)년 11월"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임원 명단(任員名單)에서 이르기를,
"회장(會長) 박철구(朴哲九), 부회장(副會長) 최현주(崔顯柱), 황수만(黃守萬), 총무(總務) 김경한(金慶漢), 감사(監事) 안영동(安永東), 허국승(許國昇), 위원(委員) 김문환(金文煥), 박철희(朴哲熙), 김일태(金一泰), 김교용(金敎鏞), 임명성(林明成), 권동하(權東河), 고언규(高彦奎), 황한태(黃漢泰), 노태헌(盧台憲), 김영근(金榮根), 박성일(朴性一), 황장섭(黃長燮), 배기묵(裵基黙), 김한기(金漢璂), 김영식(金永植), 이명화(李命華), 김서환(金瑞煥), 권중구(權重求), 권장찬(權章贊), 권재윤(權在允), 박노식(朴魯植), 김정열(金正悅), 김영진(金榮鎭), 장사원(張師遠), 조제석(趙濟錫), 장대현(張大鉉), 김두영(金斗永), 박덕우(朴德雨), 신현오(申鉉五), 황만수(黃萬守), 김수대(金壽大), 황석진(黃錫鎭), 안영철(安永哲), 권오덕(權五德), 정갑춘(鄭甲春), 윤문식(尹文植), 정창모(鄭昌模), 한일증(韓一曾), 남상주(南相周), 고문(顧問) 이만녕(李萬寧), 김현종(金炫鍾), 김교용(金敎容)"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