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광복절이며 성모승천대축일(聖母昇天對祝際日)에 바티칸에서 한국에 오시어 종교인의 참모습을 하나하나 실천하시며 다니시는 모습을 보니 천주교 신자들이 부럽다. 16일에는 100만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 광화문에서 교황께서 시복식을 집전하시는 모습을 캠코더로나마 녹화하며 지켜 보았다. 시복식(諡福式)이란 가도릭교회가, 거룩한 삶을 살았거나 순교(殉敎)로 인해 이름이 높이 알려진 이에게 복자(福子)라는 칭호를 주어 특정 교구, 지역, 국가, 혹은 수도 단체 내에서 공식적으로 공경을 바칠 수 있도록 허가하는 교황만이 재가할 수 있는 공식 선언을 말한다. 복자(福子)란 천주교에선 시성(諡聖) 다음 단계다. 한 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올 때는 세계 모든 나라가 선교사에 의하였다. 그러나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이벽을 중심으로한 학자들의 자율적임에 임하였다는 것이 다르다. 다음은 복자(福子)로 재가된 124명 중 첫번째 이벽(李檗) 요한 세례자에 대한 이야기다.
2005년의 새 해 들어 나의 첫 산행은 앵자봉(鶯子峰)에서 시작되었다. 앵자봉은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과 실촌면 사이에 있는 양자산(楊子山709.5m)의 제2봉으로 663.8m밖에 안되는 산이어서 흔쾌히 즐겨 따라 나설 산은 아니지만, 10년 가까이 인연을 맺고 있는 한뫼산악회의 시산제(始山祭)를 겸한 첫 산행이라서 함께 한 것이다. 앵자산의 '鶯'은 꾀꼬리 '앵' 자요, '子'는 접미사이니 꾀꼬리와 관계가 있는 산이다. 앵자산의 산세가 꾀꼬리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해서 앵자산이라 하였다는 말이 전한다. 이 산을 학소산(鶴巢山)이라고도 하는데, 학(鶴)이 집을 짓고 살던 산이라는 말처럼, 아름다운 꾀꼬리가 둥지를 틀고 살던 곳이라 해서 앵자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촌로들의 말에 의하면 앵자산은 조선 초에는 우산(牛山)이라 하였는데, 우산 5부 능선 위로 여름이 되면 해마다 꾀꼬리 떼들이 몰려와서 새끼를 쳐 나가기 때문에 앵자산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5부 능선 아래 골짜기의 맑은 계곡 물가에서는 봄이면 원앙새들이 몰려와서 새끼를 쳐 나가기 때문에 원앙산이라고도 불렀다고도 한다. 퇴촌면 주차장에서 차에서 내리니 왼쪽으로 커다란 아스팔트길이 오르는 언덕 끝에 양쪽으로 국기가 펄럭이고 있고 그 가운데에 커다란 십자가가 서 있다. 지금까지 내가 보던 십자가 중에 가장 큰 십자가였다. 그 입구에 사진으로 혹은 설명으로 하는 글이 요란해서 하나하나 사진을 찍다 보니 여기가 한국천주교 발상지인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되었다..
*. 천진암(天眞菴)에서 만난 사람 나는 천진암(天眞菴)에서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살아온 한 사람을 만났다.
비록 시대는 달랐지만 천진암이란 공간을 같이한 거룩한 만남이었다. 어쩌면 내가 평생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 분 같다. 옛날 아내와 함께 손을 잡고 천주교에 귀의(歸依)하기로 작정을 하고 망설이던 중, 아내가 친구 따라 먼저 불자(佛子)의 길을 가는 바람에 만나지 못한 분을 천진암(天眞菴)에 와서야 비로소 만나 뵙게 된 것이다. 나와 같이 그 분을 모르는 이들에게 나는 용감하게 그분을 소개 드리고 싶다. 그분은 한국 천주교의 창시자 이벽(李檗) 성조(聖祖)이셨다.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자비로우신 섭리로 구원의 은총을 기묘히 베푸시는 천주시여.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先祖)들로 하여금 주의 진리를 스스로 탐구하고 몸소 실천하여 모든 이의 모법이 되게 하시고, 불철주야로 전파하다가 마침내 거룩하고 장렬한 죽음으로 그 진리를 수호하며 증거하게 하셨으니 선조들에게 시성의 영광을 허락하시고 우리에게도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내려 주시어 우리도 선조들을 본받아 신앙으로 살다가 신앙을 위하여 용감히 죽을 수 있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시성 추진기도
*.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이벽(李檗) 성조(聖祖) 이 벽 성조는 1754년 경주 이씨 무반(武班)의 이름 높은 가문의 후손 이부만의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포천에서 태어났다. 숙종 때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선생이 총명한 이벽(李檗)을 보고 ' 이 아이는 앞으로 반드시 아주 큰 그릇이 되리라' 고 예언 하였다. 그 예언대로 그는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여 남인(南人) 학자의 일원이 되었다.
일곱 살 때 경서(經書)를 읽고, 열아홉 살 때 권상복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천학고(天學考)', '상천도(上天道)'라는 글을 지었다. 공의 가문에는 천주교 책이 있었다. 공의 5대조부인 묵암 이경상이 볼모로 중국 심양(瀋陽)에 가있던 소현세자(소현세자)를 모시고 8년 동안 중국에 있을 때 아담샬 신부와 교분을 맺고 천주교 도리를 듣고 귀국할 때 가져 온 책이었다. 이 책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스스로 익히신 분이 바로 이 벽(李檗) 성조였다.
이 벽(李檗) 성조는 1779년경부터 1785년경까지 약 7년여 천진암(天眞庵)은 폐찰의 암자에서 거처하며 독서하고 계셨다. 당시 서학(西學)에 관심있는 유학자들이 천진암에서 모여 천주교에 대하여 강론을 나누며 독서하고 있었다.
거기서 천학(天學)에 관심이 있는 21세의 정약전, 19세의 정약종, 17세의 다산 정약용 3형제와 22세의 이승훈, 15세의 이총억, 권철신 44세 등과 깊은 교우 관계를 26세의 이벽 성조는 맺고 있었다. 당시에는 폐허가 된 천진암(天眞庵)에 자주 모여서 강학(講學)을 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그들에게 전하여 주어 사제 없이 자생적으로 한국 천주교 창립의 기틀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천학(天學)은 당시에는 생소하고 이단시(異端視) 되는 종교여서 가정집이나 사찰에서는 강학을 할 수 없어서서 천진암(天眞菴)을 이용한 것이다. 이 무렵 순수한 학문적 지식 탐구의 강학회를 종교적 신앙의 수련회로 발전시키신 분이 이벽 성조였다. 공이 26세가 되니 키가 8척이나 되고 기묘한 학문에 아주 박식하여 천문학, 지리학, 의학, 복술 등 제 학문에 두루 통달하여 사람들의 물음에 답변할 때에는 그 언변이 흐르는 물처럼 막힘이 없었고, 그의 기묘한 문장은 꽃이 만발하고 숲이 우거진 듯하여 그를 추종하는 자가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벽 성조는 이렇게 도우(道友)가 무리를 이루게 되자 신구약(新舊約) 대의를 집약한 '성교요지(聖敎要旨)'라는 긴 한문 서사시를 지었다. ‘천주공경가’를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의 분들은 이렇게 열성은 지극 정성이었지만 천주교 책들이 충분하지 못하여서 매일 조석으로 묵상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공은 1720년 북경을 다녀온 사신 이이명으로부터 구한 천주교 책을 정독하고, 1784년 봄에는 이승훈을 보내어 성사은총(聖事恩總)을 받고 성 베드로 본명으로 세례를 받아오게도 하였다.
당시는 음력을 쓰던 시절이라, 7일마다 천주께 바쳐지는 날 일요일이 있다는 말을 전하여 듣고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을 임시 주일로 정하여 이 날에는 세상만사를 중단하고 온종일 기도와 묵상과 단식으로 금식재(禁食齋)를 지켰다. 설, 대보름, 단오, 한식, 추석 4대 명절을 제외한 모든 날 일만하고 있던 당시 근로자에게 최초로 정기적인 휴무일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 때 천진암의 모습을 사람들이 이렇게 쓰고 있다.
'寺破無舊觀'(사파무구관, 천진암은 다 허물어 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 -정약용 '天眞菴爲古寺造紙物今屬司饔院'(천진암위고사조지물금속사옹원, 천진암은 오래 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옹기를 만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홍경모의 南漢志
다음은 이벽 성조(聖祖)를 말하고 있는 당시 사람들의 글을 요약한 것이다
-이 어른은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이미 가지고 계셨고, 우리 종교의 여러 가지 점들, 특히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점들에 대하여서까지도 아주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어른이 저를 가르쳐 주신 스승이시고, 저에게 영혼을 넣어주신 분이십니다. -1789년 이승훈 선생 서간
이승훈 선생은 북경에 가서 그라몽 신부에게 한국 최초로 세례를 받고 많은 성서와 성물(聖物)을 갖고 돌아와 전도하신 분이다. 서소문 형장에서 칼을 받기 직전에 동생 이치훈이 "형님 천주학을 하지 않겠다고 한 말씀만 하시면 상감께서 살려주신답니다." 하며 소맷자락을 잡고 애원하였으나 이승훈 선생은 동생의 손을 뿌리치며 "무슨 소리냐! "月落在天 水上池盡이니라"(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물이 위로 치솟아 오르면 못은 마르고 끝나리라.) 하였으니 '月'은 자신의 신앙을, '水'는 박해자들의 세도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 승훈은 당시 북경에는 천주를 공경하는 세력이 번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을 가는 아버지 이동욱씨를 따라 북경을 가게 하여(1783년) 천주교의 많은 서적을 얻어오게 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
-조선 천주교회는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평신도들이 성직자 없이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들은 마땅히 조선 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로마 교황 요한바울로 2세 강론
*. 이벽 성조의 고뇌 이 단으로 취급 되었던 그 당시에 천주교를 전파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웠던 일인가.
박해의 원인은 유교(儒敎)의 이념을 들어 천주교는 아비도, 임금도 없다고 하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무리라면서 나라가 천주교를 사교(邪교)로 낙인찍었다. 천주교도들을 강상죄인(綱常罪人)으로 다스렸기 때문이다. 강상죄인(綱常罪人)이란 삼강오륜에 어긋난 죄인이란 말이다. 당시 사회 법도로서는 상인(常人)은 나라에서 처벌하였으나 양반(兩班)들은 문중 처벌에 맡기고 있었다. 양반 중에는 고관대작이나 왈실과 깊은 관계 때문인 것 같다. 경주 이씨의 문중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부만 씨의 아들 이벽 성조가 천주교를 그만 두지 않으면 족보에서 삭제하기로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부모에게 제사 드리지 말라고도 하며, 남녀칠세 부동석(男女七歲 不同席)인 세상에서 양반집 부녀자들이 남정네들과 동석하기도 하니, 이는 오랑캐의 법도이므로 양반을 상놈으로 만들고, 상놈을 양반으로 만드는 이러한 불법을 가르치는 사문난적(斯文亂難敵)은 당장, 경주 이씨 문중에서 제명처분 해야 만 한다" 그렇게 되면 하루아침에 양반에서 상인의 가문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 벽 성조의 아버지는 자식을 설득하다 못해서 목매어 자살하려 하기까지 하였다. "이 벽은 사특한 무리들의 괴수이니, 우선 그 형 이격이 아직도 벼슬에 있는 것이 말이 되는가?
즉시 벌을 주어 내 쫓아야 한다."(1801년 조성왕조실록)는 기록만 보아도 그 아버지의 고민을 짐작할 수가 있다. 아무리 해도 자식의 뜻을 돌릴 수 없고 문중의 압박은 거세어 지자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무관(武官) 장수였던 아버지 이부만은 자식 이벽이 천주교를 믿은 천벌로 전염병 염병[장질부사]에 걸렸다고 속이고 자식의 외부 출입을 단절시키고 말았다. 염병(染病)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전염병이었다. 이래도 이 벽 성조께서는 뜻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그러면서도 효(孝)를 지켜야 하는지라 1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의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철야기도와 묵상으로 신앙을 증거하다가 탈진하여 1785년 음력 6월 14일 밤에 거룩한 순교를 하였다. 당시 나이 31세의 아까운 청춘이었다. 이 벽 성조의 이 죽음은 이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殉敎)였던 것이다.
*.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대성상 100년 계획 천진암에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성조를 기리고, 예수님을 공경하고 자손들에게 대대로 자랑스러운 유산을 주기 위해서 지금 한 민족 100년 계획으로 천진암대성당(天眞庵大聖堂) 건립이 한창이다. 대지 30여만 평의 정지 공사를 마치고 5만여 평의 대성당 건축물의 기둥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건물이 완공을 목표로 하는 2079년이 되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300주년이 되면, 동서 길이가 195m, 남북이 175m나 되는 대성당을 우리나라 국민도 갖게 되고 이를 세계에 자랑하게 된다.
대성당은 1,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 2층에 총3만 3천석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다. 한국의 자연은 세계에 내놓아 자랑할 수 있는 금수강산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한국을 찾아오는 해외 관광객들에게 이렇다 내놓을 건물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되던가. 기독교 국가인 서구인들에게 이 천진암 대성당은 관광차원에서나, 국익 차원에서 신앙을 초월하여 전 국민이 협조해야 할 일이다. 내가 둘러본 유럽과 북미에는 그 나라와 국민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하는 성당이 수없이 많았다. 주님의 몸에 해당하는 그 성당은 수백 년 동안에 지어졌으면서도 지금까지도 미완성인 교회도 많았다. 베드로가 순교한 자리에 세웠다는 로마 베드로 대성당은 1506년에 착공하여 330여년 공사 중이면서도 미완성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220년 미완성), 이태리 밀라노 대성당(350년 공사), 스페인 바르셀로나 성가정대성당(120년 공사 중) 등이 그러하였다. 그런데 100여 년 전에 지은 우리나라의 명동 대성당은 427평에 1천 500석인데 당시 천주교 신자가 전국에 1만 4천 5백 명에 조선인 신부가 한 분도 없었고, 프랑스 선교사 11명뿐인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한국인 신부들이 3천여 명, 수녀들 1만여 명 신자들이 1,000만 명으로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모금 운동이 한창인 모양이다. 전국 신도들의 월 1천원, 1만원 운동이 그것이다. 광장 식장 주변에 사방 1m 크기의 큰 돌이 있어서 이게 뭔가 하였더니 성당의 벽과 기둥, 기단 등에 쓰일 돌로 대성당을 지으려면 약 십만여 개가 소요된다는 돌이다. 이 돌 한 덩어리를 채석, 재단, 조각 운반하는데 1백만 원이 드는 돌로 뜻있는 성도는 물론 국민들의 참여를 부탁하고 있었다. '우리 선조들이 한 덩이 한 덩이 돌을 바쳐 온 겨레가 지은 성당'으로 자자손손에게 기리 남기기 위해서 사찰 건립 찬조로 1만원 짜리 기와에 글을 쓰듯이 이름을 새겨 넣는 모양이다.
*. 천진암에 발상지에 모신 한국 천주교창립 선조들 천진암 성지의 이곳저곳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아왔으나 돌아갈 차 시간에 쫓겨서 교황 강복 머릿돌 앞 제단의 오른쪽에 있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비와 천진암 터 창립 선조 묘역을 참배하고 도 사진에 기록하여 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문헌상에 나타난 것을 종합해 보면, 천주 교리와 당시 한국인의 삶의 목표였던 충(忠)과 효(孝)의 갈등이 많았다. 문헌에는 이 벽, 이승훈, 권일신 등이 배교(背敎)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배교(背敎)란 믿던 종교를 배신하고 등지는 것을 말한다. 문중(門中)이나 나라에 맞서 그들이 사교(邪敎)라고 주장하는 천주교를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개인의 일만이 아니었다. 죄인 연좌제(緣挫制)가 있던 시절이어서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이야기이기도 하였다. 개인의 죽음을 넘어서 가정의 몰락과 연관되는 커다란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분들의 배교(背敎)의 경우를 신중히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그 어려운 시대에 천주를 마음에 영접하고 육신을 바친 위 사진의 천주교창립 선조들을 여기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긴 글을 접고자 한다. -이 벽 성조의 자는 덕조(德操), 교명은 요한세레자로 정약용의 매부다. 천진암에서의 권철신, 정약현 등의 서학 토론회에 참가했다가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은 후 한국 천주교 창시자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아버지가 선교 운동을 하는 것을 말리다가 자살하자, 배교자(背敎者) 이기경의 권유로 천주교와 동지들과 절연하였다가 1786년에 페스트로 죽었다고 하는 말도 문헌에 전해 온다.(동아문화사 백과사전 1061쪽, 한국인명사전 634) '이벽 성조는 당시 사회 가치의 으뜸인 충(忠)과 효(孝) 사이에서 인간적인 고뇌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1850년 다블뤼 안주교)'는 말과 같이 현재 천주교에서는 부득이한 배교(背敎)는 배교(背敎)가 아니라는 설로 시정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이벽의 묘는 수소문하여 공동묘지에서 발견한 묘의 지석으로 확인하고 이곳에 이장한 묘소다. 다음은 이번 124 복자(福子) 1위로 선정된 명단이다.
1번 이벽 요한 세례자./ 연령 31세, /신분 양반, /순교일 1785년 /순교형식 가문 처형, /순교지 포천 또는 경기 광주 -암브로시오 권철신은 권일신의 형으로 이벽이 조선에 천주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기초로 삼으려고 선택한 학자로 이승훈에 의해 입교하였다. 신유박해 때 66세의 나이에 매를 맞아 죽으면서도 천주를 부르다가 순교하였다.
-베드로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부. 이벽의 권유로 입교. 1783년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북경에 가서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아 한국 최초의 영세 신자가 된 분이다. 신유박해로 사형되었는데 아들, 손자, 증손 4대가 순교한 가정이다.
-다산 정약용의 교명은 요한. 이승훈의 처남으로 이 벽에게 서학을 배웠다. 벼슬길에서 천주교인으로 유배를 되풀이 하며 '목민심서' 등 많은 글을 남겼다.
-프랜시스 자비에르 권일신은 이 벽의 권유로 입교한 분이다. 국내 각 지방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여 전국 포교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승훈에게 최초로 영세를 받았다. 양반체면을 무릅쓰고 추조판서에게 나아가서 자신도 중인 계급 김범우와 함께 천주교를 신봉하였으니 같은 벌을 받게 해달라고 청원하기도 하였으나 80 노모의 비경(悲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교(背敎)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