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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문예창작 82학번사
안성 하늘 아래 첫 학번
안성캠퍼스의 ‘저 문창과 사람들’
문창과의 ‘안성시대’가 시작되었다. 82학번부터였다. 그렇지만 동기생 대부분은 합격자 발표일까지 문창과가 안성에 위치한 이른바 ‘제2캠퍼스’로 신입생을 모집하였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흑석동에서 면접시험을 치르고 입학식도 했지만 강의에 출석하려면 안성으로 가야 하였다. 흑석동캠퍼스의 서라벌홀에는 문창과 강의실과 학과사무실이 있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옥상 한쪽으로는 비록 옥탑방 크기에 불과해도 문학연구자료실까지 있는데 1학년만 안성으로 가야 한다니 마치 집안에서 내친 막냇자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성에는 문창과 82학번을 반겨줄 그 누구도 없었고, 예술대 건물조차 지어져 있지 않았다. 다만, 지방에서 올라온 동기생들만 입학 전부터 안성캠퍼스 기숙사에 들어갔거나 인근의 자취방에 거처를 정해서 어느 정도 낯을 익히고 있었다. 나중에 용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평화운수 버스를 타고 안성에 첫발을 내디딘 ‘통학파’와 그들과의 데면데면한 거리감은 숙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첫 학기 개강 전에 이미 ‘안성거주파’가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서울에서 오가는 동기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통학파’로 규정지어졌다. 하루의 강의가 끝나면 ‘통학파’는 그야말로 바람과 같이 사라졌고, ‘안성거주파’는 논밭 위를 지나오는 심심하고 외로운 기나긴 밤을 견뎌내야 하였다.
황량하고 황당하며 황망해지던 1982년 중앙대 안성캠퍼스의 문창과 입학생은 43명. 전년도의 예비고사에서 이름만 바꾼 학력고사를 보고, 학과 졸업정원보다 약 30%를 더 뽑는 졸업정원제에 따라 46명이 합격하였는데 3명은 등록 후 바로 입대를 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얼굴도 알 수 없었다. 5.92 : 1이라는 경쟁률을 극복하고 82학번 출석부에 이름을 올린 인원 가운데 31명은 남자, 나머지 15명은 여자였다. 나이 분포는 1957년생부터 1964년생까지 폭이 넓어서 서로간의 호칭이 정리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세월이 소요되었다.
‘안성(安城)’은 지명처럼 편안한 곳은 아니었다. 늦은 봄이 되도록 차디찬 모래바람이 수시로 얼굴에 끼얹어 왔다. 오전 강의시간에 맞춰 기숙사에서 사회과학대 건물로 이어진 길을 걸어 경상도 촌놈 곽승호가 올망졸망한 여학생 몇과 함께 등장하면 모두의 눈길이 그리로 쏠렸다. 왜관의 한 책방에서 일하다가 뒤늦게 대학에 입학한 더벅머리 곽승호의 가분수적 걸음걸이와 그의 어깨 아래로 나부끼는 앳된 여학생들의 신체적·정서적 부조화는 안성캠퍼스의 목가적 풍경에 파격을 불어넣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급부상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런가 하면 석양은 모래바람보다 오히려 더 지독하게 양미간에 번져 왔다. 그때쯤 다른 과 학생들이 ‘저 문창과 사람들’이라고 지칭한 사내들이 기숙사로 향하였다. 서울의 모 예술전문대 연극과를 졸업하고 왔다는 박종길은 거의 한 학기 내내 변함없이 짧은 흰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다녀 ‘안성백작’으로 불렸다. 광주에서 올라온 검정고시 출신 유병선은 배바지에 팔자걸음으로 한껏 길바닥을 쓸고 다녔다. 가볍고 작은 체구로 ‘전도요’라 자칭한 전동균과 학생회관 휴게실 인기 DJ로서 뭇 여학생을 설레게 만들었던 원동오, 태국 복서 무앙수린을 닮은 최선호 등도 거기에 어우러졌다. ‘한때 넉넉한 바다를 익명으로 떠돌 적에 / 아직 그것은 등이 푸른 자유였다’고 노래한 정종목은 대학 신입생의 싱싱함보다 의외로 섭섭지 않게 늙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독백 또는 밀담과 같았던 문학 공부
수업은 안성에서 하고, 학과 행사는 흑석동에서 진행되었다. 신입생 환영회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중국음식점 <안동장>에서 열렸다. 알코올 기운이 오르자 선배들에게서 우려의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다. ‘문창과가 안성으로 내려가 그동안의 명성이 추락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 그 골자였다. 그러한 술렁임은 이혜경의 「타는 목마름으로」 한 곡의 열창이 일거에 압도하였다. 안성에 홀로 떨어져 있는 82학번의 ‘문창과화’를 위해 전 학년이 참석한 청계산 백일장, 문학 세미나, 시화전, 체육대회 등의 행사가 잇따랐다. 하지만 ‘안성거주파’는 막차를 타러 용산시외버스터미널로 뛰어야 하였으므로 차분하게 선배들의 얼굴을 익히기 어려웠다. <호수집>이나 <개미집>에 파장까지 남는 82학번은 ‘통학파’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선배는 후배를 모르고, 후배는 선배를 알지 못하는 한 두 해가 건성건성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1982년의 예술대 신입생들은 안성캠퍼스의 객(客)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실습실이 필요한 예술대 학과들은 타 단과대학 건물일지언정 자체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문창과는 빈 강의실을 찾아 떠돌며 난민처럼 강의를 들어야 하였다. 원래 안성에 있던 단과대학인 사회과학대나 외국어대 학생들은 강의실이 겹치는 경우 텃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젊은 김은자 교수(한림대 국문과 교수 정년퇴직)는 과대표로 오인되어 종종 타과 복학생들에게 험한 말을 듣는 곤욕을 치렀다. 훗날 황지우 시인이 특강에 와서 ‘반도체칩 공장 같다’고 언급한 예술대 건물은 1983년 초 완공되어 안성시대의 근거지를 비로소 마련할 수 있었다.
82학번 동기들 사이에서 문학 공부는 독백 또는 밀담처럼 이루어졌다. 2학년이 되자 소설(小說) 쪽은 개별적으로, 시(詩) 쪽은 동인을 만들어 습작활동을 하였다. 교수나 선배들보다는 한창 뜨는 작가와 시인들의 영향이 컸다. 당시 소설에서는 이문열과 이외수의 작품들이 빠짐없이 읽혔고, 시에서는 ‘시운동’ 동인들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1983년 봄에 82학번 시인 지망생들은 ‘內在律 1’을 부제로 하는 동인지 『나, 그리고 우리』를 발간하였다. 동기들 중 가장 연장자인 송제홍을 비롯하여 김민수, 김웅현, 전동균, 정종목이 작품을 실었다. 이들은 동인지 발간이 ‘외부 세계와 유리되어 일체의 관계가 끊어진 고립지대에서 자신을 반성할 수 있고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아도취의 아집일 뿐’이라는 인식 아래, ‘그동안 우리가 갇혀 지내던 나르시즘의 울타리를 벗어나 조심스러운 첫발을 내딛기로 한 것’(「책을 내는 글」)임을 밝힘으로써 문창과의 전통으로부터 뚝 떨어져 나온 고립감의 한계와 새로운 시작의 포부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나, 그리고 우리』는 이듬해에도 84학번 최용탁을 참여시켜 계속 발간되었다. 그리고 1984년 봄에는 김선양, 박숙희, 함석배가 주축이 되어 79학번 김증래, 80학번 정경철 선배와 함께 두 번째 동인작품집 『潛伏期·春』을 내놓았다.
동문들과 교수들에게 ‘안성으로 이전한 문창과의 첫 입학생인 82학번에서 과연 몇 명이나 등단할 것인가’는 무언의 관심사였다. 이에 부응(?)하고자 홍순목이 198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호수의 눈」으로 당선되었다. 홍순목은 이후 KBS 드라마 극본 공모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고, 장편소설 『조선인 박연』을 썼다. 1986년에는 시에서 전동균이 월간 『소설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박종길은 삼성문예상 희곡부문을 수상하였다.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한 전동균은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등을 펴냈다. 박종길은 소설 『호모사피엔스의 추억』에 장편동화까지 발표하며 장르를 넘나드는 의욕을 보였다.
이후에도 동기들의 등단 소식은 계속 들려 왔다. 1987년 이정창이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수상으로 소설가가 되었다. 이정창은 환경공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 화제를 모은 소설 『불꽃바다』와 『장군의 여자』, 『대륙』 등의 호흡이 긴 작품들을 선보였다. 다음해 신춘문예에서는 이혜경이 「이앙기」로 동아일보 소설부문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1989년 『실천문학』 여름호와 1990년 『실천문학』 봄호를 통해서는 송제홍과 정종목이 시인의 이름을 얻었다. 송제홍은 정치 현실 풍자 시집 『오월은 푸르고나 민자네 세상』을 묶었고, 1992년 제4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정종목은 시집 『어머니의 달』과 『복숭아뼈에 대한 회상』으로 시단의 주목을 끌었다.
마음을 붙이기 어렵고, 어쩐지 외로운
휴학하지 않은 동기들이 마지막 학년을 맞이한 1985년에 문창과는 흑석동의 대학원과 안성의 학부로 완전히 나뉘었다. 그해 3월, 줄곧 82학번 출석부에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김형진, 오종환, 이철민이 1학년으로 복학하였다. 동기들과 한 달 남짓 공부하다가 입대한 김남조도 돌아왔다. 1986년에는 김한석이 4학년으로, 김민수와 김정성, 송재항이 3학년으로 소설세미나실 밖 잔디밭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동안 종적을 감췄던 문학수는 86학번 후배로서 두 번째 입학을 하였다.
대부분의 여자 동기와 늙었거나 이래저래 병역이 해결된 남자 동기 몇은 졸업과 동시에 각자 자기 일을 찾아 안성을 떠났다. 양재숙과 윤미숙, 이현정처럼 곧장 소식이 끊긴 동기도 있지만 김옥경과 백은경은 출판사에 입사하였으며, 권은순은 박숙희, 현은순과 함께 1세대 글짓기 강사라는 새 영역을 개척하였다. 박소혜는 한국통신 사보담당자 이후 프리랜서 작가로서 일해 왔다. 안창미는 기업 홍보실 근무와 브리태니커에서 백과사전 만드는 일 등을 하다가 어린이책 집필자로도 나섰다. 정혜선은 월간 『사람과 산』 창간 멤버였고, 이효재는 고교 국어교사가 되었다. 결혼 후 도미한 홍경원은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였으며, 김선양은 제주도에서 남편의 선교활동을 도왔다. 곽승호는 월간 『여학생』, 김정무는 축협 홍보실, 전동균은 방송광고공사에 입사하였다. 그리고 김웅현과 함석배는 광고대행사에서, 전병철과 조형진은 기업 홍보실에서 카피라이터 일을 시작하였다.
1987년 들어 원동오와 김원중, 권정식, 민병권, 박용해, 박정근, 유병선, 정연대, 최선호 등이 복학하였다. 하지만 1학년을 마치고 공군장기하사관으로 입대한 홍옥철은 제대 후 먼 바다로 떠났다는 소식만 전해 올 뿐이었다. 복학생들은 선배 학번과 후배 학번들로 ‘꽉 찬’ 문창과 분위기가 낯설었다. 게다가 데모 무풍지대였던 안성캠퍼스에도 연일 화염병과 최루탄이 엇갈려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기 어렵고, 어쩐지 외로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복학한 동기들은 서로의 자취방을 순례하다시피 하며 어울려 지냈다. 고향집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밑반찬이 떨어지고 쌀이 바닥나면 라면으로 끼니를 대신하며 구들장을 나란히 짊어진 채 말들을 잃어 갔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도 서울 도심과는 머나먼 안성의 내리요, 건지리요, 공도였다. 그들은 2학년 체육시간에 매번 정보석의 연극영화과와 축구시합을 하면 전반전이 끝나기도 전에 대여섯 골씩 먹고 나가떨어지던 주전선수들이었다. 그러한 패배마저 벌써부터 추억으로 삼아 안성읍내의 돼지곱창집이나 비지집, 시장골목 순대국집 등에서 술잔을 나누는 날도 잦았다.
문학 얘기는 관심 밖이었다. 졸업 후에도 습작은 내심(內心)에만 존재하였다. 그 내심이 발아하여 오종환은 1991년 월간 『현대시』 신인상을 받았고, 원동오는 원동우라는 필명으로 투고한 「이사」가 199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었다. 레저 회사 홍보실에서 일하던 김한석은 1995년 SBS 창사 5주년 기념 극본공모 대상을 받아 드라마 작가로 전업하였다. 모교 문창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김민수는 1999년 계간 『작가세계』 평론부문 신인상으로 문학평론가가 되었다.
복학생들의 진로는 결국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김남조는 형설출판사에서 근무하였고, 이철민은 잡지사를 다니다가 사사집필로 업무를 바꿨다. 김정성은 편집회사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최선호는 월간 『미술』 기자를 거쳐 프리랜서 작가와 작사가로 활동하고 있다. 유병선은 영화제작사 기획부서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고, 권정식과 박정근은 스포츠지에 몸담으며 각각 스포츠한국 편집국장과 일간스포츠 광고마케팅본부장으로 있다. 종근당 사보담당이던 박용해와 낙향한 정연대는 농부가 되었다. 송재항은 유능한 바둑강사이자 한자강사로서 성가를 높이고 있다. 노동운동을 위해 다시 학교를 떠난 김원중은 모 복지재단에서 근무중이고, 끝내 돌아오지 않은 홍옥철은 기계공장을 차렸다.
2005년에는 82학번 동기 가운데 가장 먼저 고(故) 오종환이 유명을 달리하였다. 문득 누구라도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음을 안타깝게 일깨워 준 너무 이른 부음이었다. 그 즈음부터 82학번 동기들은 해마다 한 두 차례씩 79학번 김증래 선배의 아내가 운영하는 충정로 ‘오감도’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참석자 수는 꾸준히 십 수 명. 모이면, 까마득히 떠나온 안성의 차디찬 모래바람도 드디어 따뜻하게 느껴지고, 행불의 얼굴들마저 막무가내 무작정 그리워지면서 다들 늦도록 흥겨운 취기를 버틴다.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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