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MIT 미디어랩의 디렉터였던 니콜라스 네그로폰테가 <디지털이다>(Being Digital)를 발표했다.
네그로폰테는 책에서 디지털 혁명을 예고했다. 원자와 달리 비트(Bit)는 시공간의 구속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관에서 출입이 제한되는 원자인 자료도 비트를 통해 재구성되어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될 수 있다. 그래서 네그로폰테는 산업시대의 조직과 제도가 비트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 보았다. 전지구가 비트로 통합될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책 역시 비트가 될 것이라는 것을 포함해, 예언자 네그로폰테의 전망은 거의 다 맞아떨어져 갔다. 그러나 동시에 비트가 바꾸는 세상의 위험과 한계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분명해졌다.
수십 년 전. 지금은 세계적 유명 인사가 된 스티브 잡스가 아직 무명이었을 시절.
그는 자신의 첫 번째 디지털 혁명을 발표했다. 혁명의 테마는 ‘개인용 컴퓨터’(PC)였다. 생애 최초로 정장을 차려입고 파트너 워즈니악이 개발한 ‘애플 2′(Apple II)를 소개하고 있을 때, 잡스는 이미 태양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IT 생태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잡스는 부활한 공룡 IBM과 예상치 못한 난적 MS 연합군에 밀려 경영 부진의 책임을 지고 할리우드로 쫓겨났다. 할리우드에서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Pixar Animation Studio)를 설립하여 <토이 스토리>, <니모를 찾아서> 등을 통해 영화계의 ‘디지털’ 혁명을 일으킨 것 외에 잡스가 한 일이 하나 더 있다. p2p 기술(파일 공유 기술)과 음반, 영화 산업간의 지리한 전쟁을 목격한 것이다.
사실, p2p 기술은 ‘진정한’ 혁명이었다. p2p 기술은 네그로폰테가 말한 산업시대의 조직과 제도를 통하지 않은 지식과 정보의 새로운 생산과 유통의 체계를 만들었다. 이용자들 간의 대규모 협업이 국가의 행정과 기업의 유통을 통하지 않고도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기존 산업 세력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따라서 p2p 기술은 정점에 이르렀던 ‘냅스터’(Napster)부터 치열한 법정 공방의 중심에 섰던 ‘카자’(Kazzar)까지 기존 문화 산업계의 이해관계와 격돌했다. LP에서 DVD에 이르기까지 ‘콘텐츠 복제’를 통해 수익을 창조하던 기존 문화 산업계는, ‘비트의 세계에서 복제는 자유’라는 논리로 맞서는 p2p 세력을 용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결국 카자는 법정 판정승을 거두긴 했지만 서비스 자체는 쓰레기 더미와 비슷하게 되어 버렸다. 이후 카자 경영진은 새로운 길을 찾아 본거지인 유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p2p 기술에 기반해 인터넷 전화 서비스(VoIP)인 ‘스카이프’(Skype)를 개발한다. 지치기는 기존 문화 산업계도 마찬가지다. 비트의 정서에 물들어가는 소비자들이 실제로는 ‘0′이 되어버린 복제 비용을 위해 기꺼이 가격을 지불하기를 꺼려했다. 이들에게 끊임없이 불법복제 소송을 거는 것도 장기적 전략이 될 수는 없었다. 결국은 그들의 존재가 기업의 생존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을 신중하게 지켜본 잡스는 권토중래(捲土重來), 애플로 돌아오자마자 ‘아이’시리즈의 효시인 ‘아이팟’을 발표한다. 핵심은 MP3 플레이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의 디지털 콘텐츠 생태계인 ‘아이튠즈’다. ‘아이튠즈’에 p2p 기술과 기존 문화 산업계의 싸움에 대한 타협안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 것은 ‘혁명’의 ‘저항의 기운’을 제거하는 것이다. 일단, p2p 기술은 아니다. 기존 문화 산업계의 이해관계는 존중한다. 대신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접근 장벽’을 낮추는 것이다(easy access model). 예를 들어, 음악 CD 1개의 복사 비용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곡 하나의 이용 가치에 따라 가격을 매기는 것이다. ‘디지털’이다. 그러나 ‘혁명’은 아니다. 여전히 기존 산업 세력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잡스가 만든 세상에서 수요자는 p2p 기술에서처럼 콘텐츠의 옥석을 가리는 탐색 비용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공급자는 위협적인 기술로부터 자신들의 기존 비즈니스 모델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나아가, ‘아이튠즈’ 모델은 ‘앱스토어’를 통해 콘텐츠에서 소프트웨어로 확장됐다. 아이팟은 아이폰, 그리고 아이패드로 진화 확대되면서 문화 산업 전반을 포괄하기 시작했다. 잡스는 IT와 미디어, 캘리포니아의 남과 북,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를 통합하고 있다. 바로 ‘혁명’이라 불리는 ‘잡스’의 ‘디지털’의 정체, 그의 ‘아메리칸 드림’이다.
원자를 초월하려는 비트를 포획한 것은 잡스를 대장으로 내세운 문화 산업계 뿐만이 아니다. 국가는 죽지 않았다.
잡스가 ‘왕의 귀환’을 하기 10년 전. 당시 닷컴 열풍의 중심에 있었던 야후에게 굴욕을 안긴 것은 한 유태계 프랑스인 마크 노벨이었다.
사건은 야후닷컴에서 거래되던 나치 관련 물품에서 비롯됐다. 마크 노벨은 신나치주의에 대한 반대 신념과 활동에 따라 프랑스 법정에 야후의 해당 서비스를 제한해 달라고 요청했다. 야후는 웃었다. 보잘 것 없는 무명의 시민운동가 아닌가. 더구나 그들은 네그로폰테가 <디지털이다>에서 주장했던 것과 같은 ‘디지털 결정론’을 앞세웠다. 어떻게 시대와 변화에 저항할 수 있냐는 말인가.
사실 이 것은 초기 디지털 혁명가(digerati)의 공통된 패러다임이기도 했다. 존 페리 발로우 같은 사이버 자유주의자들에게 인터넷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공간, 플라톤의 이데아가 실현되는 장소였다. 인터넷은 산업 시대의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이해관계와 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는 ‘신대륙’, ‘유토피아’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야후는 졌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야후가 진 가장 큰 이유는 기술 발전때문이었다. 야후가 법정에서 노벨이 주장한 야후의 법적 책임을 부정했던 근거는 ‘이행불능’이었다. 현실적으로 야후 사이트에 접속하는 이용자들이 프랑스 관할권에서 오는 것인지 아닌 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인포스플릿을 창업해 활약하고 있던 프랑스계 시릴 하우리가 인터넷 콘텐츠의 발원지를 추적해 차단할 수 있는 기술이 있음을 알렸다. 인터넷의 아버지 빈트 서프를 포함한 3인의 인터넷 전문가는 “야후가 프랑스 이용자의 90%는 검열할 수 있다”고 담당 판사였던 고메즈에게 자문했다.
사실 이 일은 ‘황제의 굴욕’때문에 기념할 사건은 아니었다. 이 사건이 더 중요한 것은 인터넷 ‘검열’(filtering)이 가능하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많은 권위주의적 국가들이 클레이 셔키가 말한 소셜 미디어 열풍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디지털은 ‘혁명’이 아니라 ‘통제’의 ‘더 나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명백한 예가 중국이다.
현재 중국에는 약 4억명의 인터넷 이용자가 있다. 세계 인터넷 통계에 따르면 2009년까지 아시아 시장은 전세계에서 약 7억명의 인터넷 이용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이는 북미와 유럽을 합친 수준이다. 그리고 아시아 시장의 절반 이상이 중국이다. 아시아 시장에서 2, 3, 4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인도, 한국을 다 합쳐도 중국보다 작다.
1989년의 천안문 사태도, 2001년 중국의 WTO 가입도, 2002년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도, 2006년의 베이징 올림픽도 하지 못한 일을 인터넷이 할 수 있을 까. 미국 정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2010년 힐러리가 이끄는 미 국무부가 발표한 ‘21세기 외교’(21st Century Statecraft)를 봐도 알 수 있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디지털 혁명이 전세계의 민주화를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이제는 인터넷보다 좀 더 유행인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소셜 미디어’로 관심의 초점이 이동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국은 인터넷을 겁내지 않는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어떻게 조지 오웰이 경고한 ‘빅 브라더’를 현실로 실현시키는 지 알고 있다. 중국 정부에게 인터넷은, 과거에는 막대한 내부 비용을 들여서 확보해야 하는 반정부인사들에 관한 개인정보와 네트워크를 파악할 수 있는 손쉬운 수단이다. 편지 대신에 이메일을, 통화 내역 대신에 트위터의 팔로워와 페이스북의 친구들을 확인하면 누가 그들의 철권통치에 저항하는 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일반인들, 4억의 중국 인터넷 이용자들에게도, 이것은 그다지 놀라운 소식도, 경악할 일도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인터넷 검열에 익숙해져 있다. 포르노 등 유해 사이트를 정부가 나서 차단하는 것을 중국 부모들은 적극 찬성한다. 젊은 이용자들은 정부에 대한 비판 사이트에 접속하기보다는 연애, 게임물 등에 시간을 쏟는 것이 더 쿨하다. 인터넷을 통한 비판과 참여의 정신, 소셜 미디어의 사회 변혁의 가능성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게다가 중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체 검열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야후, 구글과 같은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을 압박하여 그들에게 협조를 구해 콘텐츠를 검열하는 것에서 한 단계 더 앞선 것이다. 이제는 아예 물리적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IP 주소와 URL을 식별해 차단한다. 이것은 인터넷 속도 저하를 초래하지 않아 중국이 목표하는 ‘인터넷 인프라 강국’의 비전에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일반 이용자 수준에서는 이 것이 물리적 차원에서 생긴 문제인 지 아니면 단순한 기술상의 문제로 접근하지 못하는 것인 지 구별하기 어렵다.
그리고 중국은 2003년부터 와이파이(Wi-Fi)를 보급하면서 접속자의 신원파악을 위해 WAPI(WLAN Authentification and Privacy Infrastructure·무선 인증 및 사생활 보호 인프라)라는 것을 만들어 검열을 강화하고 있다. 2005년 봄에는 중국 네트워크 인프라를 업그레이드하면서 CN2라 불리는 대규모 내부 기간망을 만들기 시작했는 데, 이것은 단일 사업자를 통해 진행됨으로써 검열의 편이성을 높일 뿐 아니라 동시에 중국 인터넷을 고립시키는 데 기여할 것처럼 보인다.
중국의 인터넷 만리장성은 검색제국 구글조차 뚫지 못했다. 구글은 2006년 검색을 통해 중국을 자유롭게 한다는 명분을 들고 중국 시장에 진출했다.
“우리가 중국 시장을 양보하면, 중국 사람들은 검열된 인터넷 콘텐츠만 수용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중국의 인터넷 기업들에게 글로벌 기업과 경쟁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한다. 이 것은 중국의 인터넷 이용자, 중국의 인터넷 기업, 그리고 중국의 인터넷 시장 및, 나아가 정보의 개방과 공유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는 중국 사회 전체의 큰 손실일 것이다.”
물론, 이 거룩한 명분 뒤에는 ‘그보다 더 거룩한’ 실리가 있다. 구글이 중국에 발을 들이기 한 해 전인 2005년 1월 30일을 기준으로, 구글이 올리는 수익의 99%는광고에서 나온다. 그들이 새로운 금광을 찾아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구글은 중국 정부를 등에 업은, 점유율 70% 이상의 검색업체 바이두(百度)와 경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 지 잘 몰랐을 것이다. 그 것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關系)의 문제였다. 더구나 ‘기술 중심’의 구글 검색 패러다임에 중국 이용자들은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2010년 1월 구글마저 중국에 직접 서비스를 호스팅하는 것은 포기하고 만다.
그렇게 국가는 죽지 않았다. 다만, 인터넷을, 디지털 혁명을 최소한의 반발만을 안고서 최대한으로 통제할 수 있을 지에 대한 방법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알고 있다. 중국발 디지털 혁명, 차이니즈 드림은 그 ‘길’을 열어주었고, 전세계 권위주의 국가들이 기꺼이 그 뒤를 따르려 하고 있다.
이렇게 조용히 디지털 혁명이 기존 상업 세력과 정치 세력에 의해 잠들어가고 있을 때, 새로운 디지털 혁명이 부상하고 있는 곳이 있다. 아프리카다. 이유는 “역경이 기업가 정신을 만들고, 결핍이 혁신가를 만들기” 때문이다.
세계 60억 인구 중 3분의 2인 40억이 저개발국가에 살고 있다. ‘UN 새천년 개발보고서’(UN MDGs Report)에 따르면, 세계 60억 중 27억 인구는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간다. 소위 ‘절대빈곤’(absolute poverty)의 상황이다. 매년 굶어죽는 아이들이 1천100만명이다. 말라리아 등 우리가 예방할 수 있는 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600만명이다. 가장 기본적인 교육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1억1천400만명이다. 문맹인 여성들은 5억8천400만명이다.
애너스 매디슨(Anus Madison) 교수가 수치화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0년 동안 전세계 인구가 13배 증가하는 동안 GDP는 300배 늘었다. 더 분명한 예는 바로 우리 옆에 있다. 중국은 지난 1979년 세계 시장에 자국 경제를 개방한 이래 지금까지 31년 동안 경제성장을 멈추지 않고 있고 3억 인구를 절대 빈곤에서 해방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화가 전세계 빈부격차를 넓힌 것도 사실이다. 이 40억 중에서도 최하위에 속하는 바닥 10억 인구는 전세계 GDP가 300배 증가하는 상황에서 처참한 ‘빈곤의 덫’에 갇혀 있다.
이 같은 ‘빈곤’이 그들의 ‘역량 부족’ 때문은 아니다. 간단한 예로, 할리우드의 뒤를 잇는 거대 영화산업단지 2곳이 제3세계에 있다. 하나는 인도의 ‘발리우드’다. 다른 한 곳이 아프리카에 있다. 나이지리아의 ‘놀리우드’(Nollywood, 나이지리아+할리우드)다. 여기서는 가정용 비디오로 영화를 주로 만드는 데 한 해 제작되는 영화가 2천여편에 이르고 영화의 연간 총수입이 2억5천만 달러에 이른다.
따라서 문제는 역량이 있고 없음에 있는 게 아니다. 이처럼 ‘역량있는 사람들’이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구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옥스포드대의 개발경제학자 폴 콜리어(Paul Collier)가 쓴 ‘빈곤의 경제학’(The Bottom Billion)에 따르면 차드(Chad)라는 나라는 의약품이 지급되었을 때 실제로 주민 손에 전달될 확률은 1% 밖에 안 된다. 그 나라의 행정망이 부패하고 무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비트를 통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유통 체계를 구축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 중에 하나가 아프리카다. 앞서 본 것처럼 그 곳에는 디지털 혁명에 맞설 기존 상업 세력도, 그들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효율적인 정부도 모두 미약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절대빈곤의 위기’, ‘불합리와 부조리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디지털 ‘혁명’에 대한 ‘분명한 필요’가 존재한다.
가시적인 예가 있다. 2007년 ITU(국제전기통신연합) 발표 자료를 보면 1999~2004년 동안 가장 많이 성장한 모바일 시장이 아프리카다. 58.2% 성장했다. 그 뒤를 잇는 곳은 아시아로, 34.3%를 기록하고 있다. 그 곳에는 우리 선진시장에서 볼 때도 혁신적인 것들이 많다. 모바일을 이용한 미소금융(micro-finance), 미소보험(micro-insurance), 미소사업(micro-enterprise), 원거리교육(m-learning), 헬스케어(m-healthcare) 등이 그 것이다. 이것은 우리한테도 새로운 것들이다. 이 새로운 것들이 거침없이 시도되는 까닭은 구매력 부족, 인프라 빈약, 환경의 열악함 등 기존 상식으로는 그보다 더 불리할 수 없는 조건들 때문이다. 그 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혁신을 해야만 한다.
더 극명한 예는 ‘아프리카발 디지털 재난관리 시스템’이다.
2007년 나이지리아에서 활동하는 케냐 출신 변호사이자 블로거인 오리 오콜로(Ory Okolloh)는 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케냐에 돌아갔다가 심각한 봉변에 처하고 위협까지 받는다. 오콜로는 정당한 권리 행사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자신만이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하고, ‘그들’을 ‘가시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블로그에, 온라인으로 이용자들끼리 대규모 협력해 이 같은 사건사고들을 지도에 표시할 수 있는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 제도는 곧 개발자들의 조력을 얻어, ‘우샤히디’(Ushahidi: 앞리카의 방언 중 하나인 스와힐리어로 ‘증언’이란 뜻이다)라는 재난관리 오픈소스 플랫폼으로 구축이 된다.
이 플랫폼은 앞서 설명한 아프리카 지역내의 광대한 모바일 이용과 ‘프론트라인 SMS’(Frontline SMS) 같은 저비용 모바일 기반 데이터 관리 소프트웨어 개발 등에 힘입어 크게 확장이 된다. 나아가 소스코드가 공개된 오픈소스라는 ‘2차적 개발’(generativity)이 가능한 조건 덕분에 우샤히디 플랫폼은 2010년 ‘하이티 지진’과 ‘러시아 산불’에도 적용이 되어 관련 위기 처리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였다. 한국과 같은 ‘IT 강국’에서도 아직 걸음마 단계인 ‘정부 2.0′, 시민이 자발적으로 정부 영역에 참여해 정부 능력을 개선하는 시스템이 아프리카에서 이미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디지털 혁명이 아래로부터 일어나고, 일어날 수 있다는 데에 대한 이론적 근거도 있다. ’아웃소싱’이라는 말을 유포시킨 미시간 경영대학원의 경영구루 C.K. 프라할라드(C.K. Prahalad)는 그의 <저소득층 시장을 공략하라>(The Fortune at the Bottom of the Pyramid)에서 ‘역혁신’(reverse innovation) 전략을 주장했다. 보통 혁신 전략이라는 것은 선진시장에서 먼저 실험하고 성공한 것을 저개발국가에 도입하는 경로를 취하는데, 이 역혁신 전략은 그 반대다. 먼저 저개발국가에 적합한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해 성공을 거둔 다음, 그것을 다시 선진시장의 비슷한 수요를 가진 대중 시장 공략에 사용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거듭 강조하지만, 저개발국가의 구매력 부족, 인프라 빈약, 환경의 열악함 등은 개발·생산·유통·판매·관리하는 기업에게 거대한 도전이다. 이것은 큰 기회이기도 하다. 저개발국가에서 살아남은 제품, 그 곳에서 성공한 서비스는 다시 선진국 시장에서도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기본적 필요에 의해 환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개발국가의 습하고 더운 기후에 맞게 제조된 제품은 선진국 환경에서 커피에 젖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세 가지 다른 디지털 혁명의 버전과 비전을 이야기했다.
디지털 혁명의 아메리칸 드림, 차이니즈 드림, 그리고 아프리칸 드림을 논했다. 원자의 구속을 넘어서 자유를 추구하는 비트가 어떻게 산업 세계의 조정에 의해 포획되고, 기술 발전에 힘입은 정부에 의해서 통제되는 지, 그리고 역설적으로 가장 열악하고 치열한 환경에 있는 제3세계에서 가장 ‘혁명’다운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설명했다.
물론, 디지털 혁명의 상업화와 통제화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해 관계자들의 이윤 발생이 시장의 기반이고, 정부 관계자의 안정성이 행정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결코 디지털 혁명의 전부가 ‘상업화’와 ‘통제화’이어야 한다는 흐름에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동의’를 하기엔 지금의, 그리고 앞으로의 ‘디지털화’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올해 말에 발표되는 <마스터 스위치>의 공개된 원고에서, ‘망 중립성’의 아버지 팀 우는 이렇게 썼다. 정보 산업이 다른 산업과 다른 이유는 사람이 영양분을 음식에 의지하 듯이 자신의 영혼을 외부의 정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지식 경제가 가속화된다는 이야기는 외부 정보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인터넷의 급부상은 모든 콘텐츠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통합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인터넷이 곧 미디어의 전부인 시대가 오고 있다.
그러므로 달리 말하면, 인터넷의 성격이, 디지털 혁명의 특징이 미래 사회의 성격을 결정한다. 따라서 디지털 혁명의 전부가 ‘상업화’와 ‘통제화’가 된다는 것은, ‘비트가 되어버린 우리 자신’도, ‘상업화’가 ‘통제화’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것은 다시 그래서, 우리 모두의 문제며, 우리 모두의 위기다.
이것이 우리가 디지털 혁명의 아메리칸 드림, 차이니즈 드림, 그리고 아프리칸 드림을 모두 주목해야 할 근거이며 이유이며 필요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그의 역저 <대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산업화 이후 우리가 세계 1,2차 대전의 전란에 휩싸인 이유는 ‘자율 규제 시장’(self-regulating market)을 맹신한 나머지 사회에서 시장이 배태된 것이 아니라 시장에 사회가 포섭될 수 있다는 착각과 오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몇 차례 금융 위기를 거쳐 우리는 그 주장의 타당성을 체득해가고 있다. 디지털 혁명도 마찬가지다. 모든 디지털 혁명이 다 혁명이 아니다. ‘누구를 위한 디지털 혁명’인 지를 우리는 항상 묻고, 생각하고,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예컨대, 아메리칸 디지털 혁명에서 우리의 비트는 ‘소비된다’. 차이니즈 디지털 혁명에서 우리의 비트는 ‘통제된다’. 아프리칸 디지털 혁명에서 우리의 비트는 ‘자유롭고’, 그 자유는 사회의 투명성과 정부 능력 개선, 일반 시민의 삶에 많은 도움을 준다. 앞의 둘에 비해, 그 것은 상대적으로 돈이 덜 되고, 통제가 어려운 디지털 혁명이지만 중요하다. 사회가 있을 때 시장과 정부가 있는 것처럼, ‘시민적’ 디지털 혁명이 있을 때 ‘상업적’, ‘정치적’ 디지털 혁명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같은 ‘자유’로운 ‘비트’들의 ‘열린 나눔’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인터넷 혁명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인터넷의 미래와 그 것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The Future of the Internet and How to Stop It)을 쓴 하버드 로스쿨의 조나단 지트레인은 인터넷 혁신의 기반을 ‘개방형 네트워크’와 ‘일반적 목적을 가진 PC 단말기’에서 찾았다.
인터넷이 개방형 네트워크라는 것은 내가 인터넷에서 무언가 활동을 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허락’(permission)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 것은 기업, 창작, 공유 활동이 오프라인 공간과 비교해 상당한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둘 째로 이 기반인 PC가 일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계산기, 타자기 등과는 다르게 PC는 특정한 어느 한 목적을 위해서 디자인된 기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즉 PC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분리되어 있고 그 위에 자유롭게 새로운 코드(code), 혹은 PC의 DNA를 주입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능력에 의해서 얼마든지 새로운 기능과 역량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최초의 킬러 어플리케이션인 이메일(e-mail)부터 월드 와이드 웹(WWW)에 이르기까지 이 플랫폼 위에 이용자들이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기 위해서’ 파괴적 혁신을 지속해 왔다. 그들이 인터넷을 단순한 장난감이 아닌, 창조와 혁신의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대가나 특정한 이유 없이 참여, 공유했고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서로를 ‘연결’하고 그 ‘연결’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 있는 새로운 사회 생태계를 창조했다. 바로 ‘그들’이 ‘거기’에 있었기에, 그리고 그들이 그와 같은 활동을 만들 수 있었던 제도적 기반, 기술적 기반, 그리고 문화적 기반 ‘열린 나눔’이 있었기에 오늘의 ‘소셜 웹’이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도, 차이니즈 드림도 그 뿌리는 아프리칸 드림에, 시민적 디지털 혁명에 두고 있었고, 그 혁명의 주인공이 바로 ‘네티즌’(Net + Citizen)이었다.
“누구를 위한 디지털 혁명인가”.
이 질문은 다시 우리 모두에게 묻는 질문이다. 디지털의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전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