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체류 중에서 나에게 찾아왔던 로맨스를 써 볼까합니다.
1996년 1월 초순경, 저는 베트남어 개인교습을 받았는데,
전부 호치민종학대학교 영문과 3학년 여학생들로 세 명이
돌아가면서 나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쳤습니다.
한 학생은 문법을, 다른 학생은 읽고 쓰기를, 나머지
학생은 여섯개의 성(음의 높낮이)에 대하여 각각 가르쳤습니다.
월, 수, 금요일 저녁에는 호찌민 종합대학교(truong dai hoc tong hop thanh pho ho chi minh)
랭귀지 스쿨에도 다녔습니다. 본사에서는 가능하면 빨리 베트남어를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 호감이 간 선생님은 '윙 티 하이(院氏하이?)'라는 학생
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남베트남의 군인이었으며 그녀가
어렸을 때 전사했다고 했습니다. 1996년 3월경엔가 방학을
했는데, 고향이 '다낭'이라고 베트남 중부지방이라고 하였습니다.
깜찍하고 예쁜 학생이었는데, 다른 선생님들 보다 영어가
유창하고, 주관이 뚜렷한 학생이었으며,
베트남어를 가르치는데, 가끔 서로 논쟁도 하곤 했습니다.
왜 영어를 배우는지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습니다.
베트남사람들은 영어를 하나의 언어로 보고 그저 말하고
읽고,쓰고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듯하였습니다.
나는 영어를 배우는 목적은 단순히 말(글자)만 배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영어를 배우는 목적은
서양의 문물 즉, 서양의 좋은 정치,문화,사회, 경제 등
전반적인 선진제도를 배우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여 논쟁이 가끔있었습니다.
하이 선생님은 방학을 이용하여 다낭에 갔다온다고 하였습니다.
나도 '다낭'에 볼 일도 있고해서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다낭으로 갈려고 Ms.Hai 와 같이 호치민역
에 같이 기차표를 예약하러 갔으나, 기차표는 이미
동이나 버렸고, 하이 선생님은 발을 동동구르고 있었습니다.
방학인데도 고향엘 가지못하니 오죽답답 했겠습니까 ?
그래서, "Teacher, Miss Hai, How about airplane
for Danang ?" (하이 선생님, 비행기로 다낭으로 가면
어떻습니까 ?) 했더니 좋긴 좋은데, 돈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돈은 제게 있습니다. 돈 걱정일랑 마시고 제하고
같이 가죠." 했더니 좋다고 했습니다.우리는 같이 다낭행 비행기표를
예약해 놓고, 비행기가 출발하는 날 다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비행기 출발일 날 나는 기숙사로 가서 하이 선생님과
'탕성녘' 공항으로 가서 다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때까지는 사제지간으로 엄격히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였
으나, 점차 수업시간 이외의 시간에 같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내가 선생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나봅니다.
약 1시간 후에 다낭공항에 도착하니 선생님의 오빠가
공항에 마중을 나와있었습니다. 우리는 가벼운 인사를 하고,
하이 선생님은 다낭에서 약 12km 떨어진 선생님 고향으
로 오빠와 함께 갔고, 나는 다낭의 해변가에 방을 하나
얻었습니다.
남부지방과는 달리,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 시원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 선생님과 나는 그 전에도 사이공강에 유람선을 타고
한 바퀴 돈 적이 있다. 선생님은 베트남어를 가르치는
시간 틈틈히 해운쪽에 관심이 있어 해운에 관하여 이것
저것을 가르쳐주었더니, 졸업하고는 우리회사에 취직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이공항에서 선적작업,양하작업,
예인선(큰 선박을 끄는 작은 선박), 도선사, 화물집하, 원가계산등
해운실무 전반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쳐주었습니다.
잘 가르치며는 유능한 해운전문가가 될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Ms.Hai는 해변가에 있는 나의 방으로 왔습니다.
우리는 베트남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의 유사점을 서로
이야기하였습니다. 다 같이 중국이 강성할 경우에는 중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며, 중국이 혼란할 경우에는 독립국
의 면모를 띠는 똑같은 운명이었다는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낭근처의 역사유적지를 다녔는데, 미스 하이
선생님은 일일이 유적지를 자세히 설명을 해주고, 기념
촬영도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2일동안 다낭근처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마지막
날 나는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사랑의 감정을 편지로
써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내일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이튿날, 또 그 바닷가에서 만났는데, 꽤 화가 많이 나 있
는 듯하였습니다. 왜 자기를 이성으로 생각하느냐는 질책과
함께 다시는 그런 사랑의 감정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자기는 더 이상 저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 있는 부인과 2명의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사랑의
감정을 가지면 안된다는 꽤 어른스러운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앞으로는 절대 그런 감정을 가지지 않겠노라고
하고, 다낭역에서 헤어졌습니다.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습니다.
호치민시로 내려올때는 기차로 내려왔는데, 약 24시간정도 걸린 것
같았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다시 만날 것이라고 믿었으나, 그리고는
우리는 영영 만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서울본사의 명령으로 태국의
방콕으로 출장을 갔습니다. 장기간의 출장이니 베트남어 개인교습은
끝마쳐야 했으니까요. 2개월여의 방콕출장을 마치고 호치민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귀국할 때까지 한 번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요즘은 뭘할까 ? 결혼은 했을까 ? 코끝에 땀방울이
맺힌 것도 모르면서 나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친다고 고생이 많았는데
괜히 사랑하노라고 편지를 쓰고 난 다음 부터는 영~ 어색하여 다시
기숙사를 찾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30대가 넘은 아줌마가 되어있지 않을까 ?' 하며 베트남을 다시 가면서,
비행기안에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2003년 6월에 다시 베트남을 찾았을 때
저는 결코 그녀를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그냥 마음속에 연인으로 남겨두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녀는 스무두살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영원히
저의 마음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첫댓글 2003년에 안 만나시 길 잘 하셨네요^^,22살의 여선생님...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셨네요...다낭...
여기 한인들이 여자를 사귀는 코스가 바로 베트남어 선생님이죠...추억으로 간직되면 좋죠..서로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