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2년(영조18년)에 동래부사 김석일이 동래부 청사 동헌 앞에 세운문루이다. 앞면에 동래도호부라고 쓰여져 있는 큰 편액(종이나 비단또는 널판지에 글씨를 써서 문 위에 걸어 놓은 액자)이 있다. 1895년(고종32년)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영으로 승격됨에 따라 일명 포정사라고 불리었으며 누상에는 동래4대문(동래성의 동,서,남,북문)의 개폐와 정오를 알리는 큰 북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 침략시에 시가지 정리에 따라 금강공원 입구의 지금 자리에 옮겨졌다.
부산시에서는 1970년 6월 15일부터 8월 7일에 걸쳐 해체 복원하였다. 조선조 후기의 전형적 관아 대문으로 우리 고장의 대표적 건물이다.
■ 임진동래의총 ■
임진왜란때 왜의 대군에 맞서 부사 송상현공과 함께 혼연히 일어나동래성을 지키다가 중과부적으로 순절한 성명을 알 수 없는 군관민의유해를 거두어 만든 무덤이다.
1731년(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조정의 허락을 받아 퇴폐되었던 동래읍성을 수축할 때 임진란의 격전지였던 옛 남문터(구 대동병원부근)에서 전사한 분들의 유골 많이 발견되었다. 그중 형골이 완연한 유해가 12구 그 외는 잔해가 많았다.
이에 이 충절의 유해를 거두어 삼성대 서쪽 구릉지(현 내성중학교부근)에 여섯묘를 만들어 안장하고 임진전망유해지총이란 비를 세워제전을 급여하고 학교에 맡겨 매년 추석에 유생으로 하여금 제사를 모시게 하였으며 순절일에는 관에서 장사를 보내어 제사를 올렸다. 그후동래성이 함락된 음력 4월 15일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 유해는 일제말 토지개간으로 지금의 복천동 뒷산 영보단 부근에이장되고 그후 비석도 옮겨 세워졌다. 1974년 7월에 현 위치로 이장하여 봉분 1개소를 축조하고 경내를 정화하였다.
이 비는 1731년(영조 7년) 7월에 세워졌으며 글은 부사 정언섭이 썼고 비석의 높이는 103cm, 폭 45cm로 전면에 [壬辰戰亡琦殼之稼]이라하고 뒷면에는 10행으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모두 난리를 만나 성 주의를 지키면서 겹겹의 포위속에 목숨을버려서 천곡선생을 따라 같은날에 용기를 세웠던 사람들인데 유독 그성명을 상고해 낼 증거가 없어서 충렬사에 제향하는 반열에 참여하지못하게 되니 더욱 애석한 일이다. 전후에 발굴된 것이 12해골이지만그러나 이것은 특별히 그 형제와 해골이 완연한 것이고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또 이루다 셀 수가 없었다.
■ 금정산성 ■
성내 면적 250만평
금정산의 지형 특징은 '산정은 성채와 같고 산릉은 성곽과 같다'고 하였다. 금정산은 그 자체가 성채와 성곽과도 같지만, 이 산의 주능선을 따라 실제 산성(山城)이 축성되어 있다. 이 금정산성은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최대 규모로 금정산의 보배이자 부산 시민들의 자랑이 되고 있다.
금정산에는 고당봉 상계봉 등의 주요 봉우리가 12개 있다. 이 가운데 10개 봉우리를 금정산성의 성곽이 지나가고 있다. 금정산의 어느 산길을 따라 오르더라도 이 산성과 쉽게 마주치게 된다. 이 성곽이 주능선을 따라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금정산성은 이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해준다. 옛 선인들의 숨결이 성곽의 돌 하나하나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또 왜적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던 부산의 지정학적 특징과 수난의 역사도 되돌아보게 해준다.
금정산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도 생각된다. 성곽의 모습도 그 나름대로의 운치를 지니고 있지만, 적당한 가격으로 동,서,남,북문의 4대문과 문루(門樓), 그리고 망루들이 서있어 금정산의 얼굴을 빛내주고 있는 것이다.
금정산성은 금정산을 상직적으로 대표하는 얼굴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허물어진 성곽 틈으로 바람에 서걱이는 억새를 지켜보는 것은 이 산의 독특한 서정이며, 성곽과 천구만별이 함께 어울어져 빚어내는 경관 또한 앚 빼어나다.
시조시인 임종찬씨(부산대교수)의 다음글에서도 금정산의 서정 한 자락을 읽게 된다.
'북문에 닿으면 이 가을엔 억새가 피어 인간사 억만 시름을 비질해준다.
무너진 성터의 성긴 구멍사이로 가을바람을 맞고 앉으면 돈이며 권력이며
명예도 저 무너진 성터에 불과함을 느끼도록 해준다.'
금정산성은 억새의 서정 못지않게 기암괴석의 천구만별이 절승을 빚고 있다. 능선상의 등산로도 자연히 산성을 따라 이어져 있는데, 부분적으로 산성의 보호를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곳도 있다.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는 산성을 따라 금정산을 한 바퀴 돌면 이 산성이야말로 천연요새임을 실감하게 된다.
금정산성은 부산시 금정구 금성동. 장전동. 남산동. 구서동, 북구 만덕동.화명동.금곡동, 동래구 온천동 등에 걸쳐 있다. 이 산성은 그 길이가 1만 7,337m이며, 성곽의 높이는 평균 1.5m∼3m 가량이다. 또 성내의 총면적은 약 251만 2,000평(8.213km2)이다.
부산시 사적 제 215호
금정산성은 지난 1972년에 부산시 사적 제215호로 지정되었다. 금정산성의 4대 성문과 망루 등도 지난 70년대 이래 복원이 되었다. 일제시대를 맞기까지 산성마을에는 금정산성의 관아 건물이 있었고, 방어용 무기들도 보관하고 있었다. 이를 일제가 모두 무너뜨리고 약탈해 갔다.
금정산성의 축성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오른다는 것이 학계의 추측이다. 삼국시대 축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성곽의 축성 기법이나 남문과 북문, 그리고 석문(石門)의 건립 기법에서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삼국시대 건립의 문헌 기록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존하는 성곽 등은 조선 숙종(肅宗) 29년(1703년)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조정으로부터 축성 재가를 받아 동래부사 박태항(朴泰恒)이 쌓은 것이다. 또 1707년에는 산성이 너무 광대하여 관리하기가 어렵자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다시 둘레 5,643보(步)의 중성(中城)을 쌓고 부대시설을 정비하였다.
그로부터 다시 100년이 경과된 조선 순조(順調) 6년(1806년)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관리소홀로 피폐한 실정을 조정에 알리고, 그 이듬해 역사를 일으켜 동문을 신축하였다. 그는 이어서 서,남,북문을 조성했으며, 산성의 성곽도 복축하였다.
그 당시의 산성안에는 좌기청(座起聽) 6칸, 좌우행랑 각 5칸, 화약고 1칸, 내동헌 3칸, 별전청(別典廳) 4칸과 장대(蔣臺), 중군소(中軍所), 교련청, 승장소(僧將所), 산성창(山城倉) 등이 있었다. 이 산성창에는 미곡 2,000석과 백목 56동(同) 등을 비장하였다.
또 이 성을 축성하는 데는 엄청난 인력과 물자가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 영조 때에 축성한 규모가 4분의 1인 동래읍성이 연인원 41만7,000여명이었다고 한니 그 몇 갑절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부산 인근의 장정은 말할 것 없고, 경상도 71주(洲)의 역군(役軍)을 차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정산성의 방위는 동래독진(東來獨瞋)의 수성장(守成將)을 겸하고 있던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유사시에는 동래 양산 기장의 3읍 소속 군과 그 3읍 소재 사찰의 승려들이 성군하여 차출되어 방어토록 되어 있었다.
숙종 때에는 산성 내에 있는 국청사와 해월사 승려 100여명과 범어사 승려 300여명으로 수비케 하고, 동래 양산 기장3읍에 있는 승려 수천명으로 대(隊)를 편성케 하고, 유사시에는 이들을 모아 산성 방어에 임하도록 조처하였다고 한다.
'금정산성 부설비'
돌에새긴내력
부산 금정구 장전동 482번지 주택가에 놓여있는 아주 거대한 자연석 암반 위에는 돌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금정국민학교에서 동쪽을 약 200m지점이다. 이 비석에는 금정산성을 다시 설치한 내력이 적혀 있다.이름하여 '금정산성 부설비(金井山城 復設備)'이다.
비의 석재는 화강석이며 높이 185m, 너비 72cm, 두께가 35cm이다. 이 비석은 큰 암반 위에 놓여 있어 이전되지 않고 있는데, 당시 동래읍성에서 금정산성으로 가는 진입로 위치를 시사해주고 있다. 금정산성 연구의 가장 확실한 자료인 이 비는 1972년 6월 26일 부산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1703년 동래부사이던 박태항에 의하여 축성된 금정산성은 1704년에 이르러 폐허화 되었다. 이에 1808년 동래부사 오한원이 변경의 방위를 위하여 왕(순조)의 윤허를 받아 성을 재축하게 되었다 이 비는 오한원 부사가 역사를 일으켜 성문을 수축하고 성곽을 복축하여 산성의 면모를 새롭게 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양(碑陽)은 16행으로 금정산성의 초축에서 부설(復設)때까지의 경위와 부설공사의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비음(碑陰)은 비바람에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려우나 공사 감독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이 기록은 금정산성을 다시 축성하게 된 경위뿐만 아니라 산성에 대한 당시의 인식도 등을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어 흥미를 갖게 한다.
■ 범 어 사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금정산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 구 본사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국의 남산에 명산이 있어서 그 산정에 높이 50여척의 거암이 있고, 그 바위 한가운데 샘이 있으며 그 물빛은 금색에다 물 속에 범천의 고기가 놀았다. 그래서 산명을 금정산이라 하고, 절을 범어사라 한다."고 하였다.
범어사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으로는 1700년(숙종 26)에 동계가 편찬 간행한 목판본 <<범어사창건사적>>이 현존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 절은 당나라 문종 태화 19년 신라 흥덕왕때 창건되었다. 일찍이 왜인이 10만의 병선을 거느리고 신라를 침략하려 하였으므로 대왕이 근심하고 있는데, 문득 꿈에 신인이 나타나서 의상을 청하여 화엄신중기도를 할 것을 권하였다. 신인은 "태백산 속에서 의상이 3천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지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들이 항상 그의 옆을 떠나지 않고 수행하고 있다. 또 동국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척이나 되는 바위가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색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의 고기가 헤엄치며 놀고 있다."고 하면서 대왕이 의상을 청하여 함께 금정산 아래로 가서 7일 동안 화엄신중을 독송하면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그대로 하였더니 왜선이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 죽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의상을 예공대사로 삼고 범어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적기의 창건연대인 흥덕왕 때는 826년에서 835년까지이므로 이미 702년에 죽은 의상의 창건이라고 한 기록은 믿을수 없다. 따라서 신라화엄십찰의 하나인 범어사의 창건은 의상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670년 (문무왕 10)이 후일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678년에 창건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의상이 창건하고 의상의 제자표훈이 주석했던 범어사는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로서, 또 왜구를 진입하는 비보사찰의 하나로서, 또 왜구를 진압하는 비보사찰의 하나로서 중요한 가람이 되었다. 신라 당시의 가람배치는 미륵석상과 좌우보처 및 사천왕이 각각 병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여 모셨던 2층의 미륵전을 중심으로 서쪽에 3칸의 비로전을 세우고 비로자나불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병기를 든 향화동자상을 모셨다. 미륵전 동쪽에는 3칸의 대장전을 세우고 대장경과 삼본화엄경및 석가여래상을 모셨다. 이밖에도 천왕신전.유성전.종루.강전.식당.목욕원및 33천을 조성한 철당, 중료 360방사가 양쪽 계곡에 늘어섰으며, 사원의 토지가 360결이고, 소속된 노비가 100여호 있었다고 한다. 사적에는 이러한 사찰의 규모가 창건 당시에 다 갖추어진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이룩된 규모일 것이다. 고려시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뒤 10여년을 폐허로 있다가 1602년 (선조 35)에 관선사가 중건하였으나 곧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 묘전.현감.계환.법인.천원.덕균 등이 법당 및 요사채, 불상과 시왕상, 그리고 필요한 집기들을 갖추어서 중창하였다. 그뒤 범어사는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면서 사원의 규모를 넓혔으며 선찰대 본산이란 이름 아래 현재 경상남도 3대사찰로 발전하였다. 이 절과 인연이 깊은 고승으로는 창건 주인 의상과 신라십성 중의 한사람인 표훈, 일생을 남에게 보시하는 것으로 일관한 낙안, 구렁이가 된 스승을 제도한 영원, 근대의 고승 경허, 한용운, 동산등이 있다. 특히 <선찰대본산범어사안내>에는 1613년에 묘전이 중건한 이후의 역대 주지와 그 임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1. 주지시대 132년간 87대,
2. 승통시대 166년간 177대,
3. 총섭시대 14년간 11대,
4. 섭리시대 4년간 3대,
5. 주지시대 39년간 8대
로 구분하여 1947년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주지라는 사찰의 책임자에 대한 호칭이 조선시대에 승통.총섭.섭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이 절은 산지 가람으로 특이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금정산 동쪽의 넓은 산지를 이용하여 그 아래에서 부터 일주문.천왕문.불이문등을 차례로 배치하고 다시 7미터 높이의 축대 위에 보제루를 배치 하였다. 보제루 좌우에는 심검당.비로전.미륵전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일반 사찰의 경우에는 심검당과 대칭이 되는 곳에 강원인 강설당과 같은 건물이 놓이는 것이 통례이지만, 이곳에 법당이 있어 특이한 가람배치법을 보이고 있다. 비로전과 미륵전의 뒤쪽에는 선원이 배치되어 있으며, 선원 바로 뒤 낮은 지역에는 요사채들이 있고 그 옆에는 종무소 건물이 있다. 또 심검당 뒤쪽에는 강당이 있고, 강당의 뒷건물들은 승려들의 일상생활에 편의를 제공하는 후원의 건물이 있다. 그리고 이들 건물보다 7-8미터 높은 축대 위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을 향하여 우측에는 관음전이 있으며, 관음전 옆에는 노전승의 거처인 일로향각이 위치한다. 대웅전을 향하여 좌측에는 명부전이 있고 드 뒤쪽에는 서향각과 크고 작은 요사채가 있으며, 그들보다 한 단 높은 곳에 비켜서 팔상전.독성각.나한전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뒤쪽에 산령각이 있음도 특색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절의 가람배치는 대체로 상.중.하.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일 상단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가람배치, 중간부분인 보제루 주위의 당우들, 하단의 건물인 보제루 아래쪽의 일주문.천왕문.불이문을 중심으로 하는 건물들이다. 이와같이 건물이 세 부분으로 나뉘는 것은 산지가람의 지혜에 따르는 배치 방법이다. 현존하는 당우를 보면 절 입구의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이룩된 3칸 건물로서 건물의 기둥은 아랫관 3분의 2정도까지 석주로써 조성하였고, 그 위에 다포의 맞배지붕을 형성하고 있다.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2호. 천왕문은 전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서 벽에는 신장의 벽화를 그려 천왕문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으며, 문의 내부 좌우에는 사천왕의 탱화를 안치하였다. 불이문은 전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범어사로통하는 마지막 문이다. 이 문의 기둥에는 근대의 고승 도산이 쓴 주련이 있다. 보제루는 모든 법요식이 행해지는 곳이다. 전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으로서 범어사의 가장 큰 건물이다. 그리고 보제루 북쪽에는 사방 3칸의 종루가 있다. 범종과 대북 등의 의식용구가 갖추어진 2층 누각건물이다. 미륵전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서 내부에는 항마촉지인을 한 목조불상을, 전면과 좌우에는 영탱을 봉안하였다. 비로전의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의 초석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보물 제434호인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1602년에 중건, 1613년에 중수한 맞배집으로서 다포식 건물이다.
대웅전 왼쪽의 명부전은 전면과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서 주존불은 지장보살이다. 지장보살의 주위에는 판관.녹사등의 상을 배치하고 있다. 관음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서,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과 불경이 봉안되어 있다.
이밖에도 관음전 옆에는 노전승이 거처하는 일로향각이 있으며, 명부전 뒤쪽에는 서향각이라는 조그만 건물이 동향하고 있다. 이 건물 내부에는 부처님의 탱화가 있고 그 곁에는 동래 정희조 내외의 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들은 대웅전 옆 칠층석탑의 건립 등 범어사의 대시주였다. 서향각 뒤쪽에는 팔상전.독성각.나한전의 건물이 한채로써 연이어 있다. 팔상전 안에는 삼존상과 팔상탱화를 봉안했고, 독성전에는 나반존자, 그리고 나한전에는 석가여래삼존과 십육나한을 안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전면 6칸, 측면 1칸의 기다란 건물이다. 이밖에도 조그마한 산령각과 해행당등 수십 칸의 요사채가 있고 종무소가 현존한다. 이 절의 석조물로는 보제루 앞 뜰에 신라시대의 삼층석탑(보물 제250호)이 있고, 대웅전의 남쪽에는 거대한 칠층석탑이 있다. 이 칠층석탑은 근세 인도승이 가지고온 불사리를 봉안한 탑으로서 전통적인 신라 석탑 형식에 다소 변화를 주어 새로 건립한 것이다. 삼층석탑에서 약 20미터 남쪽에 위치한 곳에 범어사 유일의석등이 있는데 건립시기는 고려말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괘불을 시설하는 석조괘불대가 있고, 일주문 밖에 소형 석조폐탑 등이 있으며, 일주문 옆 숲속에는 수많은 비석이 있고, 그 비석 아래쪽에 고승 동산의 석조부도가 있다. 이 부도는 최근의 작품이지만 고려 이래의 전통적 석조부도의 형태에 각종 장엄을 가미함으로써 매우 아름다운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밖에도 사중보물로는 전의상대사옥인과 구룡병풍,삼층석탑,옥와,석존사리탑,금강저,목조미륵불,범종,어병,오동향로 등이 있다. 이 중 옥인은 원효의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산내암자인 원효암 우물 보수중 발견한 것이며, 널리 화엄의 그물을 펴서 인간과 천상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을 지닌 '장대교망녹인천지어'라는 글자가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범어사대웅전
중기의 목조건축. 보물 제434호. 1717년(숙종 43) 중창된 조선 중기의 건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방형평면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탱주와 면석을 놓고 그위에 갑석을 놓아 마루리하고, 면석에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조각을 한 가구식 기단으로 위에 막돌초석을 놓았는데, 전면 양우주의 초석은 둥근 돌기둥모양으로 되어 있다. 초석 위에 세운 기둥들은 흘림두리 기둥들이고 기둥웃몸을 창방으로 결구하고, 이 위에 다시 평방을 놓아 공포들을 기둥 위는 물론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도 놓은 다포식 건축을 이루고 있다. 공포의 짜인은 외삼출목.내사출목으로 조제공이나 제2제공.제3제공에 놓이는 살미첨차의 끝은 강직한 앙서로 되어 있고, 제4제공 끝에서만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다. 내부에서는 살미첨차의 끝이 모두 교두혀를 이룸으로써 고격을 보이고 있다. 가구는 전면 평주와 후면 내진에 세운 두개의 고주에 대들보를 걸고, 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종보를 걸고 다시 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건 삼중량 구조이다. 종보 밑에는 우물 천장을 가설하고 양측면 고주와 앞뒤 공포 끝부터 빗천장을 가설하여 중앙의 천장이 일층 놓게 되어 있다.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로 맞배지붕을 이루는데, 양측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정면 3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고 뒷면 각 칸에는 두짝 창호를 달아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범어사등나무군생지
천연기념물 제176호. 면적은 5만6400제곱미터이다. 나무는 콩과에 딸린 만경식물이며, 일반 학자들은 참등아라고 부르고 있어 혼동하기 쉽다. 우리나라의 등나무는 남쪽에서 자라는 애기등과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등나무 등 2종이 있는데, 식물학자들은 등을 참등, 애기등을 등나무로 취급하고 있어, 일반사회에서 통용하는 명칭과 학자가 사용하는 명칭이 달라 통일이 안 되고 있다.
이곳은 범어사 바로 앞에 있는 계곡에서 자라는 등 나무 군생지이며, 큰바위가 싸여있는 틈에서 소나무.팽나무 드이 군데군데 자라고 그 위를 등나무가 이리저리 뒤덮고 있다. 생태학적 연구자원으로 196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범어사비로자나불회도
비단바탕에 채색. 비로자나불은 모든 곳에 부처의 광명이 두루 비치게 하는 부처로서,진신이며 법신이다. 비로자나불화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앙 본존으로 하고 보신불인 노사나불과 화신불인 석가여래를좌우 협시불로 배치하는 것이 통례이나, 이 불화는 그 중 비로자나불만을 그린 그림인것이다. 원래는 범어사 비로전에 후불탱화로 봉안된 것이었으나 현재는 파손이 심한 채 따로 보관되어 있다. 화면의 중심에서부터 상단에까지 큼직하게 그려진 본존불을 중심으로 상단에는 제자들을, 중단에는 문수와 보현을 포함한 보살무리를 , 그리고 하단에는 사천왕을 그리고 있는데, 각 부분을 구름으로 구분짓고 있다. 지혜의 상징인 문수와 덕의 상징인 보현을 협시로 원형광배를 등지고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본존불의 뾰족한 육계와 큼직한 계주, 둥글둥글한 나발등은 조선 후기 불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특징들이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눈.코.귀.입 등은 작고 부드러워 비교적 원만상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협시와 보살들에게도 나타나 전체적으로 원만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통견의 상체 역시 둥근 곡선으로서 풍만함을 더해주고 있다. 색채는 홍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나 옷깃과 대좌의 엷은 청색, 본존과 보살들의 옷무늬, 그리고 갈색계통의 구름 등 색채의 조화로 전체적으로 온화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범어사삼층석탑
범어사 대웅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높이 4미터. 보물 제250호. 이층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의 삼층석탑으로서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상하기단의 면석에 탱주 대신 안상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지대석 위에 놓인 하층기단 면석에는 우주사이에 3구씩의 안상을 새기고 두툼한 갑석의 윗면에는 2단의 굄을 각출하였다. 비교적 큰 상층기단의 면석은 4매의 판석을 세우고 갑석은 2매 판석으로 구성하였으나 면석에는 가는 우주사이에 꽉 들어차게끔 큼직한 안상을 새겼다. 갑석 밑에는 부연을, 윗면에는 1단의 굄을 조각하여 탑신을 받고 있는데, 탑신부는 각층마다 옥신과 옥개를 별석으로 제작하였으며 옥신에는 우주를 조각하였다. 옥개석은 얇은 편으로 처마는 수평을 이루었으며 밑에는 4단의 옥개받침이 표현되었다. 상륜부는 노반 위에 보주를 얹었으나 보주는 후대에 보충한 것이고 노반은 거꾸로 놓였다. 이 탑은 근년에 보수하면서 기단 밑에 또 하나의 석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탑신을 세웠기 때문에 탑신에 비하여 높은 느낌을 준다. 조성연대는 범어사의 창건시기인 830년경으로 추정된다.
범어사석등
신라시대의 석등, 높이 2.62미터.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16호. 전화는 말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범어사삼층석탑(보물 제25호)을 건립한 3년 후인 678년에 조성하였다고 하나, 양식적인 특징으로 보아 삼층석탑과 같이 9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하대석위에 간주(중대석)를 세우고 그 위에 상대석은 화사석을 받치고 그위로 옥개석을 덮었는데, 각 부재의 평면은 모두 8각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양식은 대체로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이고 기본적인 형태이다. 현재 지대석은 없으며 하대석의 윗면은 연화대로서 복엽8판의 보련이 조각되어 있고, 정면에는 원형받침을 각축하여 간주석을 받치고 있다. 상대석의 하면 역시 복엽 8판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고, 상면에 8각으로 된 1단의 화사석받침이 있다. 화사석에는 4면에 장방형의 화창을 내었으며, 창구의 가장자리에는 음각된 액안에 화창을 달았던 열개의 작은 원공이 있다. 옥개석은 추녀가 직선이고 전각은 약간의 반전이 있으며 낙수면에는 합각이 뚜렷하다. 옥개석의 정상에는 방형의 노반을 얹었으며 그 위에는 연봉형으로 보주를 만들었다. 간주석이 빈약하고 상대석이 두터워서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지 않는 것은 후대에 보수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범어사일주문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소재 범어사 경내에 있는 문.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일주문은 일렬로 장주형 초석들을 네개 세우고, 이 초석 위에 높이가 낮고 굵은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 사이를 창방으로 결구하고 이 위에 다시 평방을 놓아 장방형의 틀을 짠 뒤 공포를 놓아 다포식 건축을 이루고 있다. 공포는 외삼출목으로서 소첨차나 대첨차는 교두형이고, 살미첨차들은 강직한 앙서로 되어 있다. 출목 사이와 앞뒤 첨차 사이에는 널판을 대어 순간천장을 이루며,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양측 바공면에는 풍판을 달았으며 모든 목조부재들은 단청을 하였다.
산성마을
금정구의 금성동을 속칭 산성마을이라 부른다,
산성에는 3개마을이 있다. 맨 윗쪽이 공해마을, 옛날 군관건물과 식 량창고가 있었다. 가운데 마을이 중성문이있었던 중리 아랫마을이 화 살 만드는 대(죽)가 생산된 죽전마을이다. 국방 촌락으로서 유적들이 많았는데 일인들이 뺏아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했다.
옛부터 누룩생산이 유명했다. 물맛 때문이다. 동래부사가 한모금의 자주 이곳을 찾았다.부사가 즐겨 마시던 샘은 5.16전 까지만 해도 동문을 들어서서 40미터쯤되는 지점에 있었다. 지금은 메워졌으나 그 자리는 조그마한 웅덩이가 되어 물이 고여 있다.
옛날 국씨와 두씨가 이 마을에서 처음 술을 만들었다. 임진란때 모두 납치되어 가고,철마에 살던 금장사가 이주해와서 마을을 새로 일으켰다 고 전해진다.
송상현공 동상
양정삼거리에 78년 3월1일 새로운 부산명소가 등장됐다.
임진왜란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공 동상이 세워진 것이다.
동상이 세워진 곳은 옛 신좌수영자리 마비현고개 즉 모너머고개이 다. 이 고개는 수목이 울창하여 맹수가 출몰하고 도둑떼가 설쳐 험한 고개이었는데 일본인들이 부산-동래간의 경변철도를 부설하면서 이 고 개를 깎아 평지로 만들었다.
동상의 얼굴은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일본을 노려보고 있다.
싸우렸다. 싸우렸다. 이 목숨 있는 순간까지 싸우렸다.
탁 버티고 돌벽처럼 앞장선 동래부사 송상현 적의 칼날이 허공을 헤쳐 조복 소매 함께 떨어지는 칼을 든 한 팔 병부와 인을 꼬옥 쥔채로 마루에 떨어지는 다른 한 팔
두 팔은 이미 없다. 두다리마저 몸둥이에서 떨어지자 병부와 인을 꽈악 문 부사 시인 고 김용호는 서사시집,{남해찬가}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얼마 나 장열한 공의 죽음인고, 만고에 길이남을 충신의 얼이 후손들의 손 에 의해 청동으로 굳혀졌다. 1592년 4월 14일 왜장 소서행장을 선두로 한 왜군들은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곧 동래성으로 쳐들어 왔다.
이튿날 아침 좌수영 이광은 중과부적임을 알고, 도망하였고 악전분 투의 보람도 없이 성이 함락되자, 죽음을 각오한 송부사는 갑옷위에 관복을 입고, 임금이 계시는 북쪽하늘을 바라보며 엄숙히 절한뒤 {임 금과 신하의 의는 중하고, 부자간의 은혜는 경하도다}라는 글씨를 부
친에게 보내게 하고는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는 42세. 그의 충성심에는 왜적들도 감탄하여 시체를 성밖에 표를 세워 그의 엄투정신을 크게 찬양하였다.
송공단
송공단은 1712년(영조18년)에 동래부사 김적일이 임진란 때 동래부사 충렬공 송상현이 순절한 경원루의 유지에 설치한 단으로서 송상현을 비롯한 순절계인을 모신 곳이다. 이 단이 세워지기 전에 동래읍성의 남문밖에 있었던 농주산(현 동래경 찰서 자리)에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불명하나 임진란에 순절하신 선열들 이 제단은 동,서,북 단이 세위지고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첨사정발, 양산군수 조영규,동래교수 노개방을 비롯한 무명의 전망의사들을 모시 고 동래성이 함락된 음력 4월15일에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올릴 때는 동래 중군이 갑옷과 투구를 갓추어 현관이 되었으며 기치를 세우고 군 악을 연주하였다. 이 전망제단은 1742년(영조18년)에 송공단이 세워지 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송공단은 동,서,남,북으로 모두4단으로 되어 있는데 북단에는 송상현 조영규 노개방 동단에는 유생 문덕겸 비장 송봉수와 김희수 겸인 신여 로 서단에는 노개방의 부인 송상현의 첩 김섬 정발의 첩 애향 남에는 향리 송백, 동래부민 김상과 두여인및 기타 무명전망인을 모시고 매년 음력 4월 15일에 제수를 관에서 마련하여 제사를 올렷다.
그 후 1760년(영조36년) 동래부사 홍명한이 사림의 건의에 따라서 부 산첨사 정발을 도와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부사맹 이정헌을 추향하 였으며 1766년(영조42년) 임진란때 순절한 다대첨사 윤홍신 그리고 유 생 양조한을 다시 추향하였다.
그 후에 정발, 이정헌 윤홍신,애향,노개방의 부인은 동래성에서 순절하 지 않았다 하여 파향하였으며 부산에서 순절한 이는 정공단에, 다대포 에서 순절한 이는 윤공단에 배향되엇다. 현재는 매년 음력 4월 15일과 9월 9일 동래기영회와 동래시장 번영회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동래읍성지
동래 고을엔 언제부터 성이 축조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임진왜 란이 일어난 당시의 읍성은 길이가 3.090척이고 높이가 13척이었다.임 진왜란시 많이 파괴되었고 그후 오랫동안 수축되지 못하였다가 1731년 당시의 동래부사 정연섭이 나라의 관문인 이 고장의 중요성을 감안하 여 과거의 성보다 훨씬 규모가 큰 읍성을 쌓게 하였다. 이것이 금일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이때 쌓은 읍성은 4개의 성문과
척이며 성내에는 10개의 우물과 1개의 못이 있 었다.
이 성은 그후 1870년(고종7년)에 당시의 동래부사 정현덕이 다시 수 축하였으니 일세시 시가지 게획으로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성축을 민가가 섬유하여 훼손당하고 망월산지를 중심으로 한 성곽만 보존하게 되었다.
부산직할시에서는 1979년부터 부분적인 성곽보수작업을 실시하면서 동경대,서정대,북문을 복원했고 앞으로 계속 복원할 계획이다.
동래는 지리적으로 일본과의 교섭관계 에서 관문의 역할을 담당해야 됐기 때문에 어느 지역보다 왜구의 침약을 가장 많이 받았던 곳이다.
동래는 고려시대 이후 줄곳 동래현으로 내려왔으나 조선 태조 6년에 와서 이곳에 진을설치한 것도 일본과 대치하는 국방의 요새지로 보았 기 때문이다. 읍성의 역사적의미를 높게 평가하는 것도 이 성이 동래 를 방비하기 위해 축성되 것이고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읍성이기 때문이다. 망월산정에 복원된 동장대의 망루에 올라서 보면 동쪽으로 는 해운대,수영이 보이고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용두산 공원의 부산탑 이 보인다. 한편 동래 향교 뒷편 산기슭에 세위진 서장대에 오르면 금정산을 뒤 로한 넓은시가지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동장대와 해운대는 물론 복쪽의 시가지도 한 눈에 들어온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침공을 개시한 외군이 부산성과 다대포를 함락 시키고,동래성을 향해 진격해 왔을 때 동래부사 송상현공은 "싸위서 죽는 것은 쉽지만길은 빌려주기 어렵다"고 응수하고 민중과 더불어 항 전하다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도 이성이다. 성벽에 올라 조국울 지키 려다 순절한 선열들의 넋을 다시한번 새겨 보노라면
(외로운 성은 적에 포위되고 이웃한 여러 진영에선 기척도 없다. 임금 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운 것이 오매 아비와 자식의 정은 가벼히 하리 오다)라는 송상현부사의 영결시가 성벽의 돌곽 사이에서 울리나오는 듯 하다.
충렬사
충렬사는 1605년(선조38년)에 동래부사 유훤이 임진왜란때 순절한 동래 부사 충렬공 송상현을 봉사하기 위하여 동래읍성의 남문안에 송공사를 세워 송공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내게 한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그후 1624년(인조2년)에 선위사 이민영의 청에 의하여 충렬사의 사액이 있게 됨과 동시에 충장공 정발의 배향하였다.
그후 1652년(효종3년)에는 동래부사 윤문거가 읍내의 선비들과 의논하 고 또 성문 가까이 있어 시끄러우므로 위치가 적 당하지 않으며, 송상현공의 학행과 충절은 후학의 사표가 됨으로 그 학 행과 충절을 높히고 선비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하여 충렬사를 안락동 현재의 자리에 이전하고 사당을 창건한 다음 강당과 동서제를 지어 선비 들을 수용할 수 있게하여 안락서원이라 하였다.
한편 1709(숙종35년)에는 동래부사 권이진 송상현과 정발이 순절할 때 함께 사절한 여러 사람을 봉사하기 위하여 읍성 남문의 충렬사 옛 자리 (송공사 자리)에 별도의 사당을 건립하고 조정에 알린후 양산군수 조영 규, 동래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 비장 송봉수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동래부민 김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1735년(영조11년)에 동래부사 최명상이 충렬사 별사의 철폐를 조정에 올리고 이어 경상감사 민응수의 계청으로 그 이듬해 별사를 없 애고 여기에 모신 여러 사람들을 안락서원의 충렬사에 합향하였으며 동 시에 임진란때 사절한 다대첨사 윤홍신을 추가 배향하고 다시 임진란에 송상현, 정발을 따라 사절한 김점,애향은 충렬상 동문 밖에 별도로 각을 지어 모셨다.
1766년(영조42년) 강당인 소줄당의 대대적인 보수를 비롯하여 여러번의 중수 및 보수를 하여왔다.
고종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충렬사 안락서원은 임진란때의 충신, 열사를 봉안하고 있는 사액서원이었기 때문에 철폐되지 않았으며 이들 선열의 얼을 추모하고 국란극복의 교육장으로서 명맥을 이어왔다.
광복후에도 미처 보수치 못하던차 나라의 관문을 지키다 순절하신 순국 선열과 맨주먹으로 분연히 궐기하여 항쟁하신 의병들을 추모하고 열을 선양토록 함으로써 우리와 후손에게 향토수호 정신과 자주국방 사상을 다짐케 하는 수련장으로 정화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 5월부터 1978년 7월까지의 정화공사에 따라 현재의 규모(경역확 장 25,600평, 건축공사 본전외 8동, 참배로, 주차장, 연못, 동산조성, 충렬탑 조성, 조경 등)로 대대적으로 정화한 후 부산지방 출신 의병 49 위, 부산진, 동래부, 다대포, 부산해전에서 순국하신 무명용사 71위)의 위패를 직책 또는 증직의 차순에 따라 봉안하였으며 매년 5월 25일 온 시민의 정성으로 제향을 드리고 있으며 제향 절차는 홀기에 따라 행한다.
왜관과 유적
대마도는 원래 산물이 빈약하므로 멀리 신라.고려시대부터 그 도민이 해구로 변하여 우리나라를 괴롭혀 왔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조정에서는 이들 해구를 막는 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각종 편의을 부여하여 우리나라와의 무역에 종사하게 했으니 그 무역 선을 여리왜선이라 불렀다.
또한 이들의 남방밀탕을 막기 위해 태종초에 그 래왕을 경상좌우도의 연안으로 제한하고 도백의 장소는 도만호가 있는 부산포(부산)연포(울 주군)제포(웅주)가배양(고성)의 4항에 한정했다. 이중 제포와 부산포 에 도백하는 자가 가장 많았고 항거왜라는 일종의 거주민도 상당수에 달했다. 그 뒤 세종 때는 도백포소를 제포,부산포 두곳에 제한 하였다 가 세종8년(1426)에 감포를 다시 개항, 3포가 되었다. 이 무렵 부산포
고 성종때는 350여명이었으며,사원까지 있었 다고 한다. 각 포소에는 뢨인을 접대하기 위한 객관이 있었는데 이를 왜관이라 했으며 교육의 장소이기도 했다.
성종때 신숙주가 지은 {해동제국기}의 부도에 의하면 당시 왜인의 거 주지는 지금의 범일동 자성대 근처이었던 것같다. 중종5년의 삼포왜란 이후 일시 삼포를 페쇄했다가 동7년에 제포를 재개하고 이어 제포의 왜관을 부산포로 옮겨 임진왜란전까지 50년간 계속하였다.임진정유의 왜란이후 광해군원년에 한.일 국교가 재개되어 다시 왜관도 개설되었는 데 이를 두모포왜관이라 부른다. 이 왜관이 있던 구역은 극히 협소하고 선창의 설비가 불안정하고 근처의 수심 또한 얕아서 뒷날 이관케 된다.
지금도 고노들은 이 왜관이 있었던 수정동 일대를 고관(또는 구관)이라 부르고 있다. 두모포 왜관은 숙종4년(1678)에 용산남쪽 기슭 초량정에 이전하여 조선조말엽까지 약200년간 존속했는데 숙종9년(1683)에 새 왜 관의 수문 옆에 세운 석비(높이 165CM)가 지금 용두산 공원에 보존되어 있다. 이 석비에는 왜관에서 교역할 때의 금제조항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