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북국시대란 무엇인가?
1. 현재의 발해 인식
남북이 거의 반세기 동안 대립해서 한민족 내부에 여러 이질성(異質性)이 발생했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것으로는 동일한 역사를 서로 달리 파악한다는 점이다. 물론 역사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똑같은 역사를 다르게 해석하고 역사의 흐름을 상이하게 제시하는 현상을 보면 이를 확연히 검증하여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북한의 한국사 연구 성과를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비교적 오랫동안 논구되었고 상당수의 연구자가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들 가운데는 아직도 미진하여 불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발해(渤海:698 926)에 관한 인식 문제다. 약 230년 동안 옛 고구려의 영토를 중심으로 해서 번성했던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에 대해 남한과 북한에서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 남북의 역사가들은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로 보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통일신라에 대해서는 인식을 달리한다. 즉 남북이 공통으로 삼국시대 이후의 남북국시대의 존재는 인정하나, 북한에서는 최초의 민족 통일이 고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남한에서는 신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요컨대 북한은 발해 중심의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를, 남한에서는 신라 중심의 남북국시대를 인정하고 있다.
남북이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고 남북국시대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중국에서는 발해를 당(唐)의 지방 봉건 정권으로 간주하여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여 남북국시대란 언급마저 회피한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발해를 말갈족(靺鞨族)이 세운 최초의 국가로 보고,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한국과 비슷한 견해를 비치었으나 다른 일부는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말갈의 국가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안점은 중국의 고대문명이 일본에 전해지는 징검다리가 곧 발해라는데에 있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발해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다 수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과연 어느 인식이 가장 합리적이고 역사적인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2. 남한의 발해 인식
1948년에 손진태(孫晉泰)는 [韓國民族史槪論]에서 발해국은 그 의식과 인적 구성 요소 그리고 지리적 영토 관계로 봐서 고구려의 후계자이므로 발해사를 한국사로 취급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된 사실을 가리켜서 발해와 신라로 양분된 한국사가 통합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고 한탄했다. 그가 남북국시대를 모호하게나마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에는 발해사를 한국사로 편입시키자는 사론(史論)이 한결 더 정밀하게 전개되었다. 발해 연구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피력한 것은 이용범(李龍範)이다. 그는 발해를 고구려의 유민에 의해서 건국된 고구려의 부흥국으로 보면서도, 발해는 한국사의 정통으로 보는 통일신라와 적대한 존재여서 한민족의 공동추억체(共同追憶體)가 되기에는 부족하므로 한국사로 편입시키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한결 더 실증적인 연구와 이론적인 고찰이 필요하므로 이 문제를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겼다.
그 뒤 이우성(李佑成)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시켜 삼국시대 이후를 남북국시대로 보자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폈다. 그가 1970년에 열린 전국역사학대회에서 [三國史記와 渤海問題]라는 이름으로 위와 같은 내용을 발표하여 상당한 반향(反響)을 일으켰다. 이어서 1974년과 1975년에 그는 위와 비슷한 맥락의 논문 두 편을 소개했는데, 급기야 개설서에도 남북국시대를 설정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1979년에서 현재까지 남한에서 이루어진 발해 연구는 예전에 비해 연구자와 연구량 그리고 연구 성과 등에서 괄목할 만큼의 발전을 이루었다. 1979년 김종원(金種圓)의 발해 수령(首領)에 대한 연구와 김위현(金渭顯)의 발해 부흥운동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진 뒤로 발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서병국(徐炳國)의 새로운 이하설(泥河說)과 이우성의 고구려 계승 문제도 중요하고 노태돈(盧泰敦) 한규철(韓圭哲) 송기호(宋基豪) 등이 새로운 사실들을 찾아낸 연구도 있었으며, 중국의 고고학 연구 성과를 번역한 최무장(崔茂藏)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연구도 크게 보아 발해의 고구려 계승 문제에 초점을 맞춘 북한의 그것과 표면적으로는 유사하다. 그것은 한민족이라는 민족 공통의 소속감에서 표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정치이념 때문에 양자 사이의 차이점은 있기 마련이다.
근래에 남한에서도 발해의 존재를 부각시켜서 통일신라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연구가 있었다. 물론 이것은 앞서 소개한 이우성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의 남북국시대론은 다음의 두 가지 논점에서 전개되었다. 첫째는 종족과 문화 등의 요소로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는 현재까지 사학계에서 이 시대를 남북국시대로 인식하는 것이 강하지 않았던 원인을 사학사에서 찾는 것이다.
이우성은 '고려(高麗)'라는 국호, 발해 유민의 수용 그리고 북진정책 등 초기의 정황을 보면 고려는 고구려와 발해를 동족으로 인식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고려 초기에는 고구려발해를 계승한다는 역사 의식이 강해서 이 시기에 편찬된 [舊三國史]는 고려의 고구려 발해 계승론을 기조로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고, [三國史記]에 실린 김부식(金富軾)의 논찬 가운데 신라의 왕통(王統)이 고려의 현종(顯宗)에게 전해졌다는 것을 지목하여 고려는 신라의 왕통을 이었다는 역사 의식을 기초로 한 신라 중심의 역사서가 바로 [삼국사기]라고 했다. 즉 [구삼국사]의 고구려 발해 계승 의식에서 [삼국사기]의 신라 계승 의식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해사는 [삼국사기]에서 제외되어 이후의 사학자들이 발해사를 한국사로 보지 않게 된 근원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신라의 통일이란 것을 회의하고, 기존의 통일신라시대 대신에 남북국시대라는 역사 체계를 설정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삼국정립(三國鼎立) 다음에 남북양립(南北兩立)의 남북국시대가 있었다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고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이점이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어려움인데, 그것을 이우성은 신라의 영토와 발해의 민물(民物)이 합쳐진 민족통일국가로 결정했다. 이것은 신라의 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고려에 의해서 최초로 민족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북한의 남북국시대론과 매우 유사하다.
만약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삼국사기] 이전의 고려시대에 남북국시대란 역사 의식이 있었다면 이우성이 역설하는 남북국시대론은 역사적 근거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잘못된 전제를 했기 때문에 재고해야 한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의 역사기술이며 삼국시대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립시대를 가리키는 것임이 자명한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삼국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하여 삼국시대의 종결과 더불어 끝나야 할 것이다. 이것도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를 대상으로 삼아서 서술되었으므로 삼국이 성립되었을 때부터 종결까지만 서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독 신라에 대해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된 뒤로 고려 초기까지의 260여 년 동안이나 더 기술했으니 이는 신라 본위의 역사 서술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물론 현전하는 [삼국사기]를 보면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신라에 관한 서술이 월등히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첫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술할 즈음에 고려로 전래된 삼국의 사료 가운데 신라의 것이 가장 많았을 것이고, 둘째 전통시대의 역사 서술은 서술 대상의 소종래(所從來)에서 말미까지를 대개는 연대순으로 기재했을 것이라는 사실들을 고려하면 이우성처럼 판단할 수는 없다.
만약 이를 수긍하더라도 궁벽진 신라의 경우에는 다른 나라보다 더 오래된 사실이 기재된 것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신라의 사료가 그 시대까지 온전히 전래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오래되고 자세하며 많은 양의 신라 기사가 [삼국사기]의 찬술자들의 손에 쥐어졌다면 신라에 대한 역사 서술이 많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와 김부식에 대해 신라 중심의 역사 서술이 이루어져서 고구려에서 발해로 이어지는 역사 흐름을 도외시했다는 이우성의 설명에는 수긍할 수 없다. 한편 그는 [삼국사기]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견해를 방증하려고 유득공의 견해를 소개했는데 이우성의 견해가 유득공의 그것과는 약간 다르다.
이상과 같이 이우성은 현재의 우리 입장에서 분석하면 김부식이나 [삼국사기]에 대해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혼란만을 야기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역사적 의의가 유난히 강조된 상황에서 공백으로 남겨진 발해사를 한국사 체계로 들여 오려는 그의 노력은 높히 사줄 만하다.
1980년대에 이르러 상당량의 새로운 사실에 의해서 발해는 곧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며, 동시대에 한반도의 남부에 있었던 통일신라와 결부시킨 남북국시대론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북한처럼 발해와 신라의 양립이라고 확연히 가르지 않고, 통일신라의 의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옛 고구려의 영토에 설립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고, 이는 곧 한국사 체계에 넣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물론 그 근거는 유득공의 남북국시대론이었다. 고구려가 멸망당한 668년에서 발해가 건국된 698년까지의 기간만을 통일신라로 보고, 그 뒤로는 발해와 신라가 남북으로 대치했던 남북국시대가 이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30년의 신라통일기는 당에 대항한 삼국민들의 단합이라는 데서 그 의미가 크다고 했다. 신라 전체의 시기를 셋으로 구분해서 삼국시대의 신라는 '소신라'로, 고구려의 멸망에서 발해의 건국까지의 신라는 '통일신라' 그리고 소위 남북국시대의 발해와 대립한 신라는 '대신라'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 주장에 관련 연구자 모두가 합의한 것은 아니지만 남북국시대론이 초중고 교과서에도 실린 정황에서 종래의 통일신라시대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본다.
이상으로 남북국시대론에 관한 남한의 견해들을 살펴봤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그 시대에는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대신라 즉 기존의 통일신라가 양립되었으며, 발해사는 한국사의 일부임이 분명하고, 이 시대를 '발해와 후기신라'라고 명칭한 북한과는 달리 발해보다는 신라에 중점을 두어 대신라를 앞세우고 그 뒤에 발해를 소개하는 태도를 취했으며,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되어서 발해의 영토는 상실했으나 고려로 상당수의 발해 유민들이 내투(來投)함으로써 한민족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3. 북한의 발해 인식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라의 삼국 통일을 1950년 말까지는 북한에서도 수용했다. 즉 조선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형성된 한국사 체계를 받아들이되 유물사관에 입각해서 역사를 기술했으므로 그 체계는 남한에서 주지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윽고 북한에서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통일신라시대에 대한 서술을 검토했다. 7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엽까지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남과 북에 병존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역사 인식은 남북 각자의 정통성과 연관되기 때문에 북한에서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조선통사](1962)를 보면 발해사를 서술한 분량이 15쪽이고, 그 뒤의 고려시대로 넘어가면 '거란의 통치를 반대한 료동 발해인의 투쟁'이란 절은 7쪽에 걸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또 남한에서 통일신라로 지정된 부분에는 발해를 병립시켰다. 이런 사실들은 신라의 삼한 통일이라는 종래의 역사 체계를 부정하고 신라와 발해라는 두 나라의 분립(分立)으로 봤다는 것이고, 거란족에 대한 발해의 항전을 자세히 서술한 것은 그들의 주체사관이 이때에 벌써 배태(胚胎)되었다는 점을 뜻한다고 본다.
발해에 대해 10년 가까이 침묵을 지키던 북한에서 1962년에 박시형의 <발해사연구를 위하여>란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주로 발해의 고구려 계승을 주장하고자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고 설명하였다.
첫째, [신당서(新唐書)]보다는 [구당서(舊唐書)]를 높이 평가하고 그 '高麗別種' '渤海靺鞨'이란 문구에 착안해서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했다.
둘째, 일본의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실려있는 발해국왕이 일본국왕에게 보낸 국서(國書)에 쓰인 '高麗國王', '天孫' 등에 중점을 두어 고구려 계승의 증거라고 했다. 그리고 [유취국사(類聚國史)]에 실린 발해 기사를 분석하여 발해는 고구려 계통 주민이 30 40%를 차지하고 그 밑에 말갈계의 주민이 있는 사회였다고 주장했다.
셋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은 발해를 소홀히 다루었다고 비판하고,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증거로 고려로 내투한 발해 유민, 고구려를 잇겠다고 표방한 고려의 국호, [삼국사기]에 '北朝' 또는 '北國'이라고 칭한 대목 그리고 [발해고]를 쓴 유득공에서 한치윤, 한진서 등으로 이어지는 남북국시대론 등을 들었다.
넷째, 발해는 고구려와 공통점이 많아서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볼 수 있으므로 한국사의 일부임이 분명하고, 발해가 존속했던 시대에는 그 남쪽에 신라가 있었으므로 그 시대의 명칭은 곧 남북국시대가 된다고 했다.
이 논문은 문헌 고증과 사료 및 연구 방법에서 남다른 노작이었는데, 이것이 발표된 뒤로 북한에서는 종래부터 사용하던 '통합신라'란 용어가 퇴색되고 '후기신라와 발해'라는 말이 전면에 나섰다. 즉 남북국시대를 설정해서 통일신라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발해에 대해 박시형이 내세운 이 기본적인 주장은 지금까지 크게 변화되지 않았고, 다만 그 논문이 발표된 뒤에 중국과 북한이 공동으로 발해의 연고지였던 만주 일대를 조사 발굴하여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이 첨가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그 동안의 연구 업적을 모아 정리한 주영헌의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를 들 수 있다. 주영헌은 그 뒤 1971년에 많은 고고학 성과를 보충해서 [발해문화]라는 제명으로 출간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발해국은 고구려의 구령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소유했다'고 발해인 스스로가 말을 한 것처럼, 고조선과 부여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고구려 문화를 직접 계승한 나라가 발해였다. 발해는 고구려 문화를 발전시켜 특징있는 문화를 창조하여 인류문화의 보고를 한결 풍부하게 했다.'고 했다. 이 말을 통해 역사의 흐름은 고조선부여고구려를 거쳐서 발해로 이어졌다는 것이 북한의 고대사 인식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발해에 대해서 그는 '고려로부터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일연의 [삼국유사]는 잘못은 있지만 발해를 조선 역대 왕조의 하나로 본 것이 분명하고, 그 뒤로 유득공, 정약용, 신채호를 거치면서 발해사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 가운데 유득공의 [발해고]는 매우 중요하며 특히 그의 서문에 위와 같은 사실이 잘 밝혀져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다만 필요한 것은 자료가 부족해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므로 더 많은 유물과 유적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책의 제2편에는 그가 정리한 여러 가지 고고학 지식으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방증하려는 의도가 잘 나타났다. 또한 이 일련의 연구 작업은 박시형의 <발해사연구를 위하여>에 의해 밝혀진 사실을 추종한다고 그가 직접 말했다.
주영헌의 이 논저가 소개된 뒤로 1976년까지 북한에서는 발해에 대한 논저는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1968년에 종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주체사상으로 바뀌는 사상 논쟁 이후에 주체사상에 알맞게 역사를 재술(再述)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으로 획일된 북한에서는 1979년에서 1983년까지 [조선전사](1979)를 쓰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발해와 관련된 부분은 [조선전사]의 5권과 6권에 있는데 같은 해에 출판된 박시형의 [발해사]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1962년 박시형이 연구 설정한 내용을 그 동안에 이루어진 문헌과 고고학 연구의 결과를 첨부하여 집대성한 것이다.
한동안 공백기를 거친 뒤 1986년에 북한에서는 4편의 발해 연구 논문이 소개되었는데 주로 북한 영역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 및 지경(地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1990년까지는 주로 북한 영역 안에 잔존한 유물과 유적에 대한 조사연구 보고가 주종을 이루었다. 이를 보면 북한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박시형의 주장을 여전히 추종한다는 사실과 발해의 주요 부분이 북한 지역 안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도가 내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 북한에서 박시형의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을 비롯해서 김성호의 <발해와 후기신라의 관계>까지 10개의 논문을 한데 묶어서 [발해사연구론문집]1(1992)이 발간되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김혁철의 <실학자들의 발해력사관>이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남북국시대론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김혁철의 유득공에 대한 다음의 표현을 보자.
18세기말-19세기초 이후 발해사를 연구한 실학자들이 모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유득공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같은 시대의 발해사 연구자들도 몇 있었으나 유득공이 1784년에 [발해고]를 저술하기전까지는 어느 한 실학자도 발해 역사에 대한 글을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득공은 발해사 연구를 시작한 실학자들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를 비롯한 우리 나라의 역대 역사 서적들과 중국, 일본의 역사 기록들에 실려 있는 발해 관계의 기사들을 거의 남김없이 수집 정리하여 깊이 연구함으로써 발해사 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 왔다.
유득공은 발해사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외면한 고려의 김부식이나 이조 초의 정인지, 서거정 등과는 달리 발해사를 민족사의 불가결한 구성부분으로 인정하고 흩어져 있는 발해사 관계 자료 들을 정력적으로 모으고 애써 분류정리해서 [발해고]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발해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발해에 대하여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남다른 노력을 들여서 집필한 유득공의 공적이 잘 드러났다. 특히 유득공의 [발해고]가 나온 뒤로 그 영향이 다분했음을 명시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나 [발해고]에 소개 된 인용서목(引用書目)에는 [삼국유사]가 없는데 이를 참고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렇게 유득공과 [발해고]에 대한 가치를 설명한 뒤에 김혁철은 유득공의 연구 성과를 넷으로 요약했다.
그가 이 저서에서 이룩한 연구 성과는 첫째로 발해 국가의 고구려와의 계승성을 밝힌 것이고, 둘째로 우리 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북국시기를 설정한 것이며, 셋째로 발해의 역사를 각 부분에 걸쳐 전면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며, 넷째로 발해 유민들의 고국 회복을 위한 투쟁 역사를 정당하게 취급한 것이다.
그가 밝힌 네 가지 가운데서 유득공의 서문과 직접 관련이 있는 부분을 보자.
첫째, 그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견해를 유득공이 가졌다고 했다. 그 증거로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란 문구를 제시하고, 유득공이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단언한 것은 그 이전부터 있었던 모호한 발해사 귀속 문제를 새롭게 바꾸었다고 보았다. 즉 인연과 지연을 기초로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유득공이 밝혔다고 했다.
둘째, 유득공이 발해의 존립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파악한 점을 밝혔다고 했다. 북쪽에는 발해가 있고 남쪽에는 신라가 존립한 상황을 남북국시대라고 유득공은 명칭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사 체계 안에 발해사를 편입시켰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김혁철은 유득공의 남북국시대론을 지지하면서 그 근거들을 소개했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 삼국시기가 끝난 이후의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설정한 유득공의 견해는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견해이다.
실지로 후기신라는 북방의 동족의 나라인 발해에 대하여 [북국]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790년(원성왕 6년) 3월에 신라가 일길찬 백어를 [북국]에 사신으로 파견하였고, 812년(헌덕왕 4년) 9월에 급찬 숭정을 [북국]에 사신으로 파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역사에서는 한 민족이 그 어떤 역사적 및 정치적 요인에 의하여 갈라져 있을 경우 그 나라들의 이름에 북, 남 또는 동, 서 등 방위를 덧붙여 표시하는 것이 통례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라에서 발해에 대하여 [북국]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바로 남쪽에 위치한 신라와 북쪽에 위치한 발해가 동족의 나라이기 때문이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新羅本紀)의 발해로 사신을 보낸 기사를 설명했는데 여기에 사용된 '북국'이란 용어가 중요하다. 현재 '북국'이 곧 발해를 의미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러면 신라는 북쪽에 있는 동족의 나라인 발해를 '북국'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근거로 그는 한 민족이 역사적 및 정치적 요인으로 갈라졌을 경우에 방위 표시를 국명에 붙이는 것이 통례라는 상식적인 식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점을 재고해야 한다고 본다. 신라와 발해는 이전에 결코 하나의 국가를 형성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삼국정립 시기를 보면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가 하나의 민족이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 동족의 나라여서 북국으로 호칭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신라에서 보면 발해가 북쪽에 자리잡았으므로 단순히 북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지 동족이 갈라져 북쪽에 있는 나라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유득공이 남북국이라고 말한 의도는 단순히 역사의 흐름이 삼국시대에서 둘로 나뉜 남북국시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즉 고조선시대에는 나라가 하나였는데 자꾸 분화되어서 여럿으로 나뉘었다가 삼국정립을 거쳐 남북국으로 양립되었다는 것이지 김혁철과 같은 인식에서 남북국을 거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혁철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유득공은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발해는 고구려나 신라처럼 당당한 제자리를 가지고 우리 민족사에 포함되어야 할 나라라는 의미에서 후기신라의 병립시기를 [남북국시대]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 왕조사의 시기구분에서 하나의 커다란 전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 민족사 편찬에서 특기할만한 기여를 한 것으로 된다.(물론 오늘에 와서 꼭 그렇게 불러야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끝부분의 괄호 안에 오늘날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첨부한 것은 현재 북한에서 주창되는 통일신라를 후기신라로 보고 북쪽에 발해가 있다는 남북국시대와는 다르다는 의미다. 북한의 역사 체계는 고조선에서 부여를 거쳐 고구려와 발해로 정통의 맥이 흘러 결국은 고려에 의해서 한민족 최초의 통일이 달성되어 조선을 거쳐 북한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 과정에서 통일신라를 후기신라라고 명칭하여 그 가치를 낮추고, 그 북쪽에 있었던 발해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그러므로 유득공의 남북국시대론과는 발해와 신라의 양립이라는 면은 같은데, 정통이 발해에 있다는 북한의 입장과 이를 언급하지 않은 유득공의 견해는 다르다. 즉 고려가 국토를 통일했다는 김혁철의 견해는 고려를 약소국으로 본 유득공의 견해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이상으로 발해에 관한 북한의 주장을 일별했다. 북한에서는 발해는 우리 민족사의 일부로 고구려의 계승국이며, 그 시대를 '남북국시대'라고 명칭하고서 그 연원을 유득공의 남북국론에서 찾았다. 이같은 인식을 기초로 삼아서 한국사 체계를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한 삼국시대는 발해와 후기신라가 양립한 남북국시대로 변화되었다가 고려에 의해서 최초의 민족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로써 북한은 한국사의 주된 흐름이 북한에서 이루어졌으며, 잘못된 반민족적인 역사는 남한에서 진행되었다는 의미로 민족사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고 강조했다.
4. 중국의 발해 인식
현재 발해에 대해서는 일본이나 러시아보다는 발해사의 귀속에 직결되는 남북국시대에 관한 논의는 한중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혔으므로 한국과 중국이 더 강한 연구열과 더 많은 연구 업적을 이루었다. 중국에서 발해에 대해 그들 고유의 입장을 견지하여 쓴 논저가 본격적으로 출간된 것은 1956년 이후다. 이 당시의 중국의 연구는 발해시대에 발해인이 손수 남긴 유물인 정혜공주(貞惠公主)의 묘지(墓誌)와 관련된 연구와 중국 동북 지방의 옛 종족들과 관련된 것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1960년에서 1965년까지의 중국의 발해 연구는 고고학 조사 발굴 및 지리 비정에 치우쳤다. 이 당시 발해에 대한 중국의 관심을 보여 주는 것으로 중국과학원고고연구소에서 출판된 [新中國的考古收穫](1961)과 북한에서 편찬된 朝中共同考古學發掘隊의 [中國東北地方의 遺蹟發掘 報告](1966)가 있다.
문화혁명(文化革命) 기간에는 발해 부흥운동과 발해 유물을 해석한 것이 소개되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해서 이 당시 중국에는 발해 연구가 전무했다. 문화혁명이 진정되고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자 발해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현재는 여러 연구자들의 많은 연구 업적이 발표되어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다.
중국의 경우는 3건 이상의 논저를 연구 저술한 사람들은 무려 40명이나 된다. 이들 가운데 김육불(金毓 )은 1930년대 말에서 1960년까지 활동했었다. 그 뒤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에는 이학지(李學智), 단화사(丹化沙) 그리고 왕승례(王承禮) 등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60년대와 70년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주국침(朱國沈)과 장태상(張太相)을 꼽을 수 있다. 기타는 소장학자들로 주로 80년대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의 방학봉(方學鳳)은 동포 학자로서 많은 논저를 남겼는데 발해의 사회와 풍속 등을 주로 다루었다. 손옥량(孫玉良)은 중진에 속하는데 광범위하게 발해 자료들을 모아서 정리했다. 그 중에 유득공에 대한 언급도 있다.
중국의 발해에 관한 인식은 첫째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중심이 되어 세운 발해는 당에 예속되었고, 둘째 발해의 대부분 지역은 봉건제 사회인데 발해의 동북지역은 원시공동체사회 말기에 있었거나 그 일부는 비로소 계급사회로 진입하는 과도기에 있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원시사회 말기의 가장노역제(家長勞役制) 사회로 보거나 또는 노예제사회에서 봉건사회로 옮겨갔다고 하여 의견이 합치되지 않았으며, 셋째 발해는 당의 일개 지방 봉건정권이었다고 단정했다. 이는 곧 발해사는 중국사란 의미인데 심지어 고구려도 중국사의 일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중국의 발해 연구자들 가운데 유득공의 [발해고]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사람은 손옥량이다. 따라서 중국의 발해에 대한 인식을 그의 논문을 통해 알아보자. 그는 남북국시대론을 언급한 유득공의 자서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첫째, 그는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로서 고려가 약소국이었음을 알았다고 유득공이 추측한 것으로 보아서 유득공은 수사(修史)가 국가의 운세를 결정한다고 미신했으며, 그 추종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는 자서의 첫 구절 '高麗不修渤海史 知高麗之不振也'에 대한 해석인데 '고려에서는 발해사를 쓰지 않았다. 이 사실을 통해서 나는 고려가 그 위세를 크게 떨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결과 용법으로 해석해야 맞다. 그러나 손옥량은 이를 '고려가 발해사를 쓰지 않았는데 이것은 하나의 중대한 착오로 고려가 쇠약하게 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라고 하고는 유득공을 비롯한 남북국시대론자들은 역사 저술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수사의 기능을 미신했다고 폄하했다. 비판하려면 그 대상의 취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그는 유득공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된 자의적 해석에 따라서 독단했으니 그 결과는 잘못되기 마련이다.
둘째, 그는 유득공이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해서 발해사를 한국사로 편입하고자 한 것은 억단과 곡해의 소치라고 했다. 이에 대한 반증으로 당이 신라에게 대동강 유역의 옛 고구려의 영토를 사여(賜與)한 것, 고구려 유민 모두가 발해의 편호(編戶)가 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삼국사기] [고려사]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에는 그런 언급이 없음을 들었다.
이같이 세세한 점을 열거한 뒤 남북국시대론은 유득공이 만든 새로운 한국사 체계라고 결론지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허구의 남북국론을 날조한 사람이 바로 유득공이란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그가 제시한 세 가지는 유득공의 남북국론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지연과 인연을 국가 계승 요소로 본 유득공의 방법론을 추종한 셈이다.
셋째, 그는 발해사는 조선사의 일부분이고 발해의 영토는 옛 고구려의 땅이라는 유득공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 其所有地何地也 乃高句麗之地也 而斥其東斥其西斥其北而大之耳'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 세분해서 검토하면, 먼저 그는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에 대해 반박하면서 두 가지 증거를 들었다. 먼저 [발해고]군고(君考) 진국공(辰國公) 속에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속말말갈인임을 명백히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뒤의 내용을 보면 그렇게 판단할 수 없다. 그의 지적처럼 유득공이 진국공 걸걸중상은 속말말갈인이라고 분명히 기재했으나, 그 뒤에 '속말말갈은 고구려의 신하 노릇을 했다(粟末靺鞨者(依粟末水以居)臣於高句麗者也)'고 밝혔다. 유득공은 그의 말처럼 단순히 걸걸중상을 속말말갈인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속말말갈이 고구려에 귀부(歸附)한 사실을 명기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그가 [渤海考]신고(臣考) 속에 소개된 60여 명 모두가 고구려인이 아니었다고 한 것을 살펴보자. 이는 유득공이 사서 속에서 찾은 발해인들의 기사로 된 신고의 내용에 고구려인이라는 점이 없으니 서문의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라는 문구와 호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고에 소개된 인물들은 엄밀히 보면 모두 100여 명인데, 그 속에 소개된 인물 모두가 발해인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그 기사들은 유득공이 22종의 사서 속의 발해인 기사들을 분류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성씨 가운데 고구려의 국성(國姓)인 고씨(高氏)가 많은데 이들은 고구려의 후예로 여긴다. 게다가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의 뜻은 단순히 '발해인은 곧 고구려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발해인은 고구려의 후예'라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속말말갈인이 일찍이 고구려로 귀부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더욱 명백하다. 이것을 신고에 소개된 인물들 가운데 고구려인이 한 명도 없으므로 서문의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가 틀렸다고 한 것은 문장을 옹졸하게 해석한 것이다.
더 나아가 손옥량은 '其所有之地何地也 乃高句麗之地也 而斥其東斥其西斥其北而大之耳'에 대해서 반박하여, 고구려의 영토는 사방 2,000리 정도였는데 발해는 사방 5,000리였고, 발해가 동북서만 아니라 남쪽도 개척한 것을 고려하면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이 아니라고 했다. 발해 영토의 최대 판도는 옛 고구려의 영역을 내포했고,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그 일대에서 발해 이전의 국가로는 고구려가 가장 넓은 영역을 구축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발해가 남쪽으로 얼마나 큰 영토를 개척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다. 그러나 그는 '斥其東斥其西斥其北'뿐만 아니라 '斥其南'의 사실이 있음을 주장하여, 발해는 고구려의 후계국이 아님을 유득공이 스스로 밝혔다고 했다. 대세를 통한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의 입론에 세세한 차이점을 들어서 전체를 반박하는 것은 합리성이 없다.
넷째, 유득공이 발해의 전영토를 고려가 얻지 못했다고 탄식했음을 들어서 [발해고]의 저술 목적을 영토 회복에 두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 부분은 유득공이 허구의 발해사를 날조해서 엉뚱한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는 그의 의도를 입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다른 반박없이 그대로 소개한 것 같다. 그러나 [발해고]를 지은 목적은 고려의 잘못을 보완하여 조선을 곤경에서 구제하려고 했다는 손옥량이 첨가한 내용이 유득공의 서문에는 없다. 유득공은 수사의 실제적 기능을 믿었으나 [발해고]를 지어 고려가 못다한 일을 조선에서 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서문의 끝에 발해 관련 문헌이 흩어져 없어지니 후세에 이를 짓지 못할까봐 정리한다고 밝혔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유득공의 저술 태도와 의도를 왜곡하고자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다섯째, 그는 유득공이 발해사의 공백 상태와 사료의 인멸이 [발해고]를 찬술한 동기라고 말한 것은 사료 부족을 자인한 것이며, 발해는 고구려가 아닌 중국을 본받아서 사관(史官)을 두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맞다고 했다.
먼저 손옥량은 남북국론을 주장하기에는 발해의 문헌이 부족하다고 유득공 자신이 인정했다고 했는데 이는 잘못 해석한 것이다. 발해 관련 문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적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쓸 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발해의 사료가 매우 적은 사실이 곧 유득공이 저술한 동기가 되었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유득공은 발해가 멸망할 즈음에 많은 발해인들이 자진해서 고려로 내투했음을 지적했다. 그는 그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발해에 관한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도 고려에서 이를 소홀히 했던 점을 비판한 것이다. 이것을 그는 유득공 스스로가 남북국론을 입증할 자료 부족을 자인했다고 억측했다.
다음으로 그는 유득공의 '渤海憲象中國 必立史官'이라는 글을 잘못 해석했다. 중국을 본받아서 발해는 사관을 반드시 두었을 것이라는 유득공의 표현을 손옥량은 발해의 고구려 계승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로 확대해서, 그 글귀의 바로 다음에 '고구려를 본받아서 사관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마 그는 고구려에는 사관 제도가 없었다고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고구려에도 분명히 사관이 있었다. 이로써 그가 한국사에 대해서 무지함을 알 수 있다.
여섯째, 유득공이 서문의 말미에 내각(內閣)의 속관으로서 많은 '비서(秘書)'를 읽었다는 것과 [발해고]의 체계를 '구고(九考)'로 한 점을 그는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유득공은 실제로 내각의 속관(屬官) 즉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그곳에 비장(秘藏)된 도서들을 많이 읽었다. 그런데 손옥량은 비서를 매우 희귀하고 비밀스러운 도서로 이해하고 유득공이 소개한 22가지의 인용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비서를 옛날의 비서성(秘書省)과 같이 궁궐에서 중요한 문서나 물건을 보관하는 비부(秘府)에 소장된 도서라는 뜻으로 보면 그렇게 볼 수는 없다.
또 그는 유득공 자신이 관점과 사실(史實)이 부합되지 않았음을 알았다고 단언하고 그 증거로 유득공의 '不敢以史自居'란 말을 들었다. 그 문구의 앞뒤를 보면 발해 사료들을 수습 정리했는데 분량이 적고 사(史)라고 할 만한 작품이 되지 못해서 세가(世家), 전(傳) 그리고 지(志)라고 못하고 다만 고(考)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손옥량은 이 점을 외면하고, 겸양의 뜻으로 '不敢以史自居'라고 표현한 것을 유득공 자신이 그의 남북국시대론과 사실이 부합되지 않음을 자인했다고 잘못 판단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유득공의 남북국론에 대한 손옥량의 견해는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거부감과 문서 해독력의 부족으로 본의를 왜곡했을 뿐 과학적 논증은 없었다. <柳得恭與[渤海考]>라는 논문 외에 그의 편저인 [渤海史料全篇]에서도 그런 태도를 견지한 것을 보면 그점은 더욱 분명하다.손옥량은 유득공을 과소 평가 했거나 전혀 알지 못한 것 같다. 특히 자서에 나타난 남북국시대론에 대해서는 중국인 특유의 중화주의(中華主義) 입장을 떠나지 못하고, 합리성과 근거도 없이 반박하는데 치중해서 남북국시대론을 광인(狂人)의 넋두리로 몰아 세우는데 급급했다. 중국이 남북국시대론을 거론하는 것은 발해사의 한국사 귀속을 인정하는 것이고, 역사의 귀속은 곧 영토 귀속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이렇게 철저히 유득공의 견해를 반박했다고 본다.
5. 유득공의 견해
지금까지 남북한 학자와 중국학자들의 남북국시대론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모두 유득공의 [발해고] 자서를 그들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각각 그들이 처한 입장에 따라 유득공의 견해를 달리 해석햇다.
필자는 이런 그들의 연구 과정, 도구 그리고 논리 전개 과정을 추적하면서 [발해고]자서에 나타난 유득공의 몇가지 견해를 파악했다. 첫째 그는 지연과 인연으로 봐서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인식했고, 둘째 현재 우리가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시대를 발해와 신라로 양립된 남북국시대로 봐야 한다고 했으며, 셋째 역사 서술의 유용성 및 고려를 약소국이라고 인식했고, 넷째 공백으로 남은 발해에 대해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서 사료들을 수합해서 정리하는 역사 서술 즉 보궐(補厥)의 역사 서술이라는 태도를 견지하여, 다섯째 본격적으로 체계있는 발해사를 최초로 이루었다는 것이다.
영재( 齋) 유득공(柳得恭:1748∼1807)은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역사지리학자로 대표적인 저서는 발해의 역사를 정리한 [발해고]와 한사군의 역사를 다룬 [사군지]가 있다. 그가 210여 년 전에 [발해고]를 쓸 때에 발해사의 귀속에 대해서 언급한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득공은 얼핏 보면 자료집처럼 보이는 [발해고]를 그 당시로는 최선을 다해서 사견(私見)을 넣지 않고 찬수한 것이다. 그는 중요한 자료들을 수합해서 정리한 뒤에 뭔가 확신을 가지고 발해사의 귀속에 대해서 소위 남북국시대론을 별도로 자서에 기록했다. 그는 [발해고]를 통해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식하고, 삼국시대 이후를 남북국시대라고 처음으로 주장했다. 또한 그의 말년의 작품인 [사군지]에서는 한사군에 대해 정리하고, 그 시대까지 묵수해 온 '사군이부설(四郡二府說)'을 비판했다. 그는 한사군이 이군으로 바뀌고, 이군이 다시 삼군으로 변천하여, 급기야 이 삼군이 삼국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이것은 삼국 이후의 역사를 신라와 발해로 이루어진 남북국시대로 본 [발해고]에 나타난 그의 주장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를 통해서 한국사 체계에 관한 유득공의 인식은 고조선 →한사군→이군→삼군→삼국시대→남북국시대→고려→조선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는 남북국시대에서 남한이나 북한과 같이 신라 또는 발해에 중점을 두지 않았고, 남북국시대가 지나고 고려가 들어설 때에 발해의 대다수 영토를 거두어 들이지 못했음을 애석히 여겼다. 결국 그는 우리의 역사 무대였던 만주대륙을 고려 이후에 잃었다고 말하고, 그가 생존해 있던 조선시대에도 옛 발해의 영토를 수복하지 못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우리가 완전히 통일되지 못한 상태라고 했다.
현재 남한과 북한에서는 통일신라시대를 남북국시대로 보는데, 이 점은 유득공과 유사한 것 같지만 엄밀히 보면 다르다. 남한에서는 1차 통일은 신라 그리고 2차 통일은 고려에 의해서 이뤄진 것으로 보고, 북한에서는 고려시대에 비로소 통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지만 유득공은 그가 살던 조선시대에도 통일된 것으로 말하지 않았다.
6. 삼국정립 이후는 남북양립의 시대다.
발해사를 한국사로 보는 것은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및 그 판도의 확증뿐만 아니라 한국사의 체계에 관한 문제도 야기하였다. 즉 발해와 신라를 남북국시대로서 한국사에 설정하면 그 다음의 고려시대에 한국 민족의 통일이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보지 않으면 안되고, 동시에 통일신라를 삼국의 통일 국가로 본 종래의 견해는 바뀌어야 한다.
북한의 주체사관에 의한 시대구분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가 남북국시대론인데, 그들은 이를 200여 년 전에 유득공이 주장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곧 그 근원이 깊고 튼튼하며 유구한 역사성이 있음을 강조한 결과 북한에서 주장하는 시대구분에 타당성이 있음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 입장과 지형적 조건을 고려하여 그들의 영유권 안에 있는 개성이 고려의 수도임을 강조해서 신라의 통일을 부정하고, 발해와 신라의 남북 분립의 시대라는 의미의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한 것은 그들의 정통성과 합리성 그리고 역사성을 사실을 통해서 확고히 굳히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득공의 남북국시대론은 그것과 다르다. 그는 한민족 최초의 통일이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보지 않았고, 발해의 고지를 모두 흡수하지 못했으므로 그가 살던 조선시대에도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그의 주장을 현대까지 연장한다면 남북통일이 성사된다 해도 영토 통일이나 민족 통일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다.
한편 1970년대에 남한에서도 남북국시대론을 표명했는데, 넓게 보면 고려의 통일이란 북한의 주장과 대동소이했다. 통일신라시대를 통일 국가로 보는 시각이 뿌리 깊은 남한에서는 남북국시대의 설정을 망설였다가 이제는 1차 신라의 통일과 2차 고려의 통일이라는 단계적 통일의 논리를 동원해서 남북국시대를 한국사 체계의 일부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도 완전한 통일의 성립 시기를 모호하게 처리했고, 발해와 신라의 남북양립을 여전히 신라에 중심을 두었다. 그래서 유득공의 남북국론을 승계했다지만 그의 진의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본다.
또한 현재 옛 발해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한 중국에서는 역사의 귀속은 곧 영토의 귀속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남북국시대론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최초로 발해사를 정리하고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한 유득공과 [발해고]의 존재를 허구로 날조되었다고 호도하니 유득공의 남북국시대론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파악하는데는 도움이 안되었다.
그러므로 현재 남북국시대론을 거론한 어느 누구도 그 근원이 된 유득공의 근본 취지에 대해서 무지한 채 자신의 처지에서 피상적으로 입론하는데 그쳤다.
끝으로 유득공의 ≪발해고≫자서를 첨부한다.
高麗不修渤海史 知高麗之不振也 昔者高氏居于北 曰高句麗 扶餘氏居于西南 曰百濟 朴昔金氏居于東南 曰新羅 是爲三國 宜其有三國史 而高麗修之是矣 及扶餘氏亡 高氏亡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 曰渤海 是謂南北國 宜其有南北國史 而高麗不修之非矣 夫大氏者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 其所有之地何地也 乃高句麗之地也 而斥其東斥其西斥其北而大之耳 及夫金氏亡大氏亡 王氏統而有之 曰高麗 其南有金氏之地則全 而其北有大氏之地則不全 或入於女眞 或入於契丹 當是時爲高麗計者 宜急修渤海史 執而責諸女眞曰 何不歸我渤海之地 渤海之地乃高句麗之地也 使一將軍往收之 土門以北可有 執而責諸契丹曰 何不歸我渤海之地 渤海之地乃高句麗之地也 使一將軍往收之 鴨綠以西可有也 竟不修渤海史 使土門以北鴨綠以西 不知爲誰氏之地 欲責女眞 而無其辭 欲責契丹 而無其辭 高麗遂爲弱國者 未得渤海之地故也 可勝歎哉 或曰 渤海爲遼所滅 高麗何從而修其史乎 此有不然者 渤海憲象中國 必立史官 其忽汗城之破也 世子以下奔高麗者十餘萬人 無其官則必有其書矣 無其官無其書 而問於世子 則其世可知也 問於隱繼宗 則其禮可知也 問於十餘萬人 則無不可知也 張建章唐人也 尙著渤海國記 以高麗之人 而獨不可修渤海之史乎 鳴呼文獻散亡 幾百年之後 雖欲修之 不可得矣 余以內閣屬官 頗讀秘書 撰次渤海事 爲君臣地理職官儀章物産國語國書屬國九考 不曰世家傳志 而曰考者 未成史也 亦不敢以史自居云 甲辰閏三月二十五日
유득공의 {발해고} 자서
고려는 발해사를 짓지 않았다. 이로써 고려가 부진했음을 알겠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있었으니 고구려요, 부여씨가 서남쪽에 있었으니 백제요,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있었으니 신라다. 이것이 삼국이니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지었으니 옳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함에 이르러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했고, 대씨가 그 북쪽을 소유했으니 발해다. 이것을 남북국이라고 하는데 당연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를 짓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무릇 대씨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무슨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이다. 그런데 동쪽, 서쪽 그리고 북쪽을 물리쳐서 크게 했을 뿐이다. 무릇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함에 이르러서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차지했으니 고려다. 그 남쪽의 김씨의 땅은 모두 소유했으나 그 북쪽의 대씨의 땅은 완전히 차지하지 못했다. 어떤 것은 여진으로 들어갔고 어떤 것은 거란에게 갔다.
이 때에 고려를 위해 계책을 세운 사람은 의당 빨리 발해사를 지어서 이것을 가지고 여진을 꾸짖어, "어째서 나에게 발해의 땅을 돌려주지 않느냐? 발해의 땅은 곧 고구려 땅이다."라고 말하고 장군 한 사람을 시켜서 이를 거두었으면 토문 이북 지방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거란을 나무래서, "어째서 나에게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의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라고 하고서 장군 한 명을 보내서 이를 거두어 들였으면 압록 이서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끝끝내 발해사를 짓지 않아서 토문 이북과 압록 이서가 누구의 땅이 되었는지 몰랐다. 여진을 꾸짖고자 하니 할 말이 없고, 거란을 나무라고 싶어도 할 말이 없었다. 고려가 마침내 양국이 된 것은 발해 영토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어떤 사람은 "발해가 요나라힌테 멸망되었는데 고려가 무엇으로 그 역사를 쓸것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그렇지 않다. 발해는 중국을 본받았으므로 반드시 사관을 두었을 것이다. 그 홀한성(忽汗城)이 함락될 때에 세자 이하 고려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십여만 명이었다. 그중에 사관이 없었으면 사서는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사관도 사서도 없었다면 세자에게 물으면 세계(世系)를 알 수 있었다. 은계종 한테 물으면 그 예(禮)를 알 수 있었다. 십여만 명의 사람들에게 물었으면 모를 것이 없었다.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인데도 오히려 {발해국기}를 지었다. 그런데 고려 사람으로서 유독 발해사를 쓸 수 없었을까?
아, 문헌이 흩어져 없어지니 수백년 뒤에 비록 이를 짓고자 하나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규장각의 관원으로써 꽤 많이 비서들을 읽어 발해의 사실들을 정리하여서 군고, 신고, 지리고, 직관고, 의장고, 물산고, 국어고, 국서고 그리고 속국고 등 구고로 했다. 세가(世家 )전(傳) 그리고 지(志)라고 않고 고(考)라고 한 것은 사체를 이루지 못했고 또한 감히 사라고 하고서 태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