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청대의 소장품은 전대 왕조인 송대, 원대, 명대 3 왕조와 청대의 유물을 모아놓은 것으로, 중화민국 건국 이후 자금성 북쪽에 위치한 내정(內廷) 에 보존되어왔다. 1914 년(민국 3 년), 중화정부는 자금성 남부에 위치한 외정(外廷) 에 유물진열실을 설치하고 청대의 여름 피서지인 열하(熱河) 와 선양(瀋陽) 고궁의 유물을 옮겨왔다.
중화민국 초기의 군벌이 난립하던 시기, 1924 년 펑위샹(馮玉祥) 이 베이징에 진주하면서 마지막 황제인 부이(溥儀)를 자금성에서 나가게 하고「청대 유물보존위원회」를 설립하고 리위잉(李煜瀛: 스청石曾)을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펑위샹은 "이번에 베이징에 온 것은 부끄럽게도 하지 못한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부의를 자금성에서 쫓아내야만 천하의 후세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다." 라고 밝혔다. 부의가 자금성에 머무는 기간 동안 유실된 유물이 수없이 많았지만 펑위샹의 명령이 시행된 이후로는 더 이상의 유물 유실은 없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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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중국예술국제전시회 대여전시유물 상자 개봉 기념사진 (왼쪽 좡쌍이엔(莊尚嚴)과장, 오른쪽 푸쩐룬(傅振倫) 간사, 중간 왼쪽에서 영국 대표 Percival David 경) | 이듬해 (1925 년) 10 월 10 일, 고궁박물관이 공식 설립함과 동시에 대외 전시를 시작했다. 그리고 박물관과 도서관을 분리했고 도서관은 다시 도서부와 문헌부로 분리되었다. 1928 년 6 월, 국민혁명군이 베이징에 진출했고 국민정부는 이베이지(易培基) 에게 고궁을 접수 및 관리하도록 명령했다. 10 월에 발표한 "고궁박물관조직법" 을 통해 고궁이 공식적으로 국민정부의 기구로 예속되었고 고궁박물관은 유물, 도서, 문헌 3 개관으로 분리 및 설립되었다.
이페이지 관장 임기 동안, 기존의 유물조사와 도록 작업이 계속되었고 유물전시도 다양해졌다. 또한 간행물과 전문도서의 출판도 추진되었다. 1936 년, 출판물이 수백 종에 이르게 되어 중국대륙에서 고궁박물관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13 년 , 918 사건이 일어난 이후 , 중국 북방지역의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국민정부는 고궁의 유물을 남쪽으로 옮겨갈 것을 결정했다 . 상하이로 운반한 유물은 다시 5 곳으로 분류되었다 . 전체 13,291 박스가 운반되었으며 , 유물진열실과 이화원 ( 頤 和園 ), 국자감 ( 國子監 ) 의 유물 6.066 상자도 옮겨졌다 . 1934 년 , 정부는 마헝 ( 馬衡 ) 을 국립베이징고궁박물관 관장으로 임명했다 . 1935 년 , 고궁박물관은 대표적인 유물을 선정해서 유물진열실 유물과 함께 영국 런던의「중국예술국제전시회」에 참가했다 . 1936 년 12 월 , 고궁박물관은 또한 상하이에 보존하고 있는 유물을 난징의 조천궁 ( 朝天 宫 ) 에 신축된 보관창고에 옮겨 보존했다 . 1937 년, 77 사변이 일어나던 해, 고궁박물관은 80 개의 주요 유물박스를 우한(武漢)으로 옮긴 다음 다시 창사(長沙), 꾸이양(貴陽), 안쑨(安順) 등지로 옮겼고 또다시 스촨성(四川) 파현(巴縣) 으로 옮겼다. 그후 상하이가 함락되자 , 난징 고궁박물관은 유물연구소와 이화원의 유물 16,000 남짓한 박스를 각각 수육양로를 통해 철수하기 시작했다 . 수로를 통해서는 먼저 양쯔강 유역 한커우 ( 漢口 ) 로 운반한 다음 다시 이창 ( 宜昌 ) 으로 옮겨 총칭 ( 重慶 ) 남북쪽 양안에 있는 보관창고에 보존했다가 다시 서쪽으로 옮겨 러산 ( 樂山 ) 으로 갔다 . 육로를 통해서 유물은 기차를 통해 북상했고 다시 롱하이 ( 隴海路 ) 를 통해 서쪽으로 옮겨 샨시성 ( 陜西省 ) 바오지 ( 寶雞 ) 로 옮겨갔다 . 그리고 또다시 화물트럭을 통해 난정 ( 南鄭 ), 바오청 ( 褒城 ) 으로 옮겼고 최종적으로 사천성 어메이 ( 峨嵋 ) 로 옮겨갔다 . 항일전쟁 기간 동안 , 고궁박물관이 후방으로 옮긴 유물은 여전히 그대로 상자 안에 보관되었으며 , 박물관에서는 당시 이 유물상자들의 안전한 보존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 하지만 이 기간 동안에도 5 차례 전시를 했고 특히 소련에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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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유물의 운반행로 |
고궁박물관의 또 다른 뿌리는 1933 년 난징에 설립된 중앙박물관 준비처로서 ,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의 소장인 푸스넨(傅斯年)이 위원장을 겸임하고 자연, 인문, 공예 등 3 개 분과를 두고 있다. 이듬해 이지(李濟)가 준비처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1937 년, 중앙박물관 준비처의 유물 상자 역시 서쪽에 있는 총칭(重慶)으로 운반되었다. 1939 년 이후, 또다시 쿤밍(昆明), 러산(樂山)으로 옮겨졌다. 마지막에는 스촨성(四川) 의 난시(南溪)로 옮겨갔다. 전란 중에도 중앙박물관 준비처는 전통 수공업, 서북지역의 역사지리, 펑산(彭山)지역의 한대 왕묘 등지에서 고찰과 발굴작업을 벌여 많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1945 년 8 월, 일본이 항복하자 고궁박물관은 파현(巴縣), 어메이(峨嵋), 러산(樂山)등 세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유물을 총칭(重慶)으로 집중시킨 다음 다시 난징으로 운반했다. 중앙박물관 준비처의 유물 역시 모두 난징으로 옮겨왔다. 정부는 유물진열소를 철폐하고 남쪽으로 옮겼던 유물은 중앙박물관 준비처로 옮겼다.
1948 년 가을, 국공내전의 형세가 역전되자, 고궁박물관과 중앙도서관, 중앙연구원역사언어연구소, 중앙박물관 준비처는 핵심 유물을 선정해서 타이완으로 옮겨가기로 결정했다. 그 해 말, 첫 번째 유물 박스가 해군에 의해 난징에서 지롱(基隆)으로 옮겨졌다. 다음 해, 두 번째 유물이 상선을 통해 옮겨졌고 세 번째 유물은 해군에 의해 옮겨갔다. 고궁박물관이 유물을 타이완으로 옮겨간 것은 총 2,972 상자로,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옮겨간 유물(13,491 상자)의 22% 였지만 중요한 유물이 대부분이었다. 중앙박물관 준비처가 타이완으로 옮겨간 것은 852 박스로 역시 중요한 유물이 많았다.
각종 도서와 유물을 타이완으로 옮긴 이후, 정부는 국립중앙박물관도서관 공동관리처를 설립했다. 공동관리처는 유물을 타이중(台中)현의 위펑(霧峰)향 베이거우(北溝)에 신축한 수장고에 보관하고 방공호를 설치했다. 공동관리처 시기, 유물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도록을 만들며 다양한 서적을 발행했다. 또한 소형 전시실은 대외적으로 개방해서 참관하도록 했다. 이 기간 동안 대표적인 유물을 선정해서 미국으로 보내 워싱턴 박물관등 5 곳에서 전시하고 뉴욕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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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중 베이거우 유물진열실의 외관 |
베이거우는 지역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관을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 박물관 부지는 타이베이 근교의 와이쐉시 ( 外雙溪 ) 로 결정되었다 . 1965 년 , 신관이 준공되자 행정원은「국립고궁박물관 관리위원회 임시조직 조례규정」을 발표하고 쟝푸총 ( 蔣復 璁 ) 을 박물관관장으로 임명했다 . 신관의 명칭은 국부인 손중산 선생을 기념하는 “ 중산박물관 ” 으로 지어졌다 . 고궁박물관이 타이베이로 옮겨진 이후 , 여러 차례 확장하여 진열공간이 점차 확대되었다 . 1968 년 , 도서문헌을 서화처에서 분류해서 주요 유물을 원래의 골동품과 서화를 기물 ( 器物 ), 서화 , 도서문헌 3 처로 개편했다 . 1970 년 , 또한 문헌처 밑에 도서관을 두게 되었다 . 실무는 대략적으로 유물에 대한 재점검 및 정리 , 상세내용 등록이 주를 이루고 다른 기관과 협력과 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 60 년대부터 타이완대학 역사연구소의 중국 미술사 전공의 증설을 도왔고 이것이 타이완대학 미술사연구소의 전신이 되었다 . 이 연구소는 수많은 미술사 연구 인력을 배출하고 일부는 고궁박물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 1978 년 , 국사관과 함께 < 청사고 ( 清 史稿 )> 의 주석을 붙이고 , 국사관과 함께 < 청사고 주석 > 을 정리하여 출판했다 . 고궁박물관 역시 도록와 연구실적을 공개해서 다양한 간행물 , 전문서적 , 도록 그리고 서화 , 기물 , 고적 , 청대의 문헌 등 서책과 족자 , 두루마리 등을 발행했다 . 고궁박물관은 전문인력을 해외로 파견하여 연수 및 고찰하도록 하고 국제학술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했다 . 1970 년의 “ 중국 고화세미나 ” 와 같은 국제학술세미나를 여러 차례 주최하고 주요 유물을 해외에 전시하기도 했다 . 특히 일본 오사카의 “ 만국박람회 ” 와 한국 서울의 “ 중국전시회 ” 를 열어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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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화 세미나 진행현황 |
장푸총 ( 蔣復璁 ) 관장은 17 년 남짓 역임하고 1983 년 병세로 퇴임한 이후 , 국민당 당사위원회의 친샤오이 ( 秦孝儀 ) 위원장이 관장을 맡았다 . 1984 년 , 고궁박물관은 행정건물을 지어 , 기물과 서화와 도서문헌의 3 처에 있는 유물이 대부분 신축 건물의 지하 2 층에 있는 보관실에 보존되었다 . 본관 진열실이 확대되어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 설계되었다 . 보존창고와 전시장소가 모두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고 방화 , 방습 , 내진 설계되었으며 24 시간 방범안전감시시스템이 구축되었다 . 1985 년 , 고궁박물관은 60 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학술강의 및 세미나를 주최했다 . 1987 년 , 고궁박물관은 공식적으로 행정원에 직속된 일급 기관으로 승격되었다 . 이 기간 동안 고궁은 장따첸 ( 張大千 ) 가족으로부터 “ 모예징서 ( 摩耶精舍 )” 를 기증받아 장따첸 선생의 기념관을 설립했다 . 또한 “ 즈산웬 ( 至善園 )” 을 조성했고 1996 년 도서문헌관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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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산웬(至善園)의 송펑거(松風閣) |
고궁박물관은 과거의 일부 출판물 이외에 새로운 모음집, 총서, 전문서적, 총서, 특별전 도록 등을 계속 발행하고 있다. 특히 <고궁통신>이 대중적인 <고궁유물월간>으로 바뀌었고 <고궁계간>은 <고궁학술계간>으로 바뀌어 학술적인 성격을 더욱 가미했다. 또한 <해외희귀유물>을 편집하여 타이완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과 공동으로 <경인문연각 사고전서>, <고궁서화도록>, <고궁소장대계> 그리고 <청대 타이완문헌총편> 등을 출판했다.
1989 년 7 월, 고궁박물관은 유물 총정리를 시작해서 1991 년 5 월 작업을 완료하고, 같은 해에 개최한 "중국예술문물세미나"를 성황리에 마쳤다. 1980 년 이후, 고궁박물관은 유물을 선정해서 해외전시를 시작했다. 특히, 미국 워싱턴의 "탐험시대의 예술"전시회, 1996 년 -1997 년 동안 미국의 "중화 보물 "순회전시회, 1998 년의 프랑스 파리의 "제국의 기억" 전시가 성공적이었다. 고궁박물관은 민간단체와 합력하여 서양미술 초대전을 열었다. 그 해의 "모네와 인상파 작품"전시, 1995 년의 "르부르궁 박물관이 소장한 명화" 특별전, 1998 년의 "피카소의 세계" 특별전이 개최되었다. 1999 년부터 중국대륙의 유물이 초청전시를 열었다. "삼성퇴(三星堆)의 기적" 특별전과 고궁의 "한대 유물대전" 그리고 "한대의 마왕퇴(馬王堆)" 와 "남월(南越)의 왕묘" 유물 전시를 개최했다. 2000 년 5 월, 중앙연구원의 두정성(杜正勝) 원사(院士: 경륜이 높은 학자)가 원장을 역임하여 예술문화의 성격을 강화하고 정치적인 색깔을 없애며 국립박물관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또한 타이완의 성격과 중국과 세계가 함께 발전하는 다원화적인 시각을 강화하면서 미의 보편성을 중시하고 인성에 주목하여 인문적인 성과를 부각시켜 국가민족의 영광을 무한대로 확장했다. 일년간 두정성 원장은 학술연구를 활성화시키고 정기적인 소규모 세미나를 개최하며 전시와 학술세미나를 접목시키는 시도를 했다. "문학과 미술 학술세미나", "청대 문서와 타이완연구 세미나"등이 대표적인 성과이다. 또한 국내외 학자를 초빙해서 전문주제를 가지고 강의를 하도록 했다. 두정성 원장은 전시의 깊이를 중시하여 교육의 효과를 거두었다. "관람전 설명회"를 열어, 박물관 직원과 자원봉사와 초등학교 교사들을 초청해서 다양한 의견과 아이디어를 제안하도록 했다.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왔던 박물관의 참관 동선의 혼란과 외부인의 주차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타이완의 특수한 지질조건을 고려한 내진설계를 위해 과학적인 유물보존을 강조하고 박물관의 장기적인 발전을 고려하여 "고궁박물관의 신세기" 라는 건축계획을 마련 행정원에 5 가지 세무계획으로 나누어 제출하였는데 전시공간, 박물관 외부 교통, 유물보존 그리고 분원의 설립 등을 강조하여 21 세기 박물관 발전의 청사진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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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보물 미국순회전'의 첫 번째 전시장소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1996) |
고궁박물관은 지난 1 년간 새 정부의 지원 아래 박물관의 미래와 관련된 2 가지 기간사업을 완료했다. 첫째 "고궁박물관전문인력채용과 승진 심사작업 요강" 을 수정해서 인사관리의 투명성, 공개성, 공정성, 공평성을 강화했다. 그리고 "국립고궁박물관 유물예술발전기금 수입과 지출 관리 및 운영방법"의 입법화를 완료하고 기금위원회와 실무조직을 발족하여 "고궁박물관의 벗"과 고궁박물관 카드를 제안함으로써 기업경영의 마인드와 업무방식을 도입했다.
이외에 <고궁학술계간> 을 개정하고 영문 격월간지를 반년지로 바꾸어 출판사업을 강화했다. 또한 "리메이수 (李梅樹)백년 기념특별전" 과 "Salvador Dali, 20 세기의 천재"등과 같이 타이완의 전시와 국제적인 전시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시도하여 고궁박물관이 대중 관람객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서고 세계와의 격차를 줄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원 소장품과 신증 소장품
본 박물원의 소장품은 중국 미술품이 주종을 이루며, 많은 명품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고궁박물원은 “중화(中華) 문화의 보고” 라고 불린다.
유물을 대만으로 옮긴 이후 잠시 타이중(台中) 우펑(霧峰) 베이꼬우(北溝)에 1965년까지 보존했었다. 국립고궁박물원과 중앙박물원 주비처가 통합되면서 타이베이 스린(士林) 와이쐉시(外雙溪)에 위치한 신관이 개방되어 전시되었다. 두 기관이 타이완으로 옮겨온 유물은 원 고궁박물원 소장품인 기물 46,100점, 서화 5,526점, 도서문헌 545,797점과, 원 중앙박물원 소장품인 기물 11,047점, 서화 477점, 도서문헌 38점으로 총 608,985점에 달하여 그 수량만으로도 이는 가장 방대한 규모의 중화민족 문화자산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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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꼬우(北溝) 수장고에 보관된 유물상자들 |
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에는 위에서 언급한 두 기관의 유물 이외에도 그후 다른 기관에서 이관되어 온 것, 외부로부터 기증된 것과 매입한 것 등이 있다. 특히 기증받은 것과 사들인 것이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박물원 유물이 타이완으로 옮겨지기 이전, 베이징 고궁과 중앙박물원에서는 이미 소장품을 늘려왔다. 1934년, 고궁박물원은 간수성(甘肅) 딩시현(定西縣) 청꼬우역(稱鉤驛)에서 출토한 전한과 후한시대를 잇는 신(新)나라 왕망(王莽)시대의 도량형인 권과 형 2점을 사들였고,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꿔바오창(郭葆昌) 가족이 기증한 도자기, 독일인 Werner Jannings가 기증한 은과 주나라 시대의 청동기를 소장하게 되었다. 중앙박물원은 류씨선재(劉氏善齋) , 우씨쌍검이(于氏雙劍簃), 용씨송재(容氏頌齋)의 청동기 등을 각각 매입하였는데, 이 모두는 세계적으로도 이름 난 중요한 보물들에 속한다. 타이완에서 다시 박물원을 개관한 이후, 소장품을 보충하는 작업 또한 끊임없이 이루어져왔다. 1969년에 제정된 “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 수집방법”이 실시되면서 소장품을 늘리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민간에 대해 공적 및 사적인 기증을 유도하고, 유물 구입 예산을 편성하고, 외부로부터 기증을 받는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어 소장품 증대 목적을 달성하여 그 성과는 매우 컸다. 1967년부터 2004년 11월 사이, 증가한 기물, 서화, 도서문헌 등 유물 가운데, 다른 기관으로부터 이관된 것이 1,651점, 기증 받은 것이 31,995점, 매입한 것이 12,525점, 총 46,171점이 늘어나 소장품의 다양성과 전시 컨텐츠의 다양성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이렇게 수집한 소장품에는 청나라 공왕부(恭王府)의 자단가구(紫檀家具: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최고급 가구), 북송시대의 진박서련(陳搏書聯), 북송 시대의 소식(蘇軾)의 황주한식시권(黃州寒食詩卷), 당나라의 춘뢰고금(春雷古琴), 춘추시대의 자범편종(子犯編鐘), 육조시대의 북위 이후 역대 금동불상, 당나라 현종(玄宗)시대 선지지옥책(禪地祇玉冊), 남송시대 주희(朱熹)의 역계사권(易繫辭卷), 고대 북방 벽화 수행보살, 근대 장따첸 선생의 여산도권(廬山圖卷), 이외에 다량의 선사시대의 옥기, 도기, 은나라와 주나라시대의 청동기 그리도 청대 가경(嘉慶)시대부터 근대까지의 유명 서예 및 화가의 서화 작품 등은 모두 원 고궁박물원 소장품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게 되었다.
소장품 분류
소장품의 분류와 수량
고궁 소장 유물은 수량이 방대하고 종류가 다양하여 청동기, 도자기, 옥기, 칠기, 칠보자기(법랑), 소형 조각, 문구, 탁본, 화폐, 회화, 서예, 법첩, 자수, 서화 부채, 희귀도서, 청대의 문서, 만주 및 몽고와 티베트 언어의 문헌 그리고 불교 악기, 복식, 비연호(코담배병)를 포함한 기타 항목 등으로 각각 분류할 수 있다. 그 수량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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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 2,956점 |
옥기 - 11,763점 |
법첩 - 1,212점 |
칠기 - 708점 |
자수 - 278점 |
칠보자기(법랑) - 2,508점 |
서화 부채 - 1,650점 |
소형 조각 - 374점 |
희귀도서 - 176,690 책 |
문구 - 2,389점 |
청대의 문서 - 386,727 책 |
화폐 - 6,952점 |
만주, 몽고, 티베트 언어 문서- 11,501 점 |
기타 - 12,900점 |
탁본 - 7점 | |
2004년 11월말 현재 본 박물원 소장품 수량은 이상과 같은 총 655,156점이다.
소장품 조사
본 박물원 소장 유물은 여러차례 옮겨졌고 여러번 조사되었다. 최초의 조사는 청대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출궁한 이후 청 황실 처후개선위원회가 황실 소장품을 접수하여 이에 대해 조사한 것이다. 그후 유물이 남쪽으로 옮겨져 상해(上海)에 보관하게 되었고, 1933년 신임 원장 마헝(馬衡)이 부임하면서 다시금 철저한 조사를 실시하여 1937년 6월까지 조사가 지속되었다. 이때의 조사는 상해(上海) 보관 유물 조사보고서로 작성되어 매우 중요한 기록서가 되었다. 이 보고서는 향후 유물을 남쪽으로 옮기는 데 원시자료로 사용되어 모든 소장 유물의 명칭, 수량, 상황을 파악하고 검증하는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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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11일 ~6월 14일까지 스소우쳰(石守謙)원장과 린버팅(林柏亭) 부원장이 도서문헌처에서 무작위(랜덤방식)로 1,909점의 소장품을 조사하고 유물의 보존상태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
그후, 국립고궁박물원과 중앙박물원의 소장품을 타이완으로 옮긴 이후, 타이중(台中) 우펑 (霧峰) 베이꼬우(北溝)에 보관되었던 기간 동안 1951년 6월 두 기관에서 타이완 이전 유물 조사위원회를 발족 , 1954 년까지 학자와 전문가를 위원으로 초빙하여 유물상자 일련번호의 재편성, 유물상자에 들어있는 유물의 표본조사 작업을 지속했다. 이번 조사작업 역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어 타이완에 보관된 유물을 확인해주는 원시 자료가 되었다. 1989년부터 1991년 5월까지 고궁박물원은 행정원에 의뢰하여 고궁박물원 관리위원회로 하여금 주관하고, 40여 학자와 전문가를 초빙하여 위원회 팀을 구성하여 고궁박물원 소장품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작업을 실시하였다. 이번 작업은 35년만에 이뤄진 것으로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소장된 유물의 등록번호 첩부, 등재 자료카드 작성, 사진 자료 등록 그리고 유물보존상태에 대한 파악이 이뤄져 소장품 관리에 대한 의의가 더욱 커졌다. 2001년부터는 소장품이 끊임없이 늘어나는 것을 감안하여, 박물원에서는 비정기적인 랜덤방식의 조사를 원칙으로 세워 소장된 유물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와 대조 작업을 실시하여 소장품 등록관리 업무를 더욱 철저히 하였다. (2004년 12월 개정) (2004.12 개정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