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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기도응답의 확신
(요한복음 16 : 24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한복음 16: 24)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갖는 의미에 관하여 다음의 책을 참조하면 어떨까요?
l 책 이름: 거꾸로 기도하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시작함으로 당신의 기도 생활을 바꾸라. (Praying Backwards: Transform Your Prayer Life by Beginning in Jesus' Name)
l 저자: 브라이언 쉬펠(Dr. Bryan Chapell)
l 쉬펠 박사(Dr. Chapell) 는 현재 카비넌트 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의 실천신학 명예교수장과 협력교수로 시무 중이다. 그의 재직 기간은 1994년~2012년이었다.
l Chapell, Bryan. Praying Backwards: Transform Your Prayer Life by Beginning in Jesus' Name (Kindle Locations 145-173). Baker Publishing Group. Kindle Edition.
제 1장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가 아니라, 기도를 시작하라!
한 신실한 할머니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많은 날 동안 그의 가족은 병원에 누워있는 할머니 곁에 모여 위로하면서 좋았던 날을 기억하고 기도를 드렸다. 내 친구 중 하나는 그 병원의 간호원이었다. 그 가족이 잘 돌보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그녀는 자기도 그들의 기도에 동참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주저하지 않고 그 가족은 받아주었다.
하지만, 젊은 간호원이 들었을 때, 그 기도의 내용에 대해 점점 걱정이 되었다. 그 가족은 병 고침을 위한 “믿음”을 선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말씀 드리기를, 자신들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기들이 사랑하는 분의 몸에서 건강을 재창조하실 것에 대한 의심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따금씩 그 가족 중의 한 사람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시기를, 충분한 믿음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우리의 요구를 받을 것이라고 하신 사실을 하나님께 말씀 드리기도 했다. 그 가족은 그 암을 치료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셔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내 친구에게 확신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고치실 거에요.”
내 친구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 과연 인간의 지혜가 최선이라고 결정한 것을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가족의 기도는 너무나 진지했고 담대해서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진정 말씀하시기를,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들으시리라고 하셨다. 아마도 그 가족은 바르게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 간호사 친구는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기도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보이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느 날, 내 친구가 자신의 간호사 업무를 마쳤을 때, 그 암은 그 성장을 다 마쳤다.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서자 고통 받던 그 여인이 막 숨을 거두었다. 그 가족은 아직도 그 방에 있었고, 그 젊은 간호사는 그들에게 한 번 더 그들과 함께 기도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고인의 딸은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비통에 차서 냉랭한 목소리로, 그 여인의 남편이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요. 그러나 하나님은 안 들어주셨어요. 우리가 그렇게 기도를 드렸는데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은 그가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가 하나님께 대해 실망하는 것이 왜 옳지 않을까, 최소한 기도에 실망한 것도 잘못된 것일 까? 만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요구에 대하여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을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영성화하여 주님의 영원한 섭리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로 여겨야 할까? 우리의 매일 걱정거리에 대해 기도 드리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에 대해 우리는 기도를 드리라고 임무를 받았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 드리기를 원하실까?
기도하고 또 다시 기도하기
영적인 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도 때때로, “주님,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워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과 삼 년 동안이나 함께 하고, 주님의 삶을 목격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도들도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누가복음 11:1). 제자들이 기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고 당신은 생각했을 것이다.
날이 가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본보기를 보고, 주님과 함께 기도를 드렸다. 주님의 사역 초기에, 예수께서 자기 아버지께 기도하는 법을 시간을 내어 그들에게 가르쳐주셨다(마태 6:9~13). 그러므로 경험이 있는 사도들조차도 기도를 하는 법을 물어야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은 오래 참으신다. 제자들이 질문을 반복하거나 초보적인 질문을 한다고 해서 주님은 정죄하시거나 꾸짖으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대해 주셨는가를 아는 것은 나의 기도 생활에 중요하다. 내가 기도에 대하여 더 많이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려는 유혹이 들 때, 주님의 인내심은 나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를 주님께로 인도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알고 나자, 주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셔서 내가 “주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세요”라는 말을 여러 번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조차 주님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평안할 때는 대개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이 복잡해지고 힘들어지고 폭풍에 놀라게 되면, 나는 많은 질문을 하게 되고, 그럴 때에 내가 지식에서 자라야 하기에 주님이 나에게 화 내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점에 대해 나는 감사한다.
우리의 거친 인생길을 준비할 수 있게 하시려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신 것과 기도하는 법에 대해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감동하신 것을 성경에 기록하셨다. 우리가 때때로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성령님은 아신다. 특히 어려울 때는 더욱 그렇다. 기도하는 법에 대하여 우리를 도우시려는 그런 인내와 관심은 우리의 질문으로부터 우리를 우리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알기를 원하시는 것은, 병 고침과 도움, 또는 간단한 위로를 주기 위한 기도를 어떻게 드리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대한 걱정거리는 하나님의 관심사 밖의 일이 아니며, 항상 주님의 면전에 있다. 주님이 기도하는 법을 반복하여 기꺼이 가르치시려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자꾸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먼저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말라가는 농작물에 비를 내려달라고 농부가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가 교회 소풍을 위해 화창한 날을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 누구의 기도가 응답되어야 할까?
누가 옳은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가 옳고 누구의 믿음이 더 크다고 간단하게 대답하실까? 확실히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지혜보다는 더 큰 지혜를 의지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가지는 분명히 온전하지 못한 이해와 우리가 원하는 무엇이든 기도하라는 성경의 가르침 이 둘 사이를 우리는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자판기로 여겨서 우리가 그 속에 동전을 넣으면 우리가 원하는 대박을 터트릴 수 있다는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런 믿음은 전적으로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세계가 작동되어야 하는 법에 관한 우리 자신의 지혜를 더 의지하는 것 같다. 어떻든 바른 기도는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신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기도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고 응답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것에 대한 의심을 가르치셨을 리는 없다. 만약 기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명령에 의하여 행동하라고 우리의 손가락을 튕기는 행동 같은 것이 아니라면, 기도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답은 말씀을 자세히 살펴볼 때 얻을 수 있다. 즉, 주님이 주신 믿음과 담대함으로 기도하라는 가르치심의 어느 하나라도 빼먹지 말고 잘 살펴서, 또한 거꾸로 기도하는 지혜를 함께 살필 때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기도하기란, 우리의 기도에서 말씀을 첫 자리에 두고 우리의 말은 끝 자리에 두는 것을 말한다.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만약 우리가 담대하게 거꾸로 기도를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기도를 끝맺는 곳(“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처럼)에서 기도는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우리의 마음의 소망에서, 만약 실제로는 우리의 입의 말에서는 아닐지라도), 우리는 축복의 기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위에 응답 받는 모든 기도가 드려질 것이다. 모든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우선순위를 근본부터 바꾸어서, 우리의 요구를 하나님께 강력하게 보낼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특권
우리는 왜 노래의 후렴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로 우리의 기도를 마치는가? 이것은 마치 편지를 쓸 때, “당신의 진실한 벗으로부터,” 또는 무선통신을 할 때 “알았음 오버”와 같은 종교적인 상투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l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한복음 14:13~14).
l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5:16)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명하셨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의 기도의 양식을 바르게 하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우리가 마술의 주문처럼 우리의 주님의 이름을 외운다고 해서 우리의 기도가 더 강력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영적인 주문처럼 사용한다면,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어떤 마법사들이 “아브라카타브라”나 “샤잠”과 같이 말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행 19:13~16). 마법사가 가마솥에 도롱뇽의 눈과 다람쥐의 꼬리를 조금 넣는 것을 흉내 내는 식으로 우리의 기도에 예수님의 이름을 추가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이름이 가지는 유익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배후에서 울리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에 대한 이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공로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거나 복을 달라고 부탁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핵심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주님, 주님이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시도록 하게 하는 보증을 하기에 나의 최선의 노력 가운데 있는 선함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저의 공로로 주님께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주님께 제 기도를 들어달라고 부탁 드리는 것은, 나의 죄를 씻어 주신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로서 호소합니다. 당신의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저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주님의 의로우심에 근거하는 그것이 저로 하여금 제 기도 가운데 당신의 거룩한 보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느끼게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우리의 무가치함을 고백하고 주님의 고귀함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의 기도에 포함함으로써, 우리는 다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l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l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의를 끌게 할 정도의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주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주님의 자비와 공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림으로, 주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신 의로움을 공급해 주신 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호소함
우리가 우리의 기도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또한 주님이 지금 일하고 계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신분을 주셔서 우리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만 아니라, 예수님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처럼, 그분은 지금 아버지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간구하신다.
l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l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4~25).
l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일서 2:1).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존귀하게 높아지신 자신의 지위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특권을 사용하시어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최상의 것을 요청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해주시므로, 그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사랑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신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왕인 아들이 거지를 위하여 호소하는 것과 같다. 비록 왕이 그 거지의 사정을 들어줄 이유는 없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 요청하기에 왕은 그 거지가 구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리스도의 중보는 우리 영적인 거지에게 아버지로 하여금 우리의 요청을 들으시도록 하는 능력을 부여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계속되는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음, 부활, 그리고 중보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우리가 마치 왕자라도 된 것처럼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왕의 아들로서의 우리가 가진 지위를 가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의 소원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도 간구하신다. 주님은 하나님께 요청하시기를, 우리의 현재의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 자신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전가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신다. 그 결과, 비록 우리는 타락한 피조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 스스로가 지니신 거룩한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죄, 허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고, 우리와 기꺼이 같은 신분이 되어 주셨으므로 하늘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찬양하고, 우리와 주님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을 깨닫는다(엡 2:18~19).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능력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이런 접근권과 함께 성령의 복으로 기도 드리는 권세도 온다. 성령의 역할은 예수님의 이름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키는 것이다(요한복음 15:26~16:14).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릴 때. 우리는 성령께 호소하여 우리의 기도가 그리스도의 뜻대로 드려지도록 바꾸어지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이름이 실제로 드러나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릴 때, 예수님의 뜻을 완성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부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어떤 진실된 기도라도 자동적으로 삼위일체께 일차적인 관심사가 되며, 이 삼위의 하나님은 세상과 그 가운에 있는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함으로 오는 성령의 이런 관여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의 지혜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의 성령은 지혜가 무한하시며 우리의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신다. 그런 이유로 바울 사도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신다고 말한다(로마서 8:26~27).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림으로, 우리는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게 된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28절). 우리는 이런 역동성을 다음 장에서 좀 더 탐구할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는 것이 가져오는 놀라운 특권으로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 사역을 의지하게 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이름이 가지는 목적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는 것이 가지는 특권이 큰 만큼, 만약 우리가 이 이름을 사용하여 기도 드리는 목적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 가져오는 온전한 복을 알지 못할 것이다. 성경을 통틀어 볼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성취해야 함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언약백성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나라를 위한 땅을 주장할 때,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21:33).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전쟁이 나갈 때,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싸웠다(대하 14:11). 제사장들은 주의 이름으로 봉사를 했다(신 18:7). 예언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을 했다(신 18:22, 왕상 18:32). 다윗은 “주의 이름으로” 골리앗과 싸웠다(삼상 17:45). 하나님의 백성이 주의 이름을 사용할 때, 그들은 영광을 주님께 돌리기를 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섬기려는 자신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구약성경의 방식은 신약성서에도 계속된다. 예수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마 23:39).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은 쫓겨나가고 기적은 일어난다(행 16:18). 사도들은 교회를 “주의 이름으로” 격려했다(고전 1:10). 교회는 주의 이름으로 모였다(고전 5:4). 교회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 사이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엡 5:20, 골 3:17).
주의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간청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에 영광을 가져오시라고 하는 것이며, 우리는 주님의 뜻이 모든 일 가운데서 이루어져 만물 위에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는 주님이 나타나시고, 송축을 받으시며, 영화롭게 되기를 바라는 관심으로 매듭을 짓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호소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주님의 목적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종류의 요청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궁극적으로 주님의 소원에 대한 요구다.
항상 -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아이들이 기도를 드릴 때 구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있는가? 아이들은 새 말 인형, 빨간 자전거, 자기 팀의 승리, 또는 엄마가 깨진 화분을 발견하지 않기를 구할 것이다. 이 기도들이 응답된다면 누구의 의도가 이루어지는 셈인가? 궁극적으로 그 아이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지 주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기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위한 기도다.
우리가 문자적으로 거꾸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 중 얼마나 많은 기도가 아이들 같은 기도인지 알고 놀랄 것이다:
l 예수님의 이름으로, 저에게 차를 주세요.
l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금을 깎아주세요.
l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 주식이 오르게 해 주세요.
l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결혼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l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 교회가 성장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높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의 영광은 그 대부분의 것의 일차적인 초점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의 일차적인 초점이 되고 우리의 세속적인 만족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된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무리 하는 우리의 기도는 좋아 봐야 불필요한 것이고 미신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가 거꾸로 기도할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소망이 무엇보다도 그리고 궁극적으로 높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사신 분의 뜻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우선 순위를 명확하게 해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아이와 같은 기도와 성숙한 기도를 구분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l 아이들은 기도한다: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을 주세요.” 성숙한 사람은 기도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제가 따르게 하소서.”
l 아이들은 자기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성숙한 기도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l 아이들은 자기들이 볼 수 있는 것을 위해 기도한다. 성숙한 기도는 하나님이 드러나게 되기를 기도한다.
l 아이들은 기도한다: “내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성숙한 기도는, “주의 뜻대로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거꾸로 기도하는 원리는 우리로 하여금 항상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우리의 개인적인 간구에 앞서 말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습관을 갖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그것은 마법공식이나 비밀번호가 아니다. 거꾸로 기도하기는 마음의 태도를 말한다. 거꾸로 기도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기도에서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소원, 또는 우리의 원하는 바를 일차적인 관심사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의도를 첫 자리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시편의 기자처럼 행동으로는 아닐지라도 마음으로 그의 다음과 같은 기도에 메아리로 대답한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편 115:1).
주님의 영광, 우리의 기쁨
오래지 않은 어느 날, 나는 나의 친구 에릭을 문안하러 병원에 갔다. 그는 뇌종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화학요법과 기도로 암과 싸운 지 수개월은 헛된 것 같았다. 나는 에릭에게 그의 사역이 나에게 얼마나 능력이 있었는지 모른다고 그를 위로하러 갔다. 노란 타일로 된 병실에서, 모니터와 튜브에 의지하여 그의 생명은 유지되고 있었다. 에릭은 나에게 자신에게 더 큰 실재요 영광은 영생이라는 보배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의 병실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나의 사랑하는 선생님이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알았다. 그는 머리를 너무 많이 다쳐서 고통으로 어쩔 줄 몰라 하셨다. 그가 나에게 인사하려고 미소를 지을 때 얼굴이 일그러졌고,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잠시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아내는 감사의 미소를 지었고 침대 곁에 있던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앉게 했다. 그녀의 활기차고 원기 왕성한 남편이 그런 고통에 있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힘든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대신하여 늘 간직하고 있던 태연한 얼굴을 보이기 싫고 눈물이 나서 병원 복도로 뛰어나갔다.
에릭은 그녀가 나간 몇 분 동안 힘을 다해 말했다. “브라이언, 제발 내 가족이 너무 많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나를 좀 도와주게. 자네에게 정말 미안해. 나는 곧 예수님을 만날 걸세. 그러나 자네는 기다려야 하지 않나. 내가 이것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기도할 따름이네.”
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를 믿는 그의 믿음에 계속 놀랐으며, 에릭의 기도에 담긴 믿음의 깊이를 구했다. 극심한 고난의 한 가운데서, 그는 단순한 간구를 드렸다: “내 삶에서, 주님, 영광을 받으소서.” 물론 에릭은 자신의 육신적인 건강이 회복되기를 원했다. 물어볼 것도 없이, 그는 자신의 어린 가족의 미래에 대해서 아파했다. 에릭은 그것을 기도로서 주님 앞에 내려놓았지만, 그는 자신의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로 마쳤다. 그것은 이 신실한 신자의 위대한 소망이 곧 자신의 삶과, 그리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죽음마저도, 자기의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라는 의미다.
에릭의 삶이 아니라 죽음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는 이유를 내가 안다고 하지는 않겠다. 내 마음의 일부분은 여전히 내 친구를 상실한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이 용감한 사람은 나로 하여금 알아야 할 세상을 보고 원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희생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에릭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상에게 최선의 것을 원하셨음을 아는 것이다(롬 8:28). 에릭은 타락한 세상에서 고통을 받았으며 그 세상은 그런 경험이 공통이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더 나은 세상을 희망한다. 만약 하나님이 에릭의 믿음을 사용하여 고통의 때에 많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세상의 실재와 확실성을 보여주신다면(고후 4:17~18), 에릭은 가장 복 받은 사람이요, 주님의 위대한 소원을 성취한 사람이다. 주님의 영원한 섭리의 경이로움 때문에, 에릭은 “우리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에릭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으며, 그것이 바로 에릭의 바라던 바였다.
에릭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 주님이 제 필요와 원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것들은 주님께는 평범한 것이고 저는 주님께서 그것들을 공급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제 기도는 이것입니다: “제가 어떤 일을 겪더라도 제 삶이 저의 하나님의 위대함과 선하심, 그리고 주님의 영원한 사랑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저는 예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합니다.” 이것이 거꾸로 드리는 기도의 본질이요 진면목이다.”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에릭의 모범으로부터 받은 힘으로, 내가 알기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그의 기도 응답되었다. 여전히, 우리 중 어떤 사람들에게 천국의 이쪽 측면은 하나님의 행동의 정확한 이유를 알기에는 잔혹하고 기만적인 것 같다. 주님의 지혜는 우리의 지혜보다 뛰어나며 주님의 계획은 우리의 상상보다 탁월하다(로마서 11:33). 그러나 모든 기도를 드리는 태도가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위한 것이라면, 주님이 자기의 완벽한 뜻에 따라 응답하실 것에 대하여 우리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신 분의 뜻,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우리가 더 많이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을까? 주님이 우리에게 최선을 주신다면, 우리는 가장 복 받은 사람이다.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무한한 애정과 궁극적인 의도를 믿은 이런 신뢰는 고난이라는 장애물에 마주할 때, 빈 껍데기와 같은 환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주님의 인격에 기초한 것이다. 자기 아들을 희생하시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무한한 사랑은 우리에게 주님의 절대주권과 영원한 관심을 확신하게 한다. 예수님의 고난, 죽으심,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의 뜻이 고통에 의하여 좌절되지 않으며, 그의 애정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겪은 경험에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은 항상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하고 지혜로운지 아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소망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위대함과 선하심을 알 때,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어떤 기도를 드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거꾸로 드리는 기도일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첫 자리에 두고,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뒷자리에 둔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사랑보다 앞자리에 둔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주님의 지혜 가운데서 확신을 가지고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우리의 혼란스런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벽한 뜻을 우선순위에 둔다. 우리 이름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린다. 그런 헌신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릴 때 믿음에서 솟아난다.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에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시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에 가장 큰 기쁨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간절히 구하는 바는, 우리의 기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사랑이 충만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에 영광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이 가장 높이 되시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복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핵심 생각: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어떤 말의 공식을 따름으로써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동기를 검사함으로써 진실로 그리스도의 지침을 따르게 된다. 비록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의 이름을 첫 마디로 말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거꾸로 기도하지 않은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늘 기도 드립니다. 주님이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보내신 나의 주님의 우선순위에 제 마음을 이끄소서. 제 안에서 그리고 저를 통하여 예수님께 가장 영광이 되는 무엇이든 하시옵소서. 제가 드리는 매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면서, 제가 그것을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제 자신의 유익보다는 주님의 유익을 주장하며, 나의 뜻보다는 주님의 뜻을 구하며, 나 자신보다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사랑하게 하소서. 제가 드리는 간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 당신의 간구를 드리세요.)
성령님의 능력과 지혜로서, 나의 요구를 바꾸사 어디서나 특히, 제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저의 가장 큰 소망과 가장 큰 기쁨, 그리고 가장 깊은 성취가 예수님의 영광이 되게 하소서. 저는 제 삶에서 주님의 모든 요구를 시도할 수 있으며, 주님이 제 삶에 주신 모든 계획을 맞이할 수 있으며, 저의 영원을 위해 주님의 모든 뜻을 기뻐하겠나이다. 그 때는 바로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한 것임을 제가 알 땝니다. 주님은 예수님께 최선이 되는 것을 다 행하소서. 왜냐하면 그것이 저에게 가장 큰 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언제 영광을 받으시는 지를 제가 쉽게 잊어버리고 의심하는 것을 용서하옵소서. 제 마음이 이런 진리에서 움츠러들 때, 제 마음을 그리스도의 뜻을 위해 담대하게 하소서.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저 자신을 위해, 제가 항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도록 도와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