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허스님]*선방일기*
☪ 1월3일 단식기도(스님의 위선)
생식을 하는 스님이 산신각에서 단식기도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생식을 시작한 지 6개월이 된다고 하는데 몸이 무척이나 약했다.
상원사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더 두드러지게 약해 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입산했다는 스님인데 독서량이 지나치게 많아 정돈되지 못한 지식이 포화상태를 지나 과잉상태다. 그래서 두루 깊이 없이 박식하다.
극히 내성적이어서 집념이 강하고 몸이 약하니 극히 신경질적이고 여러 가지로 박식(?)하기 때문에 오만하고 위선기가 농후하다.
절밥을 오른손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햇수밖에 먹지 않았는데도 도인행세를 하려고 하니 구참 선객들에게는 꼴불견이다. 틀림없는 삐에로다.
남과 얘기할 때는 상하나 선후 구별없이 가부좌를 한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을 느릿느릿 짐짓 만들어서 하고 걸음걸이도 느릿느릿 갈지자로 걷는다.
그러다가도 누가 자기 자존심에 난도질을 하면 신경질이 발작하여 총알같은 말씨로 갖은 제스처를 써 가면서 응수한다.
생식은 공부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상(相)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의 언행이 대변해 주고 있다. 지기를 싫어하는 뒷방 조실스님도 이 스님에게는 손을 들고 말았다. 약간 병적인 그의 언행이 대중들로부터 지탄을 받다가 끝내는 버림을 받았다.
개밥에 도토리격이 된 그가 마지막으로 자기는 아무래도 대중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과시해보려고 착상한 것이 바로 단식기도이다. 그의 건강으로 보아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 엄동에는 더구나 안 될 일이다.
점심공양을 마친 나는 처음으로 그 스님과 마주 앉았다.
“스님, 단식기도를 하신다면서요? 이 엄동에 냉기 감도는 산신각에서….”
“예, 모두가 따뜻한 방안에서 시주밥이나 얻어먹고 망상만 피우면서 시비만 일삼으니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입니다.”
기가 콱 막힌다. 그러나 시비할 계제는 못된다.
그와 나는 여러 가지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이 우매한 대중의 업장을 도맡아서 녹여볼까 하는군요.”
“그렇습니다. 단식하면서요.”
“고마운 생각이오. 하지만 스님, <장자경>을 독파했다니 한단지보(邯鄲之步)를 기억하시지요? 연나라 소년이 조나라 도성인 한단에 가서 조나라 걸음걸이를 배우려다가 조나라 걸음걸이를 배우기 전에 자기나라 걸음걸이까지 잊고 필경 네발로 기어 자기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고사 말이외다.”
“예, 알고 있지요.”
나는 서서히 그의 허를 찔러 상을 벗겨보기로 했다.
“서시빈목(西施嚬目)을 기억하시지요? 미인 서시가 병심(病心)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고 마을을 지나가는 것이 예뻐 보이자 그 마을 추부(醜婦)도 흉내로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니 부자는 폐문한 채 외출을 금하고 빈자는 처자를 이끌고 그 마을을 떠나갔다는 고사말이외다.”
“그것도 기억하고 있지요.”
그는 아니꼽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스님, 누워서 한 시간 취하는 수면은 앉아서 취하는 세 시간의 수면보다 승하고, 서서 취하는 다섯시간의 수면보다 수승할 것입니다. 자성(自性)을 무시하고 인간의 작위에 성명(性命)을 맡기는 자는 언제나 허위에 사로잡히기 마련이오. 구도자를 표방하고 고행을 한다면서 양생(養生)을 외면하는 행위는 종교적 의식으로 재계(齊戒)는 될지언정 심적 재계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고행은 끝내 자기학대가 아니라 자기위주가 아닐까요.”
“무서운 양도논법(兩刀論法)이군요.
마치 문턱에서 두발을 벌리고 입(入)이냐 출(出)이냐를 묻는 것과 같군요.”
“논리적인 시(是)와 비(非)를 떠나 시비를 가려 보자는 거요.”
“표준의 상대성 때문인가요.”
“아니요, 다만 언어의 한계성 때문이지요.”
“그럼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지요. 고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학대임에 틀림없습니다. 자기학대는 자기 훼손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노자도 언급했습니다. ‘위도(爲道)함에 일손(日損)이니 손지(損之) 우논지(又損之)하여 이지어무위(以至於無爲) 하면 무위이무불위의(無爲而無不爲矣)’라고. 손(損)에 손(損)이 거듭하여 손함이 없을 때 비로소 득도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자기위주면 타인은 벌써 안목 밖이 아니겠어요.”
“타인을 무시한 자기 위주야말로 진실한 고행이 아닐까요?”
“개연적 판단을 떠나 단도직입적으로 결론하시지요. 개연성은 회색적인데 회색적인 것은 언제나 기회와 위선을 노릴 뿐이니까요.”
“스님, 그럼 간단히 묻겠소. 스님은 지금 ‘일손(日損)’을 거듭하면서 고행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느끼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고행을 생각하기도 하고 느끼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철저하게 고행을 할까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오늘처럼 단식기도를 결심하고 매식(每食)을 생식으로 대할 때마다 고행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습니다.”
“스님, 스님의 고행은 벌써 고행이 아닙니다. 노자는 실제로 고행을 하지 않고 다만 노자의 지혜로 고행을 유추하고 그런 말을 했을 뿐이오. 그러니까 스님의 고행은 고행을 체득은커녕 체감도 못한 노자의 도를 위해 던진 무의미한 희생에 불과합니다. 본래 고행이란 것은 고행을 생각한다거나 느낀다면 이미 고행은 아닐 것입니다. 고행이란 것을 전혀 잊고 무의식적으로 고행하게 되어야 참된 고행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육체를 오롯이 하고서 고행이 가능하겠습니까?”
“신외(身外)에 무물(無物)이며 아생연후(我生然後)에 만사재기중(萬事在其中)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얼핏 듣고 생각하면 극히 유물적이고 유아독존적인 것 같지만 자세히 음미해보면 존재의 보편타당성을 표현한 극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한한 공간, 무량한 원소, 무진한 시간, 무궁한 활력(에너지)의 부단한 작용에 의해 생멸하는 무수한 존재중의 하나인 나를 의식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찾아보게 됩니다. 나를 찾는 동안 나는 양생해야 하며 양생하기 위해선 수신(修身)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나를 찾았을 때는 이미 나는 없고 다만 적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엄동에 병약한 스님이 단식기도를 해야 하겠어요?”
“그런데 그 적멸이라는 게 뭔가요? 우리를 이 산속에까지 유혹해 온 그 적멸이라는 것 말입니다.”
“나는 적멸을 모릅니다. 그러나 적멸은 문자로써 표현할 수 없으며 적멸을 말하면 벌써 적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적멸을 말함은 마치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지껄였다는 우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성성(惺惺)히 오득(悟得)해야 할 뿐입니다. 적멸이니 피안이니 하는 사치스러운 용어를 쓰는 것은 나의 노파심 때문입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끝까지 어휘로써 빌어쓴 것뿐입니다.”
“그래도 저는 단식기도를 강행하렵니다. 저는 스님이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정말로 어쩔수 없는 일이다. 나로서는 역부족이다.
도인이 아닌 바에야 누가 선객의 고집을 꺾을 수 있으랴.
돌아앉으면서 고소를 금치 못할 언어의 유희와 시간을 생식하는 스님과 내가 가졌다는 것은 나의 미망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생식하는 스님은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바랑을 걸머진 채 떠나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작심삼일이었다. 뒷방 조실스님이 떠나는 스님의 등 뒤에 대고 하는 말이 걸작이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구만.” 105쪽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다 그렇게 그렇게 사는 것이지요 부처님공부가 녹녹하지 않습니다 ㅎ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