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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 큰 스님과 이계진 아나운서와의 대담 내용 1985년 KBS ‘11시에 만납시다’
★ 만인은 부처님으로서 존경받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이계진: 우리가 인생의 보람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 불광사의 큰스님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스님! 안녕하세요? 저도 절에 다닙니다만, 스님께서는 원래 불교집안에서 태어나신 겁니까?
광덕스님 : 불교를 알고 나니까, 불교 바깥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만인은 불교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교 안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뭔가 있다고 한다면, 저희 집은 제가 출가할 무렵 모두 가톨릭이었습니다. 저도 성당에 나가고 있었고, 지금도 가족 중 많은 분들은 가톨릭 신자입니다.
이계진 :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시청자들도 많이 있을 텐데, 평범하고 쉬운 얘기들을 많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먼저 스님께선 가톨릭 집안에 태어나셔서 왜 그렇게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광덕스님 : 저는 가톨릭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럽게 신앙이 약했습니다. 제가 성당에 다닌 것은 어머님 뜻을 존중한다. 기쁘게 해드린다는 뜻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차차 책 읽는 시간이 많아지니까 교회 나가는 시간이 줄게 되더군요. 어떻게 불교를 갖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너무 솔직히 털어놔서 부끄러운 내용이 됩니다만, 저는 솔직히 불교를 알고 절에 뛰어든 사람이 아닙니다.
책을 읽다가 건강에 무리가 와서 꼭 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어떤 고마운 선생님이 권유하시기를 “남아가 한번 뜻을 세워서 무엇을 하려거든 참선하는 선방에 한번 가봐라. 참선을 하든 안 하든 구경이라도 한번 해보고 그 환경 속에 잠시만 젖어봐도 다른데서 얻지 못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지요. 사실 저는 불교가 뭔지도 모르고, 더구나 선(禪)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지요. 그때 나이가 스물넷인데, 한창 책 읽을 계획을 세우고 그야말로 ‘독서업’에 종사하고 있던 시절인데 용기가 안 나더군요.
그러나 건강상 책 읽을 형편은 못되고 어차피 쉬어야 하는데, 용기를 얻어서 석 달을 작정하고 찾아간 곳이 부산 범어사였습니다. 그렇게 선방에서 공부하는 걸 구경도 하고 설법도 듣고 하면서 차차 빠져 들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3개월을 작정하고 갔던 것인데, 가보니까 3개월이 지나도 해결 못할 문제를 만났어요.
어떤 것인가 하면, 그 당시 누구나 젊은 시절에 모두 그런 의문들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 생각되지만 ‘무엇이 진실인가?’‘무엇이 정의인가’‘무엇이기에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복종을 요구하고 내 앞에 권위로서 대응하느냐’‘그 정의와 진실의 궁극적인 것이 무엇이냐’하는 것에 대해서 추궁하면서 살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선방에 와 보니까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문제를 규명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참모습이 무엇인가’를 파헤치고 거기서부터 우리가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생각지도 못했던,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무한의 세계, 절대의 세계랄까. 말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생활하는 가운데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이계진 : 그거야말로 몸으로 느낀 것이 아니겠어요? 누가 그런 의문을 제기해 준 것도 아닐텐데요.
광덕스님 : 선방에서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밤에 잘 때까지 추궁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선방에서는 ‘공안’‘화두’라고 그러는데, 그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깨뜨리면서 자기의 완전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자기 모습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의 근원을 알아버립니다. ‘안다’고 하는 것은 지적인 해결이 아니라 바로 주체적으로 자기 것으로 파악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생활하는 가운데 젖어 보니까. 내가 이제까지 덮고 있던 ‘육체적인 나’‘감각적인 나’ ‘물질과 환경에 의해서 조건지어지는 나’ ‘환경에 적당히 적응해서 살아가는 나’ ‘요령껏 살면 이득이 있는 나’ 그런 ‘나’가 아닌 좀더 ‘큰 나’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더군요.
이계진 : 그 당시의 희열이 지금 스님 얼굴에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광덕스님 : 희열이라기보다는 그 당시는 심각했습니다. 이제까지 보지도 못했던 ‘문’이 있어요. 이걸 열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 뛰어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석달이 지나도 돌아갈 줄을 몰랐습니다.
가끔 출가 동기를 묻는데 제게는 특별한 동기가 없습니다. 건강상 문제, 선생님의 권유도 있고 해서, 선방에 구경갔다가 거기서 훌륭하신 지도자를 만나고 생활하는 가운데 새로운 세계, 인간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문을 한번 열어봐야겠다, 물러설 수 없다 해서 그 생활을 한 것이 3년 30년 40년이 되었습니다.
이계진 : 집 생각이 아니 나시던가요?
광덕스님 : ‘무엇이 진실이냐’ ‘무엇이 정의냐’ ‘마침내 궁극적인 나가 무엇이냐’ 이 문제를 파고 있던 사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까지 왔습니다. 그 강물에 뛰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용단도 결단도 끊어야 할 애정도 없었어요. 저 자신을 돌아보면 그냥 책 읽는 습관 그대로 순순하게 살아왔어요. 옆도 뒤도 안 보고, 앞만 보고 그냥 뛰어온 거지요. 부끄럽게도 아직 별 경지도 얻지 못하면서도 제 삶을 돌이켜서 말한다면 이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계진 : 공부를 하는 데는 이끌어 주는 스승이 게시지 않겠습니까? 범어사에서 출가하실 때, 어떤 분들의 가르침을 받으셨습니까?
광덕스님 : 저는 지금 돌이켜보면 행복했습니다. 동산 큰스님이신데, 그 어른은 일찍이 보지 못한 훌륭하신 큰스님이세요, 정말 위대한 선정이십니다. 우선, 여기 계신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소개장 하나 가지고 찾아오는 젊은이를 만나면, “무엇 때문에 왔느냐?” “불법은 무엇이고 선은 이런 것이다.”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 어른은 진짜를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어떤 것이 꿀이냐?”라고 물었을 때, 꿀은 맛도 달고 몇 도 이하에선 고체가 되고 몇 도 이상에선 액체가 된다거나, 맛은 사탕과 같다거나 하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 입에다 꿀을 그냥 집어넣어 줘버리더라고요. 직접 보여주시더라고요.
제가 찾아뵈었을 때, 인사를 드리니까. 첫 마디가 “꿈속에 있을 때는 꿈이 너라고 하자. 생각이 있을 때는 생각이 너라고 하자.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너는 뭐냐? 가져와 봐라.”
그때만 해도 그 뜻을 몰랐습니다. 생각을 꾸며 대가지고 ‘내가 뭐냐, 내가 뭐냐’ 온갖 이론을 다 꾸며내려고 했습니다.
생각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쫓겨났습니다. 7일간을 그렇게 쫓겨났습니다.
이계진 : 처음 배우자고 온 사람한테...
광덕스님 : 아닙니다. 그것이 가장 진실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 꿀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 하면 그게 다 거짓입니다. 꿀을 일러주고자 하면 꿀을 입에 넣어주는 것만 같지 못하고, 그렇게 해주는 것이 가장 친절한 방법입니다. 禪은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성, 우주의 근원적인 실재성을 주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그 문제를 알게 하기 위해서 맞대면하자마자 들이댄 겁니다. ‘이게 꿀이다’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하루 한 번씩 인사를 드리고 쫓겨나곤 했습니다. 비참했지요. 그때만 해도 건방져서 세상에 안하무인으로 고개를 들고 다녔을 때입니다.
이계진 : 책도 많이 읽으셨고...
광덕스님 : 많이 읽었다고 자랑은 못해도 어쨌든 의심을 두고는 안 살겠다고 하는 식으로 살던 시절이었고, 뜻도 있었지요. 하여튼 일제 강점기를 겪어낸 사람으로서는 다 똑같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조국이 다시는 이 치욕을 반복하지 않고, 세계를 이끌고 평화를 가꿔갈 수 있겠는가. 영예로운 조국의 모습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원대한 야심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건방질대로 건방졌었는데, 거기 와서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모두들 생각 갖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생각도 없고, 꿈도 없고, 생각이 끊어졌을 때, 너 자신이 무엇이냐, 들이대라 하는데, 말이 소용없어요. 말은 생각이 아니냐, 말은 논리이자 개념의 조합이나 분석 내지 그런 이론의 전개인데, 그걸 가지고는 안 먹혀들어요.
이계진 : 어떻게 통과하셨어요? 통과해야 받아들여지고 뭔가 가르침을 주셨을 거 아니에요?
광덕스님 : 비싼 수업료를 내야 합니다. 그게 ‘공안’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이냐?’이겁니다. 생각도 없을 때, 너의 주인공, 생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로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하는데, 생각을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논리적인 분석과 종합과 온갖 사량 분별을 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생각이 끊어져야 합니다. 생각을 하되 생각이 아닌, 생각이 아니면서 생각하는, 그것이 불교의 수도법 가운데 핵이라고 이르는 선의 방법입니다. 큰 스님께서는 처음부터 실물을 가지고 저를 닦달하셨습니다. 일주일 만에 저도 한 마디 할 말이 있을 것 같았죠. 그때는 나도 그 뜻을 몰랐거든요.
아침에 청소를 하고 들어가니, 그때는 큰스님께서 일정한 시간에 붓을 들고 쓰시는 게 있었습니다. 그때도 글을 쓰고 계셨습니다. 제가 절을 막 마치고 한마디 입을 벌리려고 하는 찰나에 붓을 딱 들고 눈앞에 확 들이대십니다. “일러라 일러,” 말해라 이거예요. 저는 진땀이 확 났습니다. 너 말로 꾸며대서 이론으로 이러쿵저러쿵 하려는 것,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말과 이론 이전에 너의 생명 자체, 참으로 있는 것, 궁극적인 너의 생명을 생명이라고 하고 있는 그 물건 내놔라 이거예요 저는 그 말 한마디에 완전히 깨져버렸어요. 쫓겨났어요.
‘아, 내가 이제까지 생각으로 알려고 했구나. 이론으로 꾸며대려고 했구나. 그래서 집에 있는 책을 가져왔으면 책을 보고 해명을 했을 텐데 하는 생각까지 했구나.’
그때부터는 선방에 들어가서 참선공부를 했습니다. 한국전쟁 나던 해, 그해에는 30년 동안 참선하는 스님들도 있었습니다만, 거기서 영예롭게도 한자리를 주셔서 거기 들어가서 참선을 하고 정말 ‘생각지도 않는 가운데 하는 생각’이라고 하는 것의 내용이 되는 참선생활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계진 : 동산스님을 그렇게 만나서 수행의 길이 시작되셨군요. 뭔가 깨닫고, 불교가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인가. 선의 효과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느끼고 알만 한 때가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이나 지나서였습니까?
광덕스님 : 우선 내가 평범하게 세상을 살고, 욕망이나 채우다가, 혹은 세상의 명예나 낚다가, 혹은 실패하고, 이럭저럭 살다가 늙으면 죽는 것이다. 인생은 그런 것의 연속이라고 알고 있던 것이 깨져 버린, 그걸 넘어선, 위대한, 영원한, 보다 값있는, 보다 권능적인, 그야말로 물량 환경조건에 종속적인 그런 비속한 존재가 아닌 위대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하는, 그런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들었다는 것, 그것이 첫째 선의 효능이라고 해야겠지요.
석 달 이전에 그런 것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만큼은 선의 효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계획했던, 독서 내용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이 오래 걸렸을 테지만, 책을 읽어 도전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이론 이전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인간이 가지는 불멸의 위대성을 발견하지는 못했더라도 우리가 가지는 것이 한계의 벽이고, 우리는 변화 가운데 있는 불안한 상황 속에 있는 것이고, 이것을 깰 수 있는, 그것을 넘어선 참 자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선의 효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는 그것은 확정적으로 깨달아서 완전한, 참된, 자기 회복을 한, 진리회복을 한, 진리획득을 한 경지까지 가면 완성자라고 하겠지만 그런 완성체를 주체적 파악은 못했더라도 내가 그런 존재다. 만인이 그런 존재다. 역사는 그런 진리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는 것을 알게만 되더라도 이는 선의 효용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부끄럽게도 선이 지나는 효용의 전체를 취득한 분들의 설명과 말씀을 이해하는 정도밖에는 못 됩니다. 그렇지만 이 정도나마 내가 만나서 내 가슴속에 이 무한세계의 청풍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저는 감사하게 생각해요.
이계진 : 수행과 공부는 끝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광덕 스님께서 이제까지 느끼고 공부해 오신 것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가끔 인과니 업보니 이런 말들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 세상에 인과는 정말 있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광덕스님 : 인은 원인이고 과는 결과를 얘기하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무한성을 내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내 생명이 금강석 이상의 견고성과 광명성, 무한가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더라도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호주머니 속에, 제 생명 속에 그것으로 있는 것은 누구나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성을 우리의 현실 속에 전개해 나가는 과정은 바르게 전개하든 어둡게 전개하든 하나의 원인이라고 하는 적극적인 동작이 나오고 거기에 따른 결과가 나옵니다. 원인과 결과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물리의 법칙이나 인과같이 우리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어두운 마음을 일으키고 우울한 생각에 젖어 있을 때 그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그의 몸 전체는 침체해집니다. 이것도 인에 대한 과입니다.
이계진 : 그러나 가끔 나쁜 생각, 나쁜 짓을 한 사람도 좋은 결과가 올 때가 있거든요.
광덕스님 :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의 인이 하나의 과를 가져오는 것은 무수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이 과를 가져오고 과는 새로운 인이 되고, 그렇게 해서 무수한 과를 가져옵니다. 흔히 인과라고 하는 것을, 원인에서 인이라고 하는 하나가 결정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과라고 하는 것이 숙명적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인은 그런 의미보다는 우리가 뜻하는 바를 만들어 가는 무수한 창조의지의 설정이에요, 창조의지의 설정이라고 하는 인이 끊임없이 새로운 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그 인이 참된 진리성인 인을 심느냐 하는 그 인에 따라서 과실이 영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만족을 위해서 앞뒤도 안 보고 저돌적인 행동을 했다고 한다면 과보도 즉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 파동도 계속해서 연달아 크게 옵니다.
이계진 : 착한 일을 해야겠습니다.
광덕스님: 그런 것보다도 인과는, 인이 무수한 창조적인 원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인을 지음으로써 우리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로 인과의 의미가 파악됐으면 좋겠습니다.
이계진 : 스님은 속세를 어떤 눈으로 보고 계십니까?
광덕스님 : 우리는 참 귀한 사람들입니다. 세간은 때 묻고 죄짓고 불안과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시간의 연속, 그것을 반복하는 그러한 어두운 세간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가슴속은 참으로 귀하고, 참으로 위대한 지혜와 덕성과 완전 조화를 이루는 원만한 아름다움을, 힘과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간에서 어둡고 거친 일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이 미혹해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모습이고 그 본성 가운데는 언제나 진실과 아름다움을 구하고 원만과 평화를 구하고 그렇게 해서 참으로 완성된 자기 발현을 추구해 가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간 사람들은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과 존경을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지 않은가. 저는 그것을 회복해 주고 싶습니다.
이계진 : 기독교의 사랑, 유교의 인(仁), 불교의 자비는 어떤 공통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광덕스님 : 다른 성자들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좀 경망스러운 것 같습니다.
이계진: 그럼 자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광덕스님 : 자비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 생명의 체온입니다. 본래 생명은 육체에 갇힌 생명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사람 모든 사람의 마음을 창구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 생명은 영원성이며 무한성이며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가 가지는 본래 생명의 체온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조건이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대로 무진장으로 그냥 주기만 하는 것이 불교의 자비입니다.
자비를 통해서 성불하기를 바라거나 자비를 통해서 복되기를 바라면 복이 오고 성불을 하지만, 그런 것만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의 본질은 그와 같이 본체 생명, 진실 생명이 지니는 따뜻한 체온, 그것은 만인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합니다. 불성은 인간 본성, 부처님 성품이라고 하는 인간 본성이 만인 가슴 속에 피어나고 있는 모습들이에요. 누구든지 자비를 통해서 진리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가 아끼고 키워주어야겠어요.
이계진 : 신도들이나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설법하실 때 특히 강조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광덕스님 : 무엇보다도 각자가 자신을 갖고 긍지를 갖자는 것이지요, 우리가 겉으로는 범부고 환경조건에 종속된 것 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그 모두를 뛰어넘은 위대한 불성의 주인공입니다. 불성은 부처님이 따로 쥐고 전능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만인이 주인이 되어서 행사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전능적인 진리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고, 높은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모든 환경 조건을 통해서 근원적인 진리인 인간 생명에 깃든 무한 절대성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모든 환경조건과 사회체계를 통해서 이러한 진실하고 귀한 인간 생명을 보호하고 돕고 키우고 여지없이 발휘시켜서 조화 있는 발전을 시키고자 하는 것이 사회적인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자기 등지를 갖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말 값있는 삶, 값있는 국토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을 언제나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인간이 가지는 영원성이라는 문제입니다. 나는 100년 살다 끝나는 생명이라는 생각을 버리자. 본래 생명은 보다 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여유와 희망과 집념을 가지고 자신이 가진 무한성을 끊임없이 끌어내서 불국토를 실현한다고 할까.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진리를 꽃피우는 국토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계진 : 불교도 각 나라마다 특성이 있게 마련인데 우리 불교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광덕스님 : 제가 말씀드리기는 외람된 부분이지만, 일차적으로는 자기완성, 자기의 순수청정을 확립해서 청정한 자기 힘을 끊임없이 사회와 역사에 헌신하라. 맹세코 일체 중생을 구한다. 역사 앞에 자기 생명 전체를 던져버리고 용해시켜버린다는 목표를 향해서 생을 살아가는, 자기완성을 위한 구도 정신이 강하다는 점과 구세 구국 정신이 강하다는 점이 한국 불교의 특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계진 : 요즘엔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십니까?
광덕스님 : 불광법회를 시작한 지는 10년이 됐고, <불광> 잡지를 낸 지는 11년이 됩니다. 한 달에 여러 차례 모여서 수행하고 공부하는 모임도 갖고, 보육원의 어린이들을 돌본다든가, 대학 관계일을 좀 참견한다든가. 그 밖의 불교 관계 일들을 조금씩 손대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좀 정리를 해서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잘 마무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 개개인의 존귀성과 사회제도, 체제를 통한 인간 조건의 보장, 조국의 평화가 세계 속에서 이뤄진다고 하는 측면에서의 노력 등이 제가 지향할 길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진리의 등불이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 일에 시간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계진 : 각(覺)사상을 많이 강조하신다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광덕스님 : 작은 깨달음인데 인간은 본래 완성자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완전무결한 진리성, 무한능력이 그대로 갖춰져 있는 완성자라는 것, 만인이 부처님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너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승인하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이 못난 자가 아니고, 악한 자가 아니고, 불행한 자가 아니고, 너는 행복하고, 지혜있고 용기 있고, 성공할 사람으로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라. 확신해라. 스스로 너의 마음을 그렇게 가져라. 그렇게 깨달음으로써 그 다음에 행이 나옵니다.
이계진 : 일부러 성불하려고 할 필요 없이 깨닫기만 하면 됩니까?
광덕스님 : 깨달음이 성불입니다. 본래는 이미 성불이 되어 있는 것이고, 만인이 부처님으로 존경받아야 될 사람입니다. 남한테 존경받아서 할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 알고, 회향함으로써 완성의 길을 갑니다. 끊임없이 올바른 믿음과 회향을 통해서 그걸 실현해 가야죠. 만인은 모두가 부처입니다.
이계진 : 우리는 원래 부처님과 같은 깨달은 사람들인데 그걸 알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광덕스님 : 예, 만인은 모두가 부처님입니다. 존경받고 대접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계진 : 새해를 맞이하여 스님의 새해 소망을 듣고 싶습니다.
광덕스님 : 아침해 수평선에 떠오르는 찰나처럼 만인의 생명의 지평선에 진리의 태양은 눈부시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억겁 전에 빛나고 있었고 오늘 빛나고 있고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우리의 새해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와 같은 진리의 주인공임을 마음속에 다져서 희망차고 활기차고 밝고 넓은 희망을 펼쳐 갔으면 하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우리의 한해가 더욱 밝아지고 우리의 역사는 더욱 크게 밝아질 것으로 믿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소망입니다.
-이글은 1985년 KBS ‘11시에 만납시다’ 대담 내용을 녹음, 불광편집부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끝 280쪽
그동안 광덕큰스님의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연재를 꾸준히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한생각 바꾸어 사랑과 지혜와 평화가 있는 삶을 살아가시길 발원합니다.
광덕큰스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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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광덕스님 같은 분이 많아야 하는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38년전 수계해 주신 광덕스님 감사합니다! dalma님 법문공양 수고하셨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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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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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스님 뵙고 싶어요. 스님이 법문하시던 자리가 그립습니다. dalma님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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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스님의 법문을 그동안 올려 주신 dalma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