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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티바히 산악 사원 전경> |
다음날(2002년 4월29일) 페샤와르에서 스와트로 출발했다. 간다라 지방에서 스와트로 가려면 맬라칸트 고개를 넘어야 한다. 페샤와르를 출발해 1시간 정도 달리니 ‘마르단’이 나왔다. 마르단 시가지에서 벗어나 동북쪽으로 10여분 가자 황량한 암산(巖山)이 시야에 들어왔고, 차에서 내려 20여 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거대한 탁티바히 사원지가 그 자리에 있었다. 마을이 저 멀리 내려다 보였다. 촌락에서 떨어져도 한 참 떨어진 이 곳에 승원(僧院)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마하박가>(율장 대품) 등에 의하면 사찰은 본래 ‘마을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건립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가까우면 수행에 방해되고, 멀면 탁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고려해도 탁티바히 사원지는 마을에서 너무 멀었다.
그렇다면 답은 두 가지. ‘수행자들이 탁티바히 사원지에서 자급자족했다’고 생각된다. 그 옛날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 곳에 모여 탁마하고, 정진했으리라. 승원은 매우 고요하고, 평원을 내려다보는 전망도 훌륭했다. 또 하나는 잦은 이민족의 침입과 도적들의 약탈을 면하고자, 방어에 최적인 능선 위에 성곽식 사원을 만들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 혜초스님(705∼787. 719∼723 인도순례)은 <왕오천축국전>에서 “가운데 땅인데도 오랑캐가 흥하고…. 남쪽으로 향하면 도로가 험악하여 도적이 많으며, 북쪽으로 가면 악업을 행하는 자기 많아 시장과 가게에는 도살하여 고기를 파는 데가 많다”고 적고 있다. 도적이 많아 산위에 성곽처럼 사원을 건립했으리라.
<스와트 평원에 있는 톱다라 스투파> |
사진설명: 2기인데, 1기는 1/2이상이 파괴됐다. |
학자들에 따르면 탁티바히 사원지는 불지(佛地)와 승지(僧地)가 구분된 곳이다. 인도 서부 데칸지방의 석굴사원이나 기타 지역의 고고학적 유적을 조사해 봐도, 스님들이 거주하는 방의 중심부에 탑이 있는 형태는 하나도 없다. 스투파나 스투파를 수용한 ‘차이탸’(예배당. 불지)와 ‘비하라’(승방. 승지)는 항상 분리돼 있다. 탁실라 등 북서인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탁티바히 라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유서 깊은 탁티바히가 언제부터 황폐해졌을까.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1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명문이 출토돼 탁티바히가 상당히 오래 전에 조성된 승원이라는 것만 확인됐을 따름이다. 개설된 이후 이곳에 부파불교 계통의 스님들이 거주했는지, 대승불교 계열의 스님들이 거주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는지, 이슬람 세력의 동점(東漸)과 함께 쇠망의 길을 걷게 됐는지 등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다. 탁티바히 유적은 수많은 수수께끼와 함께 2000년의 기나긴 세월을 견뎌 오늘에 이른 것이다.
유적지 이 곳 저 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파키스탄 관리인이 따라오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자 반색을 한다. 손짓으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더니 한 권의 노트를 보여 주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의 서명이 가득한데, 군 데 군 데 한국 사람의 이름이 보였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도 다수 있었다. 관리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오더니 동전을 보여주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옛날 동전들이며 팔고 싶다.”고 말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살펴보았다. 앞면에 왕의 얼굴이, 뒷면에 부처님인 듯한 상이 조각된 동전도 여럿 있었다. 속는 셈치고, 몇 개를 샀다. 정오가 가까이 오는지 해가 바로 머리 위에 있었다. 스와트로 가기 위해 탁티바히 사원지를 내려왔다.
<니모그람 산악 사원지> |
사진설명: 산 정상에 자리한 니모그람 사원지는 마치 성곽같다. 대 스투파를 중심으로 작은 수투파들이 즐비하게 자리한 멋진 유적지이다. |
차를 타고 맬라칸드 고개를 넘었다. 맬라칸트 고개. 신라 혜초스님도 이 고개를 넘어 우다냐국(烏長國. 스와트)에 들어갔다. <왕오천축국전>엔 이렇게 나온다. “간다라국으로부터 정북향에 있는 산에 들어가 3일을 가면 우다냐국에 도착한다. 그곳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우다냐라 부른다. 이 나라 왕도 삼보를 크게 공경한다. 백성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많은 몫을 절에 시주하여 공양하고 조그만 몫을 자기 집에 남겨둬 의식(衣食)에 사용한다. 또 재를 올려 공양하는데 매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절도 많고 스님도 많은데 스님의 수가 재가자의 수보다 약간 많다. 오로지 대승불법만 행해진다. 의복‧음식‧풍속이 간다라국과 비슷하나 언어는 다르다. 그 땅에는 낙타‧노새‧양‧말‧전포 등이 풍족하다. 기후가 매우 춥다.”고 적혀있다.
힘들게 맬라칸트 고개를 넘어가니 넓은 평원이 나왔다. 넓은 평원엔 시원한 강, 스와트강이 굽이치며 흐르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들판 곳곳에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당나라 현장스님(629∼645 인도 순례)은 <대당서역기>에서 스와트(오장나국)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나라는 부처님 법을 숭앙하고 존중하며 대승을 믿고 경배한다. 옛날에는 1,400개의 가람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무너져 황폐해졌다. 옛날에는 스님들의 수가 18,000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들은 무두 대승을 익히고 있으며 선정에 잠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능히 글을 잘 외지만 심오한 뜻이 그다지 깊이 궁구하지는 못하고 있다. 계행이 맑고 깨끗하며 특히 금주(禁呪. 다라니)에 능하다.”
<대당서역기> 내용을 되씹으며 강변에 자리 잡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다시 차를 타고 달렸다. 한 참을 가니 경찰이 나타나 “외국인은 들어가지 못하는 지역”이라며 길을 막았다. 스와트에도 외국인 금지구역이 있나 생각하며 경찰서까지 가 경찰을 설득하고 산 속으로 계속 들어갔다. 강으로 변한 길에 차를 세워두고 산 속으로 1시간 정도 걸었다. 바싹 바른 강을 따라 계곡 정상에 있는 산위에 올라갔다. 가는 도중 여러 번 ‘그만둘까’ 생각했으나 참고 올라갔다. 힘들게 ‘니모그람’(Nimogram) 사원유적지에 올라갔다.
정상에 올라가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거대한 스투파 유적, 중앙 스투파를 둘러싸고 주변에 자리 잡은 작은 스투파들, 그리고 승원 유적들, 유적 사이에 파괴된 채 흩어져 있는 유물들 등 모든 것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무엇보다 사원 유적지에서 내려다본 계곡의 풍광이 일품이었다. 넓디넓은 계곡에 흩어져 자리 잡은 민가(民家), 밀밭,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 등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유적 보다 풍광에 정신이 빠져 한 참을 내려다보았다.
<탁티바히 유물전시관에 있는 파불들.> |
니모그람 사원유적지를 샅샅이 답사하고 다시 산을 내려와 ‘톱다라’(Top dara) 스투파로 갔다. 길 옆, 민가(民家)들이 촘촘히 있는 바로 옆에 쌍둥이 스투파가 서 있었다. 한 기의 스투파는 1/2 이상이 무너진 상태였다. 동네 아이들이 무너진 스투파 위에서 놀고 있다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스투파 주위를 서성이며 이리 저리 살피고 있는 우리 주변에 애들이 갑자기 몰려들었다. 인도 애들처럼 집요하게 뭘 요구하지는 않고, 멀리서 우리들의 행동을 우심히 살피고만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불교가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때문에 톱다라 유적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리라. 그들은 순수한 눈매를 뒤로 하고 취재팀은 다시 스와트 본향인 사이두 샤리프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