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나라 화투만 광 표시가 있을까
일본 오사카 남쪽 덴노지 동물원 길건너 조일(朝日, 아사히 あさひ)이라는 음식점 간판이 꽤나 선정적이다. 욱일기(旭日旗)에 등장하는 태양빛살 모양 반쪽이 떡하니 걸려있고, 그 위 동그란 원 안에 다시 부채살같은 욱일과 조일(朝日)이라는 글자, 그리고 커다란 화투장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발길을 멈추게 했다.
삼팔광땡의 주인공인 삼광, 팔광 두 장의 화투를 보며 "왜 저 화투 아랫단에는 빨간 동그라미 속 (光) 빛광자 표시가 없는걸까?" 궁금증이 생겼다. 일본 화투를 살펴봤다. 없네 없어 (光)이 없네 그려. 화투는 본래 일본 것인데, 왜 그들은 그 좋은 광을 마다했을까? 질문은 바뀌었다. "왜 우리나라 화투만 광 표시가 있을까?"
80년대는 화투가 국민적 놀이였다. 셋 이상 모였다 하면 어디서든 고스톱을 쳤다. 집이나 가게, 식당은 기본이다. 들로 산으로 소풍을 가서도, 심지어는 비행기 안에서도 판을 벌렸다. 명절에 친척들이 모이면 일단 지역마다 다른 화투 규칙을 통일하고 진도를 나갔다. 안 그러면 '우리동네에서는 이것을 쌍피로 쳐주는데 이 동네는 왜 이리 인심이 박하냐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슬슬 과거 얘기까지 곁들이다 말다툼을 하게 된다. 장례식장에서도 고인을 위한 추모는 잠시, 해가 지면 본격적인 고스톱 판이 벌어진다. 게중에는 팔 아프다고 섰다로 전환하며 판돈을 키우는 꾼들도 나타난다. 관찰 결과, 그들은 오랜시간 안정적인 양반다리가 가능하고 술 먹는 손, 담배 피는 손이 따로 있었다.
고스톱 공화국의 열풍은 90년대 2000년대까지 넘어오다 지금은 시들해진 것 같다. 오랜시간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야 노는 화투보다 허리도 안 아프고 더 재미있는 놀거리가 여러가지로 많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80년대 고스톱 열풍의 주역들이 서서히 은퇴를 하시고 화투장을 쫙쫙 내리칠 힘이 예전만 못한 까닭도 있지 않을까 싶다.
간판에 그려진 일본 화투 팔광패를 보면 달 아래 억새밭 언덕이 보인다. 우리가 치는 화투에는 그냥 까만색 언덕으로 돼 있던데 ᆢ. 일본 화투를 보면 세세하게 솔잎도 그려져 있고 이파리마다 잎줄기나 잎맥이 가느다랗게 그려져 있다. 반면 우리 화투는 이런 선들이 생략된 채 검정색으로 단순하게 칠해져 있다. 그래서 똥광패는 정말 닭대가리와 똥무더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누가 오동나무 이파리라고 말해주지 않는 이상 그게 똥같은 덩어리로 보이지 오동잎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도 일본 화투는 종이로 만들고 우리나라 화투는 플라스틱으로 만든다. 추측컨데, 검정색으로 단순화한 화투 인쇄는 이 재질의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 같다. 종이에 인쇄하는 것과 비닐에 인쇄하는 것, 둘의 결과물이 같을 수는 없다.
모양새가 조금 달라지고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고 해서 본질까지 달라지지 않는다. 구한말 보급된 일본산 화투는 세월이 흐르며 국산으로 둔갑하긴 했지만 일본의 정취를 과하게 내뿜는 것은 과거나 현재나 변함이 없다. 그래서 다시 정리해봤다.
1월: 송학(松鶴), 일본은 새해가 되면 문 앞에 솔가지 장식(門松, 가도마쓰 かどまつ)을 걸어두고 한해의 안녕을 기원한다.
2월: 매조(梅鳥), 매화꽃과 휘파람새. 일본에서는 둘이 잘 어울린다고 할 때 매화와 휘파람새 같다고 한다.
3월: 사쿠라, 일제는 봄바람에 흩날려 한순간에 사라지는 벚꽃 엔딩마저도 충성스럽고 멋진 죽음, 쿨한 죽음으로 미화했다. 자살특공대 가미카제는 벚꽃 가지를 흔드는 환송을 받으며 출격했고, 자폭을 하면 천황을 위하여 산화(散華)했다는, '벚꽃잎처럼 흩뿌려지다'라는 말로 멋지게 치켜세워졌다. 멀쩡한 벚꽃도 떼죽음을 권하는 수단이 됐던 때였다. 미곡수탈항이었던 군산이나 일본군항이었던 진해에는 아직도 큰 길가 좌우로 벚나무가 빽빽하다. 박정희(高木正雄, 다까끼 마사오)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에는 여의도를 비롯한 서울 곳곳 새길에 새로운 벚나무가 빽빽해졌다. 박정희가 사쿠라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삼광패의 사쿠라 아랫부분은 일본 전통의 커튼, 만막(幔幕, 만마쿠まんま)이다.
4월: 흑싸리가 아니라 등나무다. 화투장을 거꾸로 놓고 보면 위에서 아래로 치렁치렁 내려온 등나무가 보일 것이다. 등장하는 새는 두견새
5월: 난초가 아니라 창포다. 노란 성냥개비같은 것은 습지에 놓인 야트막한 나무다리
6월: 목단(牡丹), 모란꽃과 나비
7월: 홍싸리와 멧돼지, 일본사람들은 싸리나무와 싸리꽃을 엄청나게 좋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싸리 빗자루를 만드는데 요긴하게 쓴다.
8월: 공산명월(空山明月), 빈산이 아니다. 가을 바람에 휘청이는 억새밭이다. 새 세마리는 기러기
9월: 국화. 국화는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꽃이다. 왕실 국화 로고를 보면 꽃잎이 16개다. 욱일기에 그려진 빨간 광선도 16줄이다. 빨간색 술잔에는 壽(목숨 수)자가 새겨져 있다.
10월: 단풍과 사슴
11월: 비[雨], 화투장에 시커멓게 내려온 이파리는 버드나무다. 비광에 등장하는 우산 쓴 사람은 헤이안 시대 유명한 서예가 중 한 사람인 오노 도후(小野道風)라는 인물이다. 아무리 해도 서예 실력이 늘지 않아 중도포기 할까 고민하는 오노씨. 어느 비오는 날, 개구리 한마리가 빗물에 떠내려가지 않으려 폴짝폴짝 끊임없이 발버둥을 치다가 바람에 휘어지는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기어올라 목숨을 구한 장면을 보고, '나는 개구리보다 못났었네'라는 반성과 함께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큰 인물이 됐다는 일화가 전해져온다. 원래 그림에는 나막신을 신고 있었는데 화투를 만드는 누군가가 고무신으로 바꿔놨다. 패 중에 얼굴 빨갛고 길고 빨간 제비꼬리를 가진 새가 등장하는데 그건 수꿩, 장끼다. 알다시피 일본의 국조는 꿩이다. 뻘건 바탕에 새까만 문짝 두 개가 그려진 비 껍데기는 어쨌든 기분 나쁘게 생겼다. 헤이안 시대, 백성들이 하도 못 살아서 시체를 그냥 나생문(羅生門 라쇼몽)이라는 성문 밖으로 버렸다는데, 그 문을 모티브로 그렸다는 설이 있다.
12월: 동(桐), 똥 아님. 오동잎. 똥광에는 봉황새와 오동잎이 등장한다. 오동은 일본 수상이 이끄는 정부의 상징이다. 과거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가문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우리나라 화투에만 광 표시가 있는 이유는 뭘까? 민속자료도 찾아보고 골동품도 뒤져봤는데,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질문 자체가 마치 우리동네 떡볶이에 오뎅이 들어간 이유를 캐묻는 것처럼 괜한 시비를 거는 것 같기도 했다. 떡볶이에 오뎅을 넣건 계란을 넣건 뭔 상관이람 ᆢ. 그렇다. 떡볶이에 오뎅은 떡볶이 아줌마가 집어넣는다. 더 맛있게 해서 더 팔아보려고.
화투 제작자 중 창의력이 뛰어난 그 누군가가 친절한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여 화투 다섯장에 광 표시를 해준 것은 아닐까. 그 화투가 인기를 끌면서 다른 지역의 제조업자들도 따라 하다보니 전국 표준이 된 건 아닐까. 나름의 결론을 내려본다. 화투 마흔여덟장 중에서 그림을 외워 광패 다섯장을 분간하는 것보다 친절하게 '이것이 광이오' 표식을 달아주는 편이 훨씬 나을테니까.
화투에 청단, 홍단, 초단이라 불리는 띠들이 있다. 이 띠는 소원을 적어 대나무에 거는 길쭉한 색종이, 단자쿠(短冊, たんざく)에서 유래됐기에 단이라 한다. 일본 화투에는 청단이 그냥 파란색 띠인데 우리나라 화투는 '청단'이라고 글자가 새겨져있다. 화투판에서 열일하는 색맹을 위한 배려일수도 있겠다. 창의성은 진일보해서 팔광 보름달 안에 떡방아 찧는 토끼를 넣거나 특이한 문양의 보너스 쌍피 여러장을 만들어 넣는데까지 이른다.
종이화투는 1960년대까지도 사용됐었다. 그런데, 당시 화투에도 지금과 같은 광 표시가 있다. 반면 일제강점기의 화투는 광 표시가 없는 일본 화투와 같다. 화투 문양에 광이 있다던가 한글로 홍단, 청단 쓰여지거나 화투장 재질이 변한 것은 모두 해방 후의 일인 것 같다.
일본 놀이문화연구의 대가 마쓰가와 고이치(増川 宏一, 1930년생)는 도박의 일본사(賭博の 日本史)라는 책을 통해 화투가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추진하는데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됐다고 말한다. 1908년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조선 농민에게 화투를 보급했다고 써놨는데, 역사적 사실이다. 동척은 한국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아 일본과 일본사람의 것으로 만들고, 서류상 합법화하는 일을 했다. 농민들에게 농한기 노름을 장려하고 고리대를 뜯어 종국에는 집과 땅을 빼앗는 등 사채업자나 조폭이 벌이는 짓을 전국적으로 벌이며 한집도 빼놓지 않고 탈탈 털었다고 보면 된다. 그 결과 일본 본토의 소작농은 우리나라 땅의 지주가 됐고 땅을 잃은 우리 농민은 북간도 황무지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 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
황현 선생의 절명시 중에서
황현(黃玹, 1855-1910)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복속되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은가? 나는 위로는 황천(皇天)이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9월 10일 자결을 한다.
황현 선생은 1864년부터 1910 년까지 47년간 우리나라의 역사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총 7권의 책을 묶어 매천야록(梅泉野錄)이라 하는데 이 책에 화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매천야록 권5, 병오년(1906), 광무10년 '근년에 일본인들이 서울 및 각 항구에 화투국 (花鬪局)을 설치했다. 지화(紙貨)로 도박을 해, 한 번에 만 전을 던지곤 하니, 이 때문에 파산하는 우둔한 양반이나 못난 장사꾼들이 줄을 이었다.'
아! 화난다. 광이고 뭐고 이쯤해서 줄여야겠다. 미스터 썬샤인에 나오는 총 든 김태리를 떠올리며 진정해야겠다.
[출처] 왜 우리나라 화투만 광 표시가 있을까|작성자 나무와 물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