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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덕수궁 돌담길’의 가수 진송남, 노래인생 55년간의 이야기[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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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에서 ‘부산항 제3부두’까지... ‘덕수궁 돌담길’, ‘바보처럼 울었다’, ‘오 님아’, ‘시오리 솔밭 길’ 등 많은 히트곡과 더불어 시대를 함께 노래한 미남, 미성의 스타 진송남. ‘부산항 제3부두’는 그의 삶, 한 부분이 소중히 담겨져 있는 노래다. ‘나란히 걸읍시다’의 잉꼬 부부 듀엣 ‘진송남 부부’의 음악적 끼와 인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들 진민기씨 또한 최근 ‘그런 거야’를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한 뮤지션.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덕수궁 돌담길’과 함께 탄생한 가요계 3인의 스타-정두수, 한산도 그리고 진송남
비 나리는 덕수궁 돌담장 길을/우산 없이 혼자서 거니는 사람/무슨 사연 있길래 혼자 거닐까/저토록 비를 맞고 혼자 거닐까/밤비가 소리 없이 내리는 밤에. 밤도 깊은 덕수궁 돌담장 길을/비를 맞고 말없이 거니는 사람/옛날에는 두 사람 거닐던 길을/지금은 어이해서 혼자 거닐까/밤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밤에. 1966년 발표된 노래 ‘덕수궁 돌담길’이 빅 히트하면서 동시에 이곳 또한 서울의 데이트 명소로 다시금 떠올랐다. 덕수궁 돌담길은 우리 근대사의 유서가 깊은 곳. 현재는 정동극장, 정동아트홀 등이 들어선 문화, 예술 공간으로 전통과 현대의 멋이 한껏 어우러진 곳이다. 특히 이 노래로 인해 전국적인 명소로 거듭나면서 한때 ‘청춘 남녀 데이트코스 1호’이기도 했다. 이 노래의 빅 히트와 더불어 우리나라 가요계에 세 명의 스타가 탄생한다. 바로 이 노래의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 정두수, 그리고 히트 작사가에서 작곡가로 변신한 한산도,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른 주인공 진송남이다. 이 노래는 작사가 정두수의 작사 데뷔작이다. 그는 이후 '흑산도 아가씨(이미자)', ‘가슴 아프게(남진)’,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마포종점(은방울자매)', ‘시오리 솔밭 길(진송남)’, ‘마음 약해서(와일드캐츠)’ 등 숱한 히트곡을 낸 작사가로써 첫 발을 내디딘 작품. 시인이기도 한 그는 자신이 쓰는 노랫말을 ‘가요시(詩)', ‘노래시’라고 강조했고 또 스스로를 '가요시인', ‘노래시인’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노랫말 속에 문학성을 강조했던 인물이었다. '시와 술'로 ‘물레방아 청춘’을 살다 간 작사가 정두수(1937~2016), 그는 저서 ‘노래 따라 삼천리(2013년,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에서 이 노래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덕수궁 돌담길’의 노랫말을 쓴 것은 노래가 나오기 5년 전인 61년, 어느 봄날이었다. 퇴근길에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가 우연히 빗속에서 돌담에 기대 울고 있는 한 제대군인을 보게 되었다. 무슨 사연일까... 해서 집으로 돌아와 펜을 들고 글을 써내려갔다. 이렇게 써둔 시는 이후 고등학교 동창이자 부산MBC 전속가수였던 양병철에 의해 작사가 한산도씨에게 건네졌고 그 가사에 곡이 붙여져 나오게 된 것이 바로 ‘덕수궁 돌담길’이란 노래.”라고. 발표 이듬해 제1회 부산 국제신보사 제정, 작사상을 비롯해 당시 문화공보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와 전국예술인총연합회가 제정한 작사상을 수상했을 만큼 가요계 명곡으로 꼽힌다. 노래와 함께 탄생한 또 한 명의 스타가 이 곡을 작곡한 한산도씨다. 이미 그동안 작곡가 백영호씨와 콤비를 이뤄 ‘추억의 소야곡(남인수)’, ‘해운대 엘레지(손인호)’, ‘동백아가씨(이미자)’ 등, 작사가로 활동하던 그가 직접 작곡에까지 손을 댄 최초의 노래인 것이다. 한산도(본명 한철웅, 1931~1998)씨는 한때 한종명이란 예명으로 가수 활동을 하며 ‘하와이안 코리안 송’, ‘천리여정’ 등을 취입했던 인물. 때문에 그는 이 ‘덕수궁 돌담길’로 인해 명실공히 ‘작사, 작곡, 노래’라는 삼박자를 모두 갖춘 가요인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는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대로 앉을 수 없어 대부분 누워 지낼 정도로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가 1978년, 자신이 작사한 그동안의 노래 100여 곡이 사실은 작곡까지 자신이 한 것이라고 주장, 모 작곡가와 법정다툼까지 벌였던 일화 또한 유명하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 째 인물이 바로 목소리의 주인공, 가수 진송남씨다. 1962년 부산MBC 전속가수로 활동을 시작해 1965년에 개봉된 영화의 주제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한산도 작곡1집’의 타이틀곡인 ‘덕수궁 돌담길’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어 ‘한산도 작곡2집’에 수록된 ‘바보처럼 울었다’를 잇달아 히트시키며 톱 가수 대열에 합류한다. 제2의 고향, 부산에서 유년시절부터 키운 가수의 꿈 진송남(陳松男)은 1943년, 부친 진성용(陳性用)과 모친 손쇠(孫釗) 사이에서 2남5녀 중 장남으로 일본 구마모토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불리던 이름은 마쓰오(まつお, 松男). 3살 때 광복을 맞으면서 부산으로 건너와 유년시절을 보냈다. 유독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해 ‘신동’이라 불렸던 그가 본격적으로 가수의 꿈을 꾼 것도 이때부터다. “중2 때 혼자서 부산의 한 극장에 쇼를 보려갔었어요. 현인씨가 사회를 보고 송민도, 도미, 최갑석, 안다성씨 등이 출연해 단체로 무대 인사하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가수들이 한 명, 한 명 소개될 때마다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지요. 괜히 마구 설레고 흥분되기도 하고... 특히 최갑석씨가 부르는 ‘마도로스 순정’에 소름끼칠 정도로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날 집에 오자마자 팔뚝에 ‘가수’라는 글자를 볼펜으로 꾹꾹 눌러 새기기도 했었죠.” 해서 동아중학교 재학시절, 동창 친구 남정일과 함께 ‘울고 싶은 마음’의 작곡가, 강남주씨가 운영하던 ‘강남주 노래교실’에 등록, 매일 이곳을 드나들며 가수로의 꿈을 다졌다. “그때 배운 노래들이 ‘방앗간집 처녀(남백송 노래)’ 같은, 당시 인기 있던 유행가들이었어요. 학교 수업시간에 배우던 노래와는 확연히 달랐지요. 선생님께서 콩쿠르무대에 나가보라며 독려도 많이 해주시고... 그러나 그땐 너나없이 가난하던 시절이라 수강료를 더 이상 부모님께 받아낼 수가 없어 몇 달 후 접어야 했어요. 그때 얼마나 아쉬웠던지 거의 매일 노래교실 근처 자성대에 올라 마냥 서성대곤 했었죠.” 그가 말하는 남정일이라는 친구가 바로 ‘님과 함께(남진)’, ‘비 내리는 영동교(주현미)’의 작곡가 남국인씨다. 그 역시 작곡가로 활동하기 전 남정일이라는 본명으로 음반을 취입, 가수로 활동했다. 부산 성남초-동아중을 거쳐 수산고에 진학한 그는 가수 현철씨와 같은 반이었다. “1학년 때 소풍을 갔는데 강상수(현철의 본명)가 ‘방앗간 처녀(남백송)’를 불렀어요. 그때도 노래를 참 잘했는데 특히 당시 창법이 지금의 창법과 똑 같았던 게 유독 기억에 남아있어요”라며 허허, 웃는다. 무대에서 지나치게 긴장하는 스타일, 때때로 박자 놓치기도... 그는 점차 가수 등용문인 콩쿠르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부산MBC와 부산일보가 공통 주최한 콩쿠르에 참가, 2등으로 입상한 것이 그것. 부산 경남 지역에서 예선을 거친 지역별 우승자 17명의 대표가 최종 결선에 올랐는데 이때, 현재는 작곡가로 더 잘 알려진 정풍송씨가 밀양 대표, 그리고 진송남씨는 영도구 대표로 출전했다. 당시 심사위원이 작곡가 백영호씨와 작사가 천봉씨였다. 그렇듯 1959년에 개국한 부산MBC는 개국 초창기부터 신인가수 선발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100만원의 상금이 걸린 ‘직장대항가요대전'과 아마추어 가수들의 등용문인 '톱싱거(어)대회'는 부산MBC의 간판 프로그램. 이 공개방송에는 출연 신청자들이 줄을 이었을 정도로 참가 열기는 물론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로 항도 부산이 출렁거릴 정도였다. 그는 이 '직장대항가요대전'에 동산유지 팀으로 출전한다. 매주 서바이벌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주말, 월말대회를 거쳐 마지막 연말대회까지 세 팀이 오르는데 그가 조장을 맡은 ‘3인조 동산유지 팀’ 역시 최종 결선에 올랐다. 그러나 무대에서 지나치게 긴장하는 바람에 박자를 놓쳐 결국 3위에 그치고 말았다. 참고로 이때 1위 팀은 작사가 한산도의 동생 한무웅씨가 속한 병기기지 사령부팀, 2위는 남상규씨가 속한 공병기지 사령부팀이었다. 그렇듯 진송남씨는 예나지금이나 무대에서 지나칠 정도로 긴장한다고 털어놓는다. 물론 무대를 지나칠 정도로 소중하게 여겨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민간방송, 부산MBC 전속가수가 되다 1962년, 그는 부산MBC 전속가수 모집에 응시, 드디어 3기생으로 발탁된다. ‘만인의 라디오’ ‘자유로운 라디오’를 표방했던 부산MBC는 개국 초기부터 전속가수 제도를 실시했다. “때로 당시 중앙동 사옥 옥상에 있는 다섯 평 남짓한 전속가수실에서 숙식까지 해결했던, 말하자면 소속 가수라기보다는 한 가족이었어요. 실기는 물론 필기시험까지 매우 까다로웠죠. 애국가를 4절까지 악보로 그리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추억담도 많다. 특히 옥탑방과 피아노가 있었던 2백석 규모의 2층 공개홀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곳에서 펼쳐지던 공개방송에서 전속가수들은 자체적으로 만든 CM송을 합창하기도 했다. 또한 부산MBC가 제작한 드라마 주제가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이후 조용필 노래로 히트)’와 ‘수탉 같은 사나이(최희준)’도 전속가수 시절 진송남씨가 공개방송 무대에서 자주 불렀던 레파토리들이다. 이렇게 진송남씨는 62년부터 64년까지 햇수로 3년 간 전속가수로 활동했다. 특히 부산MBC의 간판 프로그램이자 아마추어 가수 등용문이었던 '톱싱거(어)대회'는 지금까지도 부산MBC의 저력을 보여준 공개방송으로 평가되는데 '가요 콩쿨(화)', ’가요대전(목)', ‘아마추어 스테이지/노래 흉내 콩쿨(금)'로 각각 요일마다 다르게 편성, 10년 이상 장수했던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신인 등용문을 통해 배출된 가수로는 남상규, 후랑크백, 캐리브룩, 문주란, 정훈희, 신행일, 설운도 등. 작곡가 임석호씨도 처음엔 아마추어 가수로 이 공개방송에 참가했다. 이때 전속가수들이 신청자들의 1차 예심을 봤다. 그중 진송남씨가 특히 기억하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톱싱거대회' 신청자 중 교복을 입은 앳띤 소녀가 왔어요. 너무 어려 ‘학생은 곤란하니 나중에 졸업하고 오라’고 돌려보냈죠. 어차피 어려서 방송은 불가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예심을 마치고 본선에 진출할 인원이 선정됐는데, 이때 한 청년이 다가와 방금 그 여학생의 오빠라며 노래를 한번만 들어봐달라고 사정을 해요. 해서 마지못해 노래를 시켰지요” “도저히 10대 소녀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저음의 허스키보이스가 자그마한 몸집에서 울려나왔어요. 모두들 깜짝 놀랐죠. 그래서 부랴부랴 이미 선정된 다른 사람을 다음 주에 꼭 출연시켜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자리에 대신 이 여학생을 끼워 넣었죠.” 결국 이 10대 소녀는 주말 장원을 거쳐, 월말대회, 연말 최종결선까지 올라 ‘보고 싶은 얼굴(현미 노래)’을 부르며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 소녀가 바로 문필연, 즉 우리나라 여가수 중 가장 낮은 최저음을 구사한다는 문주란씨다. 특히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듯 저음으로 구사하는 음색이 아주 매력적이었다고 진송남씨는 기억했다.
1964년, 그는 작곡가 백영호씨의 제의로 부산MBC전속가수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긴다. 이 무렵 백영호씨는 ‘동백아가씨(이미자)’의 빅히트로 상종가를 달리던 때였고 밀려드는 신곡 요청 쇄도에 더 많은 가수가 필요하던 시기였다. 서울로 무대를 옮긴 진송남씨의 첫 취입곡은 ‘유랑항구’, 그리고 ’서울의 춘희’라는 노래에 이어 발표한 영화주제가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진송남이라는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린 첫 히트곡이다. 이 노래는 처음 부산에서 활동하던 가수 후랑크백이 먼저 취입했던 노래였다. 그러나 영화사 측에서 노래가 너무 밋밋하다며 보다 남성적으로 개작해줄 것을 요구해왔다. 해서 노래 몇 소절을 바꾼 뒤 재취입하려는데 하필 이 노래를 부를 가수 후랑크백이 지방공연 중이었다. 해서 “이 노래를 남일해를 줄까, 김상국을 줄까...” 백영호씨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옆에서 들은 진송남씨가 ‘내가 부르겠다’며 자청하고 나섰다. 진송남씨는 이 영화에도 직접 출연한다. 주인공 독고성이 암흑가의 사람들과 모의하던 아지트인 명동의 ‘홍콩바’ 무대에 올라 주제가를 부르는 씬. 워낙 잠깐 등장했기 때문에 스크린에 비친 아들의 모습을 보기위해 부산극장을 찾은 진송남씨 부친은, 결국 이 영화를 두, 세 번 봤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히트를 계기로 그는 당시 최고의 메이저 회사였던 지구레코드사에 전속된다. 이후 전성기 시절 내내 오로지 지구에서만 활동하며 당시 최고 히트메이커였던 작곡가 백영호, 박춘석, 한산도, 김영광, 그리고 손석우 선생 등과 손잡고 많은 노래들을 발표했다. (당시 취입곡들에 대한내용은 다음 호 글에서 보다 상세히 기술하고자 한다.) 영화주제가 또한 많이 불렀다. 첫 히트곡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비롯해 ‘밤하늘의 블루스’, ‘보은의 기적’, ‘3등 사장’, ‘허공에 진 청춘’ 등의 노래들이 바로 그가 부른 영화주제가들. ‘덕수궁 돌담길’과 ‘바보처럼 울었다’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인기 절정의 청춘스타였던 그 역시 국방의 의무를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 그래서 지원한 곳이 해병대 연예대다. 해병대 연예대에 입대한 청춘 스타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해병대 인사국으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얼마 전 가수 남진이 해병대 연예대에 입대하기로 선서했으니 진송남씨도 같이 입대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는 내용의 전화였다. “워낙 집요하게 설득해오는 바람에 결국 입대 선서를 했어요. 그때 가수 박일남, 태원씨도 함께 해병대 연예대에 들어갔죠.” 이로써 남진은 204기, 그리고 진송남 외 두 명은 205기 기수로 해병대 연예대에 입대했다. 그렇듯 당시 남진은 가수 겸 영화배우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청춘스타였고 박일남 또한 ‘엽서 한 장’과 ‘갈대의 순정’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인기가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태원 역시 리나박과 함께 부른 ‘남매’에 이어 ‘가을의 연인’으로 상종가, 진송남 또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스타였다. 이들은 군 복무도 하고 가수활동도 병행할 수 있는 길을 택해 해병대 연예대에 입대선서를 한다. 당시 특유의 얼룩무늬 군복에 빨간 명찰을 한 제복의 진송남씨의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도 많을 것이다. 그는 해병대 연예대원으로 위문공연과 더불어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 ‘아내여 미안하다’, 그리고 영화주제가 ‘푸른 하늘에 침을 뱉어라’ 등을 취입하며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나 얼마 뒤 전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뉴스가 보도된다. 가수 진송남을 비롯해 남진, 태원, 박일남 등이 월남에 파병된다는 것. 정작 당사자들은 전혀 몰랐던 이러한 뉴스가 보도되는 시각에 진송남은 미도파백화점에서 위키리의 사회로 진행되던 기독교방송(KY)의 생방송 ‘정오의 희망음악’에 출연 차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5분 뉴스를 통해 이러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8일 군 당국에 의하면 지난 4월 해병대 등 군에 입대한 가수 남진, 박일남, 태원, 진송남을 비롯 10여명의 가수들이 영내복무를 하지 않고 자택에서 기거하며 공공연히 TV·영화·쇼 무대에 출연, 영리행위를 하고 있다.”라며 “이들 연예대원 10명 전원을 월남 청룡부대로 전속키로 했다...”는 내용. 이 날벼락 같은 뉴스에 가장 놀란 것은 정작 진송남씨 자신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공개방송을 마치고 나오는데 문 앞에 백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남진씨 또한 서울역 부근 새서울극장에서 ‘남진쇼’를 한창 공연하고 있던 중이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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