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6장 1-30절
찬송가 394장 ‘이 세상의 친구들’
오늘의 본문과 내일의 본문인 욥기 6-7장은 엘리바스가 4-5장에서 욥을 정죄하는 것에 대한 욥의 반론이자 하소연인데, 오늘은 앞부분인 6장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말했던 내용을 잘 요약한 말씀이 있습니다. 4:7-8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또한 5:8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엘리바스가 욥에게 말하려고 하는 내용을 두 한자성어로 말씀드리면,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그렇게 많던 네 재산이 어떻게 그렇게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었겠냐? 네 범죄함 때문이겠지!”, “네 아들딸들이 한날한시에 죽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어? 네가 하나님께 매일 번제를 드린다고 했지만,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네가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만한 뭔가를 뿌렸기 때문이겠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도 있고,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하지만 욥이 그런 일을 겪었던 것은 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엘리바스가 욥을 행해 갖고 있었던 잣대는 “내가 보건대...”와 “나라면...”입니다. 하나님을 반복해서 운운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의 생각이었습니다. 엘리바스의 주장 이면에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틀린 생각을 옳다고 생각하는 엉터리 신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서점에는 다양한 종류의 성공서적들이 있습니다. ‘투자는 이렇게 해야 한다.’, ‘사업은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직장에서 성공하려면 이러해야 한다.’, ‘자녀교육은 이렇게 해야 성공한다.’ 등등의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에서 말하는 방법대로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내용이 보편적으로는 맞는 말일지라도, 그 책을 읽는 사람에게 100% 적용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마다 살아가는 환경이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사람들을 다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맞는 것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욥의 고난이 인과응보라는 엘리바스의 지적에 욥이 입을 열었습니다. 본문 2-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의 무게를 ‘바다의 모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숫자를 세는 단위를 어디까지 아십니까? 저는 ‘경(京)’ 정도까지 압니다. 만의 만 배는 ‘억(億)’입니다. 억의 만 배가 ‘조(兆)’입니다. 억의 억 배가 ‘경(京)’입니다. ‘억’은 동그라미가 8개이고, 조는 12개, 경은 16개입니다. 올해 2018년 우리나라 예산이 430조원정도이니, 1경이면 우리나라의 23년 예산이 됩니다.
숫자를 표현하는 말 중에 ‘항하사(恒河沙)’가 있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인도 겐지스강의 모래 숫자’입니다. 항하사는 동그라미가 무려 52개입니다. 우리의 상상 밖의 숫자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이 지금 눌리고 있는 것이 겐지스강의 모래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 바다의 모래라고 합니다. 그만큼 무겁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 무거움을 4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욥이 정말로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이유는 자신의 모든 재산이 한 순간에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10명의 자녀를 한꺼번에 잃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몸에 악성종양이 가득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전능하신 분, 하나님의 화살이 자신에게 박혔고, 그 화살에 독이 있어서 그 독이 자신의 영혼을 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두려움이 자신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두려움’, 이것이 욥이 당하는 고난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말이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단절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음식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고, 냄새도 맡기 싫기에 먹고 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로 힘들지만 자신이 버티는 이유를 10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지금 자신이 겪는 고난과 고통이 하나님께 잘못했기 때문이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여기기에 버티고 있다고 합니다.
14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전능하신 분을 경외하든 말든, 내가 이러한 절망 속에서 허덕일 때야말로, 친구가 필요한데,”
서양 속담에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다(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말이 있습니다. 욥은 지금이 정말 친구가 필요할 때인데, 친구들이 그 역할을 해주지 않음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의 누군가의 따뜻한 한마디, 밥 한 그릇은 그를 평생 잊지 못하게 하는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하지만 욥의 친구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물이 흐르는 개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들은 메마른 땅이었습니다. 중동에는 우기(雨期)에는 시내가 되고, 건기(乾期)에는 마른 땅이 되는 곳이 많습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우기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친구들은 바짝 마른 건기였습니다.
욥의 말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21-23절입니다.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욥은 반어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내 흉한 몰골을 보니 나도 저렇게 되는 것 아닌가 하고 겁을 내고 있지? 나는 너희들에게 도와달라고 말한 적도 없고, 재산을 떼어서라도 살려달라고 말한 적도 없고,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한 적도 없고, 폭군의 세력으로부터 빼내 달라고 말한 적도 없네.”
이 말의 속뜻은 이러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 같이 보이면, 너희들이 나를 좀 위로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 원인과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난 후에 필요한 것입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위로와 격려, 함께함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28-30절입니다.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나도 내가 무엇을 잘 못했는지 모르겠으니, 나를 도와들 주시게. 나는 내가 혀를 막 놀려서 분별없이 떠든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나도 왜 내가 이런 고난 속에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네.”라며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권선징악을 행하시는 분으로만 이해하는 엘리바스가 자기 생각으로 평가해서 욥이 고난 속에 있는 것은 인과응보의 결과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한, 아무리 논리적으로, 아무리 포장해서 말할지라도 욥에게는 흉기로만 다가옵니다. 엘리바스가 잘 정리해서 말할수록, 또 더 포장을 잘해서 말할수록 욥에게는 비수(匕首)로 다가오기만 하고 결코 도움이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셋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자신의 종교관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떤 평가를 하든 그 모든 것은 틀린 것이었고, 주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도, 우리 같이 아니 나 같이 형편없는 사람을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욥이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이 겪는 고난이 하나님이 쏘신 화살을 맞고서 하나님의 두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욥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욥을 사랑하시는 한, 그는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려가고 있습니다.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볼 때, 변방 출신에 불과한 사도 바울이 낙향의 지도, 고달픔의 지도를 그리며 사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를 그리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핏값을 지불하시고 사도 바울을 되사셨기 때문입니다.
욥을 사랑하시고, 사도 바울을 인도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 어떤 모양의 인생지도를 그리든지, 우리가 주님께 붙들려 있는 한, 그 지도는 주님께서 우리를 도구삼아 그리신 은혜와 섭리의 지도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으신 곳에서, 주님을 목적 삼고 살아가시는 은총의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모든 자녀를 잃고, 온 몸에 악성종양으로 고난을 겪는 욥에게 친구들이 찾아와 일주일동안 함께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의 위로는 거기까지였습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만으로 욥을 정죄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욥이 아무리 고난과 고통의 지도만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욥을 사랑하시기에 그 과정도 은총과 섭리의 지도를 그리고 있는 것임을 압니다. 우리의 삶에 문제처럼 보이는 크고 작은 일이 있더라도, 오직 주님만을 목적삼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나아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한, 우리가 어떤 삶의 과정을 겪게 되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그려 가시는 은혜와 섭리의 지도가 됨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손과 발로 그 지도를 그려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