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燕山君)의 후궁 장녹수(張綠水)를 조명하며-(2) 부각되는 그녀의 악행
연산군은 단종 이후 처음으로 궁궐에서 태어난 원자였다. 준비된 제왕으로서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 재능이 있었고 효성도 지극했다. 그는 즉위 초기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심을 바로잡고 과거를 열어 인재를 등용하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선보였다. 연산군 대의 대표적인 사화로 일컬어지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강력한 왕권을 지향했던 연산군과 사림을 축출하려던 훈구세력, 앞의 두 세력을 견제하고 통제하려 했던 사림파성균관 갑자사화의 와중이었던 1504년(연산군 10) 4월 25일, 장녹수의 본가 담벼락에 한 여인이 익명서를 붙인 다음 노비 돌동에게 ‘이 글은 대궐과 관계있으니 떼어 가라’고 말했다. 당시 이극균, 이세좌, 윤필상 등을 불경죄로 치죄하던 연산군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신을 적대시하는 궁인들의 소행이라고 판단했다. 얼마 뒤 과연 궁인 전향과 수근비 등이 잡혀오자 연산군은 두 사람을 귀양 보냈다가 능지처참한 뒤 수급을 궁중에 효수했다. 이는 분명히 갑자사화에 관련된 사건인데 사관은 아름다운 두 여인을 시기한 장녹수의 참소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505년(연산군 11년)에는 12월 운평 옥지화가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군기시 앞에서 참형을 당했고, 그 머리를 취홍원과 뇌영원에 돌려 보인 다음 연방원에 효시했다. 운평을 우대하던 연산군이 이처럼 지독한 조치를 취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사관으로서는 연산군의 광태를 부각시키면서 장녹수의 권력 남용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때 장녹수는 관리들의 청탁을 들어주거나 나라의 선박을 이용해 평안도의 미곡을 무역하여 재물을 모았을 뿐이다. 연산군 말년에 정3품 당상관에 임명된 형부 외에는 쓸 만한 친척도 없어서 정사에는 관여하지도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폭군에게는 간사한 신하와 요사스런 여인이 필수적인데 연산군에게는 임사홍 당시 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는 장녹수 외에도 후궁 전전비나 김귀비 등이 있었다. 그런데 사관은 오로지 장녹수만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비천한 창기 출신의 후궁이 득세하는 꼴이 그들에게는 눈 뜨고 보지 못할 참사였기 때문일까. 인생은 풀잎 이슬과 같으니 두 차례의 사화를 통해 절대왕권을 확보한 연산군은 자신의 치세가 태평성대임을 확신하면서 혁신적인 통치를 시도했다. 북경에서 나귀를 사와 번식시키게 하는 한편, 민간에 사라능단 직조법을 널리 알리게 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다. 아울러 사대부들의 장례식에 조상 기간을 하루로 한 달을 갈음하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를 시행하고, 그 기간에는 육식을 허용하는 획기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는 성균관 유생과 사학의 유생을 규찰하여 성종 이래 사치와 방만을 일삼던 양반사회를 견제했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비어 있는 성균관에서 소혜왕후를 위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는 유교의 성지를 더럽혔다는 빌미가 되었다. 1506년(연산군 12년) 8월에는 자신에게 정무를 보고할 때 영의정이라도 존칭을 빼게 했으며, 공자에게 올릴 작헌례를 시행할 때는 그의 직분이 신하라 하여 재배만 하게 했다. 그처럼 연산군은 유교의 복잡한 의례를 배격하고 간소하고 실질적인 의례를 권장했다. 한데 이런 정책은 유학을 신봉하던 사대부들에게 국가 정체성을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유림을 중심으로 반정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1505년(연산군 11년) 정초에는 그를 폭군으로 규정하며 정변을 선동하는 종루벽서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연산군은 유배 중이던 사림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고, 반정 두 달 전인 1506년(연산군 12년) 7월 17일 풍류와 색보다는 간신들이 나라를 망친다며 대신들이 자신의 정책에 적극 협력할 것을 강요했다. 당시 그는 귀양지에 있는 인사들만 의심했을 뿐 곁에서 아부를 일삼던 신료들의 변심을 알지 못했다. 그 무렵 딸 영수와 두 아들의 어머니였던 장녹수는 다른 후궁들과 함께 연산군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녀는 재위 내내 고독했던 연산군의 의중을 헤아리고 깊이 이해해 줌으로써 마음의 피난처 역할을 했던 영리한 여인이었다. 그해 8월 23일, 후원에서 풀피리를 불던 연산군은 문득 ‘인생은 풀잎 이슬과도 같아서, 우리 만날 날이 많지 않구나.’라고 탄식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장녹수와 전전비가 눈물을 머금었다. 이는 총애하는 여인들과 태평성대를 오래 누리지 못함을 애석해하는 제스처였지만 실록의 사관은 그가 곧 파국을 예감한 것처럼 그려놓았다. 운명의 9월 2일 드디어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반란의 핵심 세력은 두 차례의 사화로 원한을 품은 사림이 아니라 어제까지 충성을 다짐하던 조정 신료들이었다. 그들은 사림세력이 거사를 결행하면 제일 먼저 숙청될 인물들이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되자 낙심한 연산군은 저항을 포기했다. 이윽고 대궐을 장악한 반군들은 연산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한 다음, 장녹수와 전전비, 김귀비 등을 군기시(軍器寺) 앞으로 끌고 가 참형에 처했다. 그들의 선동에 흥분한 백성들은 그녀의 시체에 돌멩이를 던졌다. 비천한 기생에서 정3품 소용(昭容)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장녹수의 성공신화는 그렇듯 비극적인 최후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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