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491번지에서 부 나기정과 모 최시의 5남매 중 넷째로, 딸로는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1862년 5월 20일 태어났다. 1900년 7월 경기관찰부 주사에 임명됐으며, 1904년 12월에는 원소도감위원을 맡았다. 1906년 10월부터 경기관찰도 주사로 근무하다 1909년 3월 경기관찰도 ‘시흥군수’로 승진했다. 합병후, 1910년 10월 경기도 ‘시흥군수’에 유임되었다. 이어1912년 3월 경기도 용인군수로 부임해 1914년 2월까지 재직했다.
부농이며 고위층이라 시대유행따라 자녀들에게 일본 유학 등으로 신교육을 받게하는 개화된 사람이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장녀 나계석을 제외한 4남매가 모두 신식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혜석은 태어난곳에서 서북 빤히 보이고 수원천 매향교를 건너 북으로 한부럭 지나 도보로 500여m 거리인 삼일여학교를 1910년 3월 24일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한다. 박충애(박승호),차우르다, 홍보배(1896생)등 4 명이었다. 삼일여학당은 1902년6월 미국북감리교 여선교회의 선교사인 스크랜턴(M. F. Scranton)에 의하여 3 명으로 기숙사가 아닌 매일 등교하는 학교로 개교하였다. 김명례의 딸인 박충애는 이하학당을졸업하교 교원으로 일하다, 요코하마 여자신학교 유학후 평양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봐 있다. 홍보배는 수원의 명문가인 남양 홍씨이고, 차우르다는 연안 차씨가의 딸로, 수원지역 유지의 딸들이 삼일여학당에 입학하고 졸업했는 것은 당시 수원 여성교육에서 삼일여학교가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다. 삼일여학교는 1914년 교장 밀러의 노력으로 매향동에 적벽돌로 근대식 건축을 하고 학교를 이전한다.
1914년 서울 진명역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나혜석은 오빠인 나경석의 권유에 따라 도쿄로 유학한다. 나혜석은 어려서부터 영리한데다 손재주가 있어 틈만나면 종이에 노는 아이들이나 다듬이질하는여인, 밭 가는 농부들을 스케치했는데 그 솜씨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오빠경석은 형제중에서 재기발랄한 나혜석을 귀여워해서, 아버지를 설득하여 일본여자미술학교로 유학하도록 도왔다.
도쿄의 조선잉 유학생 숫자도 적은데다, 특히 여학생은 매우 드물던 때였다. 당시 일번에 유학생이 모인 자리에서는 나혜석의 이야기뿐이었으며, 조선인 유핫생들이 잘 다니는 길가 담장에는 “장차 내 아내는 나혜석” 이라는 낙서가 있을 정도였다고한다, 더구나 혜석은 학교설적이 일본여학생보다 앞서는 우수한 학생인데다가, 교외 자연풍경을 배경으로 조용히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그림을 초월 한 한 폭을 상기시켰다고 한다. 상기내용은 과장된 감이있다. 그저 보통으로 수수한편인데 여학생이 적으니 그러한것 같다. 참고글 수원시사 수원여성의생활과 정체성238~239p 원문유학이야기 김은주 류현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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