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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3차 서리풀공원 산책기
[산행기 2005~2020]/정기산행기(2013)
2013-07-23 12:17:21
아래 산행기는 허허도사(최거훈)께서 쓴 글입니다...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30회동기회 다음카페에서 작성한 글을 카피하여 올리다 보니 9공대장이 쓴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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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무덥고 빗방울이 예상되는 날에는 굳이 먼 곳에 힘들게 다녀오기보다는 가깝고 나지막한 곳을 골라 가볍게 산책하는 기분으로 다녀오는 것도 괜찮을 법하다. 더욱이 산행대장을 구하지 못하는 9공대장의 애절한(?) 요청에 의해 땜빵대장 되기를 자처한 마당인지라 동네뒷산에 유유히 갔다 오는 것도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산행지라기 보다는 산책지라는 표현이 오히려 적절할 것으로 보이는 곳을 택하였으니, 그 이름 일명 ‘몽마르뜨 언덕’이다. 더운 여름날, 비용들이지 않고 비행기 탈 필요도 없이, 몽마르뜨 언덕을 다녀오겠다는 것이니 과히 나쁠 게 없다.
게시판을 통한 산행 신청자가 산행대장을 포함하여 4명이었다가 막판에 모씨가 산행참석을 못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던 터라 합이 셋, 아니면 넷, 잘하면 다섯이라는 추정을 하고 집을 막 나서려는 순간 어김없이 경고 30회의 마지막 타자 권택* 선수가 전화하여 동참의사를 밝힌다. 모임에 권선수가 참석하면 이제 그날의 모임엔 모두 참석한 것이 되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권 선수 맞나?
만남장소인 고속터미널 역 3번 출구에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9공대장이 출구 앞에 설치된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곧 이어 참석의사를 밝힌 바 있는 모 인사(이 인사는 나와 같은 중학교 출신이다)가 전화하여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모두 모였으면 지 있는 곳으로 건너오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으나 씰데 없는 말 그만하고 일단 약속장소로 오라는 취지의 말을 전한다.
그리하여 3명이 3번 출구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출발준비를 하고 있는데, 모 인사 휴대폰 벨이 울리고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권 선수가 내게 전화하였으나 받지 않으니 모 인사에게 전화한 모양이다. 강남성모병원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려고 하는듯하다. 건너오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고서 육교처럼 생긴 다리를 건너가려고 하니 권선수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방향을 권 선수 오던 방향으로 돌려 네 명이 다리를 건넌다. 권 선수 왈, “오늘은 2대 2, 남중 두 명 대 대신 중 두 명.” 좋다 한 판 붙자. 2:2로.
다리를 건너니 이내 ‘서리풀 공원’ 입구다. 산책 안내판 표지를 읽고, 표지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컷하고서 막 출발하려고 하니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 갑자기 나타난다. 분당의 모 도사가 신출귀몰하게 나타난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데다가 서초지역 지리에 대해선 잘 모를 인사라는 생각에 어떻게 우리 일행을 찾았는지 신기해하였더니 멀리서 권 선수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있기에 찾아 왔다는 것이다. 이 인사의 참여로 오늘 2: 2 한판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이 인사는 영남에서 제일 좋은 중학교는 아니지만, 적어도 울산에서는 제일 좋은 중학교인 ‘울산제일중학교’ 출신인 정진수로, 윤인태 원장 한 해 선배다. 인태야 선배님 잘 모셔라.
아파트 이름이 유행처럼 외래어 형태로 바뀌고 있다. 그래야 멋있게 보이고 돈이 되나? 우야든동 그것이 대세니, 서리풀 공원 입구에 있는 ‘반포미도아파트’도 어느새 이름이 ‘센트럴 힐 아파트’로 바뀌어 있다. 한때 나는 ‘반포미도아파트’에 산 적이 있고, 소위 미도 뒷산이라 불리던 ‘서리풀 공원’(아파트 쪽에 위치한 부분)을 자주 찾은 적이 있다. 미도 뒷산에서 서초동 법원 쪽으로 사법연수원(지금은 아님)이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서 나로서는 익숙한 곳이다.
미도 뒷산을 따라 조금 걸으니 이내 도로를 오버브리지 형태로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타난다. 이름하여 ‘누에다리’다. 미도 뒷산과 건너편 몽마르뜨 공원은 대로로 나뉘어져 있다. 미도아파트 및 강남성모병원 쪽과 건너편 중앙도서관 및 서초경찰서가 큰 도로로 나뉘어져 있어, 산행을 하는 사람은 계속 산행하자면 도로를 횡단하여야 하는데, ‘누에다리’가 없으면 일단 도로 쪽으로 내려가 횡단보도를 따라 보행신호에 맞춰 길을 건너야 하므로 불편했다. 그래서 ‘누에다리’ 설치가 필요하였고, 구민들의 요청에 의해 박성중 청장 시절에 설치된 것으로 안다.
왜 이름을 굳이 ‘누에다리’라고 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 지역이 양잠과 관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가 이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고 잠실리로 불리어졌는데, 서울로 편입되면서 송파구에 이미 잠실동이 있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이 일대 일부를 잠원동이라고 칭하였다. 잠원동 및 인근 지역이 누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거기서 ‘누에’다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누에다리’ 앞에서 또 한 컷하고 다리를 건너니, 정 도사가 울산에서 제일 좋은 중학교 출신답게 한마디 한다. “야, 다리 밑이 경부고속도로가?” 이에 부산에서 그래도 삼백선(부산중학교는 일백선, 경남중학교는 쌍백선, 남중은 삼백선) 출신이라고 폼을 잡는 모 인사가 “무슨 소리 하노? 이게 우째 고속도로고? 고속도로는 저 쪽이다.” 서울에서 제법 오래 살았다고 데기 폼을 잡는다.
누에다리를 지나니 짠! ‘몽마르뜨’가 나타난다. ‘몽마르뜨 공원’. 인근 서래마을에 서울프랑스학교가 있고 프랑스 사람들이 다수 살고 있어 공원이름까지 몽마르뜨 공원이라고 칭하고 있다. 얼마 전에 이 일대에서 프랑스 사람들을 중심으로 동네축제도 벌어졌다. 문화와 놀이 한마당이 펼쳐지고 양국의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래그래 살면서 이국인들은 향수를 달래고 내국인들은 이국의 향취를 즐긴다.
몽마르뜨 공원에는 토끼가 뛰놀고 있다. 당국에서 토끼를 방목하여 그곳을 찾는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토끼를 보고 있는 순간 갑자기 후두둑 비가 내린다. 네 명은 우산을 준비해 와서 우산을 쓰나 나는 우산이 없는지라 권 박이 소지하고 있던 판쵸를 건네받아 이를 둘러쓴다.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비가 그치자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몽마르뜨 공원이 끝나면서 소로를 다리로 가로질러 건너편 공원으로 몸을 옮긴다. 다리 바로 옆에는 한정식집으로 유명한 ‘용수산’이 자리 잡고 있다. 몇 개의 체인을 가진 음식점으로, 그중 이곳 음식점이 특히 괜찮다는 말이 있다. 건물 주인이 가수 나미라던가?
할아버지 쉼터를 지나 계속 걸으니 정보사가 나타나고 어느덧 청권사 입구가 가까워진다. 권 박과 남중출신 모 인사는 계속하여 막걸리 한잔 먹고 가자고 재촉한다. 모 인사는 중간중간 청권사가 어쩌구저쩌구, 방배동에는 맛있는 집이 많다는 둥하면서 청권사로 내려가 효령대군 사당을 둘러보고 인근 맛있는 닭 집으로 가자고 닦달이다. 듣는 척 못 듣는 척 하면서 계속 걸으니 마침내 반환점에 도달하였다. 청권사 입구 쉼터에 도착한 것이다. 벤치에 앉아 모 인사가 준비해 온 다시멸치를 안주삼아 막걸리 한 병을 비우니 기분이 삼삼하다.
청권사 운운하는 모 인사와 그에 동조하는 권 박의 요청을 멀리하고 훗날 청권사 방문을 기약하면서 발걸음을 오던 곳으로 되돌린다. 계속 옆으로 새려는 권 박,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로 향하는 산행대장, 정 도사의 가족사 이야기 등등으로 1시간을 보내자 어느 새 옛 사법연수원 옆길에 도착했다. 잠시 목욕탕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목욕은 포기하고 점심 먹을 곳을 찾았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모 인사가 전에 간 바 있는 삼겹살집으로 가자고 하기에 그 곳도 좋지만 수입쇠고기집도 괜찮다고 제안하여 결국 쇠고기집으로 갔다. 식당 지하로 내려가서 자리를 잡으니 권 박은 입이 툭 튀어 나와 있다. 모 인사가 씰데 없이 돼지고기 집 운운하는 바람에 수입 쇠고기 집에 오게 되었다는 것으로, 수입쇠고기 먹으러 온 것에 불만이 상당하였다. 괜찮은 곳이니 한번 먹어보라고 하면서 고기를 주문하였더니 갖고 온 고기에 별 불만이 없는 듯했고 이내 불만이 풀리는 듯했다.
산행시간이 짧고 도시락도 준비하지 않던 터라 점심식사시간이 걸쭉해진다. 남중과 대신중 2:2가 아니라 남중과 대신중 1:1로 권 박과 모 인사 간에 논쟁이 한창이다. 토론이 아니라 그야말로 논쟁이다. 반쯤 싸움 수준이다. 한잔 먹어가면서 떠들어제끼니 서로지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한참 펼쳐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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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지난 250차 산행기념 행사 때 있은 일을 언급해본다. 늦은 저녁식사 및 술자리를 하면서, 전차, 버스, 라면 등 대중교통과 대중음식에 대한 수준 높은 대중적 논쟁이 있었다. 그중 압권은 단연 버스였다. 중학교 시절, 입석버스 외에 좌석버스가 있었는지 여부와 그 요금이 얼마였냐는 것이 쟁점이었다. 온갖 설이 난무하였다. 바야흐로 춘추전국시대, 백가쟁명식 논쟁이었다.
논쟁 끝에 인터넷으로 사실여부를 확인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요사이 씰데 없이 우기다가 인터넷으로 확인하여 들통이 나면 헛소리한 사람은 쪽팔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버스요금표를 두드려보니 1978년인가 그 이후 것만 나오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중학교 시절 버스요금에 대하여는 나오지 않는다. 중학교 학번으로 따지면 나는 70학번, 동기들 중에는 조금 빨라 69, 68, 나아가 67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1970년 전후 내지 초반에 부산의 경우, 입석버스 외에 좌석버스도 있었는지, 그 요금은 얼마였는지가 쟁점이었다.
나는 당시 입석버스 외에 좌석버스도 있었고, 입석은 6원, 좌석은 15원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좌석버스는 없었다는 주장, 입석버스 요금이 5원이라는 주장, 10원이라는 주장 등 각양각색의 주장이 있었던 것이다. 말만 잘하면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법조인의 입장, 특히 변호사 입장에서 보면 말만 잘하면 승소할 수 있고 사례금도 받을 수 있다. 소송에서 이기려면 법원(재판장)을 설득하여야 하고, 그럴만한 논리와 입증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재판장이 아무리 변호인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변호인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을 제시해야 한다. 상대의 급소, 사건의 급소를 내리치는 것이 필요하다. 달리 길이 없게 만들면 내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위 논쟁의 경우, 그 자리에서 내가 취한 방식은 이러했다. 일단 중학교 때 버스타고 통학하지 않은 선수들은 잠시 빠져주라는 것이었다. 중학 3년 동안 버스를 타고 통학한 선수하고, 걸어서 통학한 선수와는 위 논쟁에서 쨉이 안된다고 보는 것이 맞다. 대신중학교를 나온 김부종 선수는 집이 경남학원 근처, 대신동이라 걸어서 등,하교 하였고, 따라서 영도까지 버스타고 통학한 나와 같은 선수에게는 대중버스에 대한 경험과 지식에 있어서는 비할 바 못된다. 김부종 선수는 아마도 버스비가 5원이라고 주장하였던 것 같은데, 위와 같은 논리로 접근하니 한발 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진실여부는 뒤로하고 일단 진실접근에 대한 가능성에 있어서는 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좌석버스가 있었는지, 입석버스의 요금이 얼마인지에 대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선수도 당연히 빠져야 한다. 그러면 몇 남지 않는 선수들 간에 그 주장의 승부를 가릴 수밖에 없는 터인데, 그렇다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내세운 것은 ‘10번’ 버스의 예이다. 10번 버스는 국제여객 소속 버스로, 지금도 국제여객 10번 버스가 있는데, 노선은 예전과 같지 않다. 당시 10번 버스는 영도 전차종점 인근에 있는 남중 앞의 ‘항도서점’ 앞 버스정류장에 섰다. ‘국제여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10번 버스는 ‘국제시장’을 통과했다. 그래서 국제시장 근처에 사는 동광, 남일초등학교 출신 남중생들이 그 버스를 많이 이용했다.
10번 버스는 좌석버스로 요금이 15원이었다. 그래서 애들이 버스정류장에서 오른손 둘째손가락으로 1자를 표시하거나 왼손 둘째손가락으로 1을 표시하고 오른손 엄지와 둘째손가락으로 원을 그려 ‘0’을 표시하면, 버스안내양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었다. 15원짜리를 10원에 하자고 청약을 하면 당시만 해도 상당한 권한이 있던 안내양이 고개를 끄덕여 승낙하면 10원이라는 요금으로 운임계약이 체결되는 것이고, 가로저으면 승낙하지 않아 계약이 성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좌석버스라 요금이 비쌌던 탓으로 버스에 손님이 많이 타지 않은 경우가 많아 10원짜리 버스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나의 기억은 정확하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주장일 뿐 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10번 버스의 예를 위와 같이 들면서 내 주장을 펼쳐가노라면 나의 주장을 엉터리라고 하면서 배척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나의 위 주장만으로 나의 주장이 100% 맞다고 결론나지 않을 수 있겠으나, 상당히 믿을만하다는 정도는 될 것으로, 굳이 필요하다면 당시의 사정을 뚜렷이 기억하는 중학교 친구들 2-3명을 증인으로 내세워 입증한다면 아마도 내 손을 들어줄 것이다.
기념일 때 또 하나 논쟁거리는 경남고 재학 시 학교식당 국 값이 얼마였나는 것이었다. 참 할 일 없는 사람들의 논쟁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술도 한잔 하면서 과거로의 여행을 하며, 하나 같이 같은 경험을 한 자들의 모임이었는지라, 논쟁은 제법 진지했었다. 5원, 10원, 15원, 20원, 모르겠다 등등 주장은 다양했다.
다양한 주장을 비집고 나는 내 주장을 한마디 했다. 10원에서 15원으로 가격변동. 고게 무슨 소린동? 당초 10원 하던 것이 15원으로 인상되었다는 주장이었다. 그럼 니 말이 맞다는 근거가 뭐냐가 문제될 수밖에 없다. 설득력 있는 근거제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제시한 것은 당시 내가 어린이회장으로서 식당 측과 국 값 인상에 대해 투쟁 및 타협했다는 점이었다. 거의 대부분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선 모를 것이고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근데 내가 회장이 되고 난 다음 식당 측에서 제반사정상 국 값을 10원에서 15원으로 올릴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하였다.
여러분들! 생각이 날지 모르겠으나 당시 식당에 들어서면 안쪽으로 우측에서 국물 배급 내지 우동 판매를 하였고, 왼쪽에서 빵, 음료수 등을 팔았다. 말하자면 우측은 식당이고, 좌측은 매점이었던 셈이다. 우측에서는 주로 주인 할배가, 좌측에선 그 아들(아마도 장남)이, 판매를 하였다.
점심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녁은, 특히 추운 겨울날 저녁에 찬 도시락에 콩나물국을 사서 말아먹어야 하는 우리들 입장에서는 국이 아주 중요했다. 따라서 국 값 인상은 상당히 중요한 이슈였다. 갑자기 물경 50% 인상을 하겠다는 것이니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식당 측과 논의했다. 택도 없이 국 값을 올리겠다면 나는 학생들 모두를 (선동하여) 국뿐만 아니라 식당 음식, 빵 등 일체에 대하여 불매운동에 돌입하겠다고 엄포하였다. 그런데 식당 주인아저씨나 아들 등이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고 상당히 유순한 편이었다. 그들은 나의 엄포에 당혹스러워했고 황당해하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50% 인상이 어거지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도 어거지만을 지을 일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타협하였다. 값은 인상하되 질도 확실히 높여라. 학생들이 국으로 영양을 보충해야 하는데, 식당에서 값을 올리는 만큼 질도 높여 학생들의 건강과 공부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해라고 요구하였다. 식당 측에서 나의 요구를 쾌히 수락하였고, 이에 나와 식당측은 상생의 길을 택했다. 5원 인상이 되었지만 그 후로 국의 질 때문에 문제된 바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충 나의 주장이 이와 같다면 나의 주장을 반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반박할 사람은 얼마든지 반박하세요. 내 기억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닐 것이니까. 그러나 맞다면 맞다고 해주세요. ㅎㅎ.
그런데 남중을 나온 모 인사는 이런저런 논쟁 끝에 1976년도 본인 재수시절에 하숙비가 7,500원이라고 하였다가 당시 주위에 있던 모든 인사들로부터 엄청난 쫑코를 받았다. 무슨 소리 하노? 당시 하숙비가 7,500원이라고. 최소 2만원이다 등등.
그래도 아직 우긴다. 지 말이 맞다고. 이날도 7,500원이 맞다고 우겨댔다. 하긴 우리가 지 하숙비 금액을 우째 알겠나. 특별한 사정이 있어 싸게 해 줄 수도 있는 것이지. 그것은 버스요금 같은 정액제가 아니므로,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는 것이니. 우겨라 우겨, 우기는 자에게 축복 있을지니.
그러나 그 바람에 하숙비 외 다른 요금에 대한 그의 주장은 전혀 엉터리가 되었다. 저런 엉터리 주장을 하는데 다른 주장은 볼 것도 없다는 것이 대세였다. 같은 중학교를 나와도 어찌 그리 다르노?
그래도 이 인사는 경고 나온 거는 데기 자랑한다. 한번 씩 주위에서 지가 듣기에 엉뚱한 소리하면 니 경고 나온 거 맞나, 부고 나온 거 아이가하면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라몬 니는 남중 나온 거 맞나? 북중 나온 거 아이가? 고런데 부산에 북중이 있기는 있는긴가?
굳이 부킹 안 해도 되고, 큰 돈 안 들이도 되며, 그러면서도 마음껏 떠들고 살 비빌 수 있는 삼공산우회의 산행은 그래서 좋고 멋이 있다. 그래서 소고기만 묵고 갈 수 있나? 입가심해야제.
남중 나온 인사는 악착 같이 맥주 한잔 더 하자고 한다. 같은 중학교 나왔는데 우짜겠노. 그래 한잔 더 하자. 그런데 뻘건 대낮에 맥주집이 잘 안보이네. 맥주는 맥주집에만 파나?
에라 모리게따. 짱깨찝에 가자. 잡채안주 시켜놓고 맥주와 이가두주 시켜서 잘도 묵는다. 잡채 짜다는 핑계로 당면 추가로 달라고 하면서. 어느덧 즐거운 하루가 지나간다(디 엔데. 당케 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