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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48)
삼손의 아킬레스건
본문 : 사사기 16:1-3
유다 지파의 손에 묶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인도되려는 순간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갑자기’ 임했습니다.
그러자 삼손을 묶고 있던
싱싱한 새 밧줄 둘이
불탄 삼처럼 우두둑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힘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삼손은 주변에 뒹굴던
새 나귀 턱뼈를 주워
무려 천명이나 되는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을 죽인 후 삼손은
“내가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하고는
그곳 이름을 ‘라맛 레히’(Ramath-Lehi)라 불렀습니다.
이는 “턱뼈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혼자서 천명을 상대해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나니
심히 목이 말랐습니다.
소위 탈진이 온 것입니다.
얼마나 갈증이 났겠습니까?
물을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주변에 물이 없습니다.
이 목마름이 탈진을 가중시켜서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삼손은 하나님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삼손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한 우묵한 것을 터뜨리시니
그곳에서 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삼손은 그 물을 먹고
정신과 기운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곳 이름을 ‘엔학고레’라 이름을 붙여
하나님의 응답을 기념하였습니다.
‘엔’과 ‘학고레’가 합해진 말입니다.
여기서 엔이라는 말은 솟아나는 우물
곧 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학고레는 부르짖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엔학고레’라는 말은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말입니다.
삼손이 그 은혜를 힘입고
기운을 회복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사역을 수행하였습니다.
<가사에 내려간 삼손>.......
문제는 한 번 경험한 은혜가
계속 지속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날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갱신되어야).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약점이 또 다시 드러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맙니다.
1절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삼손이 ‘가사’라는 곳에 갔습니다.
가사에 왜 갔을까요?
그의 고향 소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60km 정도 떨어진 블레셋의 도시입니다.
블레셋의 5대 도시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거기까지 간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가지 말아야 할 장소임은 틀림없습니다.
저는 그가 먼 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유혹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았고
그를 죽이기 위해 매복을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코람 데오’의 신앙 -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
유혹의 장소를 피해야 합니다.
외국에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기생관광 등).
마음의 방심을 조심해야 합니다.
<되살아 난 삼손의 아킬레스건>.....
삼손은 가사에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습니다.
1절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하나는 ‘보았다’는 것입니다.
앞서 비슷한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예 처음 블레셋 여인을 만났을 때입니다.
14:1 “삼손이 딤나를 내려가
블레셋 여자를 보고.”
삼손은 안목의 유혹에
약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의 아킬레스건입니다.
그때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때문에 호된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그 때 블레셋 여인과 결혼시켜 달라고
졸라서 부모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습니까?
또 하나님의 명령을 얼마나 많이 어겼습니까?
또 결국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자신의 부인과 장인을 불에 타 죽게 했습니다.
그 후 한동안 잠잠하던 삼손의 아킬레스건이
도진 것입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유혹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보는 것이 곧 유혹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의 시작’ : 삼하 12:7-14 –
옥상에 올라가 목욕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봄
몇년 전 재미있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친구가 로또 2등에 당첨됐다고 복권을 보여주자
그 자리에서 복권을 낚아채 간 친구가
붙잡혔다는 소식입니다
(2018. 3. 6. 경찰이 지급정지 신청을 해서 찾을 수 없었음).
손으로 낚아채는 과정에서 복권이 찢어졌는데,
10년 동안 쌓아온 우정에도 금이 갔습니다.
당첨금은 5천 2백만 원이라고 합니다.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보는 순간 이성을 잃은 듯 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이것이 죄의 정체입니다.
죄의 정욕은 언제든지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죄의 정욕은 우리 안에서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후에도
죄의 정욕은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죄의 정욕은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할 때는
마치 죽은 것같이 나타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방심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치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휴화산의 용암과 같이
우리 안의 깊은 곳에 숨어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영적으로 조금만 방심하면
언제든지 튀어나와 우리를 삼키는 것입니다.
늘 보는 것을 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목의 유혹을 느낄만한 장소를
아예 피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두 번째 주목해야 할 동사는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사람인 고로 때때로 원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이기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삼손은 자신이 본 창기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윗도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
절제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최전방에서 싸우는
자신의 신하 우리아의 아내인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제하지 못했고
자신이 본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더 큰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창 3장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유혹입니다.
그 유혹의 말을 듣고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창3:6) 하였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그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삼손이 창기를 따라 들어간 것은 큰 실수입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에까지
큰 상처를 내는 일입니다.
<위기를 가져오다>.........
결국, 이러한 부끄러운 삼손의 행동은
큰 위기를 가져옵니다.
2절 “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삼손의 기대와 다르게
가사 사람들은 삼손이 온 것을 금방 알았습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가사 사람들은
그를 죽이고자 매복하여 기다렸습니다.
삼손이 두려워 정면 대결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가 새벽에 몽롱한 정신으로 나올 때.....
기습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방종과 정욕은 반드시 영적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은 그것을 반드시 이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성도님들은 혹시라도
육체의 정욕에 이끌려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
영적인 위기에 직면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육체의 일을 성적인 방종으로만
국한하여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육체의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갈5:19-21>
19절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절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절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면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어디서 옵니까?
<갈5:16-17>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은 서로 대적합니다.
공존할 수 없습니다.
서로 거스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 충만함으로
육체의 일을 경계함으로 저와 성도님들의
영혼과 생명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 - 삼손의 반격>.....
우리는 3절 말씀에서 삼손의 실수에도
여전히 그를 버리시지 않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3절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삼손이 누워 있다가 새벽이 오기 전에
(“그 밤중에 일어나”)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본문에는 그 이유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삼손이 위험에 처했음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삼손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사’에 간 것도,
기생을 보고 그의 집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삼손은 가사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한 시간에 나타나
(아마도 그들은 졸고 있었거나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
갑자기 그들이 숨어 기다리던
그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잡아 뜯은 채 통째로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버렸습니다.
삼손을 죽이려 한 그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악인들의 경영의
궁극적인 모습입니다.
즉 악인들의 경영은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라지 비유가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죽이려 했던 사울의 실패.
다윗의 시를 말살하려 했던
아달랴의 실패(왕하11:1-21).
유다 민족을 멸족시키고자 했던
하만의 실패(에3-7장).
예수님을 죽여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훼방하려 했던 사단과 유대인들의 실패.
악인들이 제아무리 온 힘을 다해
일을 추진한다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실패하고 맙니다.
즉 그들의 경영은 허사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시편 1장의 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더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삼손이 그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잡아 뜯은 채 통째로
어깨에 메고 간 곳이 어디입니까?
헤브론 앞산 꼭대기입니다.
헤브론(Hebron)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해발 927m의 산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종교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헤브론 근처의 막벨라 굴을 사서
가족 묘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묘지에 자신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가 묻혀있습니다(창49:31, 50:13).
또한 그곳은 믿음의 용사 갈렙이
거인 아낙자손을 물리치고
정복한 곳입니다(수14:6-15).
이처럼 헤브론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가
보존되어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상징과도 같은 곳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에는 성문이 그 성읍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 성읍의 힘과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의 행동은 장차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복속될 것을 예언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훗날 블레셋은 다윗 왕에 의해
정복되어 완전히 이스라엘로 복속되고 말았습니다.
<맺는 말씀>
자기 소명(나실인으로서, 사사로서)을
상실한 삼손의 모습을 보면 ...
정말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삼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죄의 정욕은 언제든지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육적, 영적인 위기를
필연적으로 가져옵니다.
그러나 한편 그러한 삼손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일군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삼손이라는 한 연약한 인간을 바라보지 말고.....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경영이
승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예언하셨습니다.
바라기는 삼손과 같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코람 데오’의 신앙으로 언제나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