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애굽에서 벗어났지만
애굽의 근성이 광야 40년을 따라오므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면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다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만 요단을 건넙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애굽은 잊었지만 광야의 기적을 계속 뒤돌아봅니다,
광야에서는 애굽을 뒤돌아보고 마음이 늘 뒷걸음을 쳤고 가나안에서는
광야를 뒤돌아보느라 눈앞에 있는 기업을 경작하여 심고거두는 일을 잘하지 못합니다.
이게 바로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패러다임입니다.
교회가 세상화 되어가는 건 바로 광야의 이스라엘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야고보서를 공부할 때에는
야고보서는 히브리서를 건너와서 사는 이야기임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제가 오랫동안 야고보서를 강해하는 걸 주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옮겨진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와서 거룩하게
된 자로 하늘 사닥다리이신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서 들은 바 말씀이 화합이 되어 온 마음과 몸에 스며드는
영적인 공정을 마음 안에서 일으킬 수 있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느냐는 거죠.
제가 지금 히1장부터 4장까지를 개관하듯 말씀을 드린 겁니다.
그만큼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 와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성령의
가르침과 생각나게 하심을 따라 아버지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감이 중요합니다.
야곱은 이삭의 축복 곧 하나님의 복을 낚아챈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을 침노하는 것에 대한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통해 건너 온 뒤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부지런히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사는 이스라엘과 같은 스토리가 바로 야고보서입니다.
그 다음 요한서신은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구원까지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요한이란 그 이름만큼 사랑이 이루어진 바로 합격자 발표와 같습니다.
히브리서는 안식에 대한 말씀이고 야고보서는 정착하는 신앙을 말씀합니다.
믿음의 뿌리를 깊숙하게 내리고 자기완성을 이루어가는 이야깁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싸우듯이 끊임없는 시험과 싸워 승리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한 첫 열매가 되기 위해 많은 피조물 중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곧 씨가 될 종자와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피조물 중에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한 씨 곧 종자로 생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약1:18)
대통령으로 태어난 이도 없고 재벌로 출생한 이도 없이 다 한 애기였습니다.
그렇듯 이삭이든 야곱이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한 어린아이로 태어난 겁니다.
우리 또한 완성품의 복을 받으려는 허망한 신비주의에서 벗어나서 자신 안에 임하신
약속의 말씀을 키워내서 밖으로 뿜어내는 생명의 면류관이 되는 인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 들어갑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1:19)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이제 새로운 삶의 전통을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형제들이면서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첫 열매가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어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들어가며 나오면 생명의 꼴을 얻습니다.
그 안에서 말씀을 듣기는 속히 하라고 하심은
언제나 준비된 마음으로 즉석에서 말씀을 속히 들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이 떠들썩하게 믿을 때가 있었다면 이젠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어 주님과 한 영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안식을 얻으며
영이신 하나님을 나의 영으로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을 늘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반면에 말하기는 더디 하라 하십니다. 서두르지 말고 무게 있게 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게 잘 안되는데 그 이유는 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기 위해 주변이야기를 많이 하느라 핵심을 피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핵심적인 말을 피하느라 설명이 길어 말이 좀 많아지므로 그게 싫습니다.
또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하심으로 말하고 싶은 충동을 잘 참아야 합니다.
말씀을 처음 받은 사람들의 실수죠. 말씀은 권위가 있고 무게 있게 전해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을 증거할 때는 회중을 압도해야지 그들을 설득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설교는 대언의 영으로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듣든지 말든지...
어린아이도 들을 수 있는 말을 하라고 하는 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1:20)
왜냐하면(가르) 사람의 성내는 것 곧 충동적인 열심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내게서 혈과 육이 발진되지 않도록 주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능력을 늘 의식하고 잠잠히 그의 역사하심을 바라봐야죠.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으로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1)
먼저 모든 더러운 오물덩어리와 끓어오르는 악을 내어버리라고 하십니다.
만일 진리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나아가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마음에 있는 더러운 오물과 들끓는 악을 발견하고 내 몰기 시작할 겁니다.
드디어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성령과 말씀으로 기경하게 되면 마음속에서
자라고 계속 성장하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영접하고 또 영접하며 수용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 되었다면 그 안에 있는 법궤의
위력을 알아보기를 권합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곧 부활입니다.
만나 곧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이시며 돌비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입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십자가로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
거듭나게 하시고 그 안에서 영생을 주실 때에 이미 다 탑재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만 많은 주의 일꾼들이 이를 모르고 천국자신 은익이나 횡령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마음속에 심긴 도를 잘 받아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3년 정도는 말씀을 부지런히 듣는 일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공부하기 위해서 듣지 말고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들어야 합니다.
설교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은 입으로 말하는 순간에 다 증발하고 맙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말씀을 받아 한 몸이 되신 주님을 믿음으로 구주로 모시고
그 피 안에서 화목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진리의 성령을 따라 생명의 길을
걷고 또 걸으면 한 알로 심겨진 생명의 씨앗이 내 속에서 점점 자라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우주가 한 점과 같은 말씀에 의해 지금도 계속 팽창되고 확장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우주가 얼마나 크냐 하고 물으면 그건 망원경의 성능에 달렸다고 말하지요.
온 우주와 만물을 이루는 그 한 알의 원자의 핵과 같은
그 말씀(요1:1)이 우리 안에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심겨졌습니다.
따라서 거듭난 영으로 진리를 따라 영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듣고 또 받아들이는 긴 세월 동안 계속되는 반복 과정을 통해 완성이 되어 갑니다.
제발 로마서와 요한복음 그리고 히브리서를 꾸준히 듣고 또 들으시기를 강추합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좋은 신앙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