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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3:3~6(91) 구원하심을 보리라 2021. 12. 19.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金章煥)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1973년 6월 30일 극동방송 전신인 지상파 라디오 아세아방송이 개국을 하였습니다. 방송국 개국을 앞두고 일 분 일 초가 귀하고 바쁠 때 김목사님이 전화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1973년 당시 빌리 그레이엄 한국전도대회 대회장 한경직 목사와 준비위원장이었던 헨리 할리 목사의 전화였습니다.
당시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 가던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와 미국의 헨리 할이 목사가 김장환 목사님에게 전화를 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1973년 여의도에서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목사님을 모시고 100만 성도 집회를 준비하는데, 이 집회의 통역을 김목사님에게 부탁한다는 것입니다.
김장환 목사님에게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이 대규모 집회에서 아세아 방송국의 개국도 알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김목사님은 침례교 목사인데, 그가 졸업한 밥 존스 대학교가 미국 기독교내에서 매우 보수적인 색채를 띄고 있었습니다. 반면, 당시 미국의 보수 기독교회에서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자유주의자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침례교단과 김목사님의 동문들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로 전화통이 불이 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말은 한결같이 ‘빌리 그레이엄 집회에 참석하지도 말고 통역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만약 빌리 그레이엄의 통역을 하게 된다면, 아세아 방송국 개국에 대한 미국 침례교단의 선교후원이 중단될 것이는 말까지 확실하게 합니다.
몇 일 동안 고민하던 그에게 아내 트루디가 말했습니다. 김목사님의 아내는 미국여성입니다. 21살의 나이게 대한민국에 와서 평생동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시는 분입니다. 아내가 김목사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전도하기 위해 미국에서 한국에 오지 않았습니까?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어요?” 그는 아내의 격려와 기도 끝에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미국의 후원이 끊어지더라도 빌리 그레이엄의 통역을 맡기로 합니다.
1973년 5월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집회에 연인원 320만 명이 모이는 대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김장환 목사는 이때의 통역이 삶과 사역에 가장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 한 사람의 안위만 생각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 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 때, 하나님은 구원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러기에 항상 복음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유대 땅에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된 소식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전하는 메시지이지만 특이하게도 구약 성경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전하는 모습입니다.
설교의 중심 주제가 되는 말씀은 6절입니다.“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6절의 말씀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중심 주제를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육체’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심을 받는 것을 보게 됨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해야만 하는가?’를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해야만 할까요? 광야에 길을 내거나, 우묵한 곳을 메우며, 언덕을 깎으며 굽은 길을 곧게 하는 정도의 보수(補修)가 아니라 전적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돌이켜 완전히 변화되어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말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은 단순하게 도로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도덕적인 자세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5절에 등장하는 ‘모든 골짜기와 모든 산과 작은 산, 굽은 것과 험한 길’이 상징하는 것은 ‘메시아의 구원사역을 방해하는 인간의 모든 악행’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 막는 것들을 제거해야 하고, 내 생각과 내 욕심을 모습을 내려 놓는 것을 말합니다. 교만하고 악한 마음의 성향들이 변화되어야 함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하심을 보려면 우리는 어떤 마음과 행동의 모습을 보여야 할가요?
1. 메워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숲속에 아카시아와 향나무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오솔길을 걸으면서 향나무에서 나오는 은근한 나무향을 즐기게 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향나무의 향기를 맡으려고 숲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숲을 찾은 일부의 사람들은 향나무 옆에 서 있는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내는 아카시아도 함께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향나무와 어울리지 않는 아카시아 나무를 흉보기 시작합니다.
아카시아 나무는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였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향나무와 아카시아 나무를 비교하면서 자신을 깔보는 것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카시아의 분노와 증오는 옆에서 사랑을 독차지하는 향나무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밤, 아카시아 나무는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향나무를 날카로운 가시로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향나무는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습니다. 어떤 가지는 찢겨 지기까지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바람이 멎고 태양이 떠오른 숲속 길로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깜짝 놀랍니다. 향나무에서 어느 때보다 향기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아카시아 나무에도 향나무 진액이 묻어 향기를 발하고 있었습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찌르고 상처를 입힌 아카시아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으로 품고 향기를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 하나님에게 아카시아 꿀을 얻게 되면서 자랑거리가 생긴 아카시아 나무)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향나무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타인의 상처와 아픔을 받아 드리고 메울 수 있는 아량과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을 받아 보듬어 줄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5절 보세요.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여기의 ‘메워지고’의 원어 의미는‘빈틈없이 가득 차오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상처 입은 마음이 있습니다. 배신이 주는 쓰라린 아픔을 경험한 마음입니다. 실패의 경험으로 인해 마음의 골이 깊어졌습니다. 이렇게 상처 받고 깊어진 골짜기는 사람의 노력으로 쉽게 메워지지 않습니다.
이런 깊게 상처 난 골짜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워주신다는 말입니다. 깊은 골을 메워져서 사람들이 쉽게 다니는 길이 되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져서 누구나 안심하고 다니는 길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의 모습입니다.
마음에 골짜기가 생기면, 균열이 생겨 두 마음이 됩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골짜기가 생긴 마음으로는 결코 예수를 영접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의 골짜기들이 메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골짜기가 메워져야 합니다.
이리저리 갈라진 상태에서 화평을 전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골짜기를 만납니다. 본인 스스로 골짜기를 만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타인이 만들어 놓은 골짜기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벌어진 골짜기, 부모와 자녀 간에 만들어진 골짜기,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골짜기, 형제간의 골짜기,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끼리의 골짜기. 이러한 모든 골짜기들이 메워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더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몸이 찢기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하지만 향나무처럼 자신을 찌른 가시나무 같은 자들에게 오히려 향기를 발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만 하면 위로를 받습니다. 치유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상처를 입힌 사람들까지 향기를 발하도록 생명의 진액을 묻혀 주셨습니다. 골짜기와 같이 패인 마음이 예수의 마음으로 메워져야 합니다. 치유되지 않은 마음은 옹졸한 골짜기의 마음과 같습니다. 마음의 골짜기를 메워 닫힌 마음이 아닌 열린 마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낮아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5세기 이탈리아 수도사였으며 종교개혁가인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산책을 하는데 성당 입구의 마리아상 앞에 나이든 부인이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튿날 같은 시간에 그 부인이 또 그 자리에서 기도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한결 같이 같은 시간에 와서 기도하는 부인을 보고 사보나는 감명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동료 사제에게 부인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부인은 변함이 없네.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같은 시간에 찾아와서 기도하는 신앙이 유별하지 않는가? 저 부인의 신앙에 내가 감탄하고 있는 중이라네” 그러자 사제가 대답합니다. “자네, 모르고 있었나? 마리아상을 조각할 때, 저 부인을 모델로 삼았다고 하네. 여인은 날마다 기도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상이 만들어진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이네.”
무슨 말이에요? 부인은 자기 얼굴을 보고 즐거워하고 자기를 숭배하며 높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교회로 나온다는 무서운 말입니다. 교만은 자신을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절대화한다든지 혹은 자기주장을 절대화할 때 교만함이 드러납니다.
5절입니다.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여기의 ‘낮아지고’는 원어의 뜻은 ‘비천하게 되고 겸허하게 되다(타페이노데세타이)’라는 의미입니다.
높이 솟은 멋져 보입니다. 높이 솟은 산은 웅장하게 보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만 위용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에서 높은 산이나 작은 산이나 모든 산들이 낮아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높은 산과 낮은 산은 ‘인간이 가진 교만과 자랑’을 의미합니다. 교만과 자기 자랑은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요소입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모습입니다. 타인을 무시하고 타인의 생각은 존중하지 않은 체 자신만 드러내는 모습 또한 교만한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교만과 자기 자랑의 산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물질 교만의 산, 지식 교만의 산, 명예 교만의 산,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교만의 산, 열심에서 오는 교만의 산들. 이런 모든 것들을 십자가 앞에서 다 낮추어야 합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예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매우 율법을 잘 지킨 자들이었습니다. 일반시민들이 검히 범접하지 못할 장도로 열심이 특심하게 믿음생활을 잘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열심히 자기 독선에 빠져 있는 것이라 판단하여 위선적인 모습이라 지적했습니다.
자기들만의 의견이 최고라고 생각했고, 자기들만의 판단이 최고라고 여겼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수님 인기가 높아지자, 예수를 괴롭히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합니다.
본문은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진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가 가진 교만이 다른 사람이 가진 교만보다 작게 보인까 내가 가진 교만은 허락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욕을 하는 큰 교만이든, 아니면 나만 가지고 있는 작은 교만이든, 모든 교만은 하나님이 싫어 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오시는 마음을 준비하려면 교만의 산을 제거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 산이 더 낮아져야 합니다. 내가 올라서 있는 내 교만의 산에서 겸손하게 내려와서 주님을 만나 보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3. 올곧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5절,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굽은 것이 곧아진다고 말합니다. 다니기 너무 불편한 길이 평탄하여 진다고 말합니다.
굽은 마음과 굽은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굽은 마음을 버리고 곧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평탄한 길을 다듬어가면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굽은 마음은 예수를 영접하는 마음이 되지 못합니다. 부정적이고 어둡게 보는 굽은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거짓되고 위선적인 마음이 곧아져야 합니다. 마음이 굽으면 항상 부정적이 됩니다. 굽은 마음은 비방하기를 즐기며 편견과 오해로 뭉쳐있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곧게 펴야 예수를 영접할 수 있으며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굽은 것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던 당시의 세리들을 가리킵니다. 로마 제국의 비호 아래 법으로 정한 세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었고, 자기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혹여 세리들처럼 인생을 굽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회개를 통해 굽은 마음이 바로 펴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굽은 것들이 있습니까? 가난한 자, 불쌍한 자, 소외된 자, 병든 자를 돌보지 않고 업신여겼다면, 회개를 통해 굽은 마음을 펴고 예수 사랑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의 구원을 목도하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찰스 스터드 (Charles Thomas Studd 1860-1931)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하던 학생이며 탁월한 크리켓 대표선수이기도 하였습니다. 금메달을 획득하여 보장된 길이 그의 앞에 열려 있었습니다. 15살때에 전도자 무디의 집회에서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대학졸업 후 허드슨테일러를 위시하여 7명의 사람들이 중국선교를 떠납니다. 이 7명이 중국선교에 있어서 가장 유명하였던 ‘켐브리지 7인’입니다.
1885년 중국에서 가서 건강이 악화되어 영국으로 돌아왔던 1894년까지 10년을 선교를 합니다. 영국으로 돌아와 투병 생활을 하던 중에 건강이 조금 회복되자, 쉬지 않고 1900년부터 6년간 인도 선교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18년간 선교하다가 1931년 71세로 콩고 아밤비에서 지병 담석증으로 사망합니다. 사망 장례식에 7천여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참석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였던 모습을 애도하게 됩니다.
위키 백과에 스터드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면, 좌우명으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한번 뿐이고 그것은 곧 지나가고 말 것이니,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은 영원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금주 토요일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이 있는 날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성탄절을 준비해야 하나요? 이기심과 질투, 탐욕으로 패인 마음을 평탄케 하여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마음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만유의 주 예수께서 영광스럽게 오시도록 길을 평탄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마음의 골짜기를 메우시기 바랍니다. 교만의 산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부러진 마음을 곧게 하여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