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 일기(사순 제2주간 토요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언젠가 첫 주임 신부로 발령받아 사목했던 월산동 성당 신자 분들 이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월산동 성당에 있을 때 말없이 열심히 했던 누구(?) 자매님은 잘 계시냐? 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은 벌써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아뿔싸, 잊고 있었구나! 그 영혼을, 그때 암 투병 중이셨는데….’
또, 다시 사람이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고, 허무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저희의 몸과 마음에서 잊혔던 한 영혼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면 사는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그 영혼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도 없는 아들을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까맣게 잊고 허랑방탕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한시도 잊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렇듯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인지라, 아직도 서로의 거리가 먼데, 먼저 거지가 된 아들을 알아보고서 달려간 것입니다.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춥고,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 모양이 되었을까? 불쌍해서 목을 끌어안습니다. 그렇게라도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입을 맞춘 장면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멀리서 아들을 보고 너무도 기뻐서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가는 백발이 성성한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벼대면서 입을 맞추는 이 감명 깊은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상상해도 은혜롭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7절에 보면 사도 바오로가 말씀합니다.
“나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의를 더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러자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차마 열리지 않은 입을 열어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다 알았다는 듯,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 주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즐거운 잔치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왜, 아버지를 떠나갔습니까?
아버지의 간섭과 속박에서 벗어나 저 멋대로 살기를 원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 제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잃어버린 자식을 애타게 찾는 아버지, 문밖에 서서 기다리는 아버지, 그리고 그 자식이 돌아왔을 때 즐거워하고 기뻐서 잔치를 차려주시는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았을 때 이렇게 기뻐하셨습니다.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구약에 아가서를 보면, 신랑이 신부를 기다리면서 간절하게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의 연인이여, 돌아와요. 보고 싶어요.”
마치 예수님께서는 매일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신랑이 신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고운님들을 기다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이 세상에서 고통을 없애주지는 않으셨지만, 고통 중에 저희를 위로해주셨습니다.
저희의 눈물을 없애주지는 않으셨지만 흘리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시기에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회심의 참뜻은? “고운님들이 힘들다고 생각나는 죄, 고통, 시련, 불의의 사고 안에서도 하느님 도우심의 자비를 바라보라.”라는 것입니다.
첫째, 너희는 이 세상에서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둘째, 너희는 결코 홀로 고통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너희는 고통 중에서도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희망으로 주셨던 은혜로운 치유와 회복의 은총”입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아멘.
저 두레박 사제도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고운님들과 아픈 이들을 돌보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아무리 힘들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기도와 미사성제 중에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고운님들이 기억하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님들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https://youtu.be/6H-FQYDjOaE?si=vNbt1Ju1vgouiI_6
2024년 3월 2일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루카 15,1-3.11ㄴ-32
아버지 마음
요즘 강정마을의 국내 유일 바위습지인 구럼비 바위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너무 늦게 관심을 갖은 것에 대한 죄책감도 듭니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4.3 항쟁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더욱 가족같이 끈끈했던 주민들이
새로 건설되는 해군기지의 찬반 문제로 서로 갈라져서 말도 안 하는 사이들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한 주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주 사람들만 못살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전부 찬성 반대 사람들을 말이죠. 조카 내 동생 아들하고 제사도 같이 안하고 벌초도 같이 안합니다.
아무 것도 안합니다. 만나지도 않습니다. 죽일 놈 살릴 놈 합니다. 삼촌 보고도 백부 보고도. 걔는 찬성이거든요. 난 반대고요. 눈물 납니다. 눈물 나요.”(발췌: 뉴스타파 6회)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 건설한다는 해군기지, 결국은 나라 안에서 평화가 깨어지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의 비유말씀이 나옵니다. 사실 돌아온 탕자 비유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닙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두 아들을 중재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슴깊이 새겨져야 오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돌아온 탕자는 세리와 죄인들이고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큰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끔 그들을 독사의 족속들, 혹은 회칠한 무덤이라 하시며 독설을 퍼부으시기 때문에 그들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예수님은 그들을 설득해서 그들도 당신 품에 안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죽었던 아우가 살아 돌아왔으니 함께 집으로 들어와서 잔치를 즐기자고 설득하고 계신 것이 오늘 비유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누구하나 당신을 떠나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당신 품 안에서 화해하고 같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하느님은 모으시고 일치시키시지만 사탄은 흐트러뜨리고 분열시킵니다.
레페브르(Lefebvre)는 주교로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에 반대하여 따르지 않았던 분입니다. 그리고 그가 서품을 주었던 사제들도 교회에서는
파문 되었습니다.
저도 오스트리아에서 한 번 그들이 하는 미사에 참례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미사는 라틴어로 사제가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드렸고 미사에 온 사람들도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성체성사 때는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으면 흰 천을 가슴 앞에 대고 성체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입으로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이렇게 미사를 드렸겠구나!’하면서 시대를 거슬러 미사를 드리고 온 느낌이었습니다.
공의회는 각 나라말로 미사를 드릴 것을 결정하였지만 그들이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그 이전의 전통만 고집하기에 교회에서는 그들을 파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