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자대전 > 宋子大全卷一百四十二 > 記 > 宋時烈
天安縣華祝館記
今上殿下自乙巳以後。連有溫泉之幸。亦時奉東朝以臨焉。沿路列邑。各修館御。而其中天安正館。建於萬曆壬寅盧守大河之時。則故壞尤甚焉。昌寧曹侯敬彬以歲丙午除是邑。先時邑有犯常之變。降而爲縣矣。六月侯上官。語其人曰。屋宇之修。實守宰之職。而況今大駕連年臨御。雖聖上慈儉之德。安於土階茅茨之陋。而臣民享上之道。則不可不盡心也。當職當盡出月俸。而父老豈亦無子來之心乎。父老齊應曰不翅然矣。慈聖所御。不幸有故。有不可仍舊者。而其事體又有不敢專輒者。故監司任公義伯令侯往白于大臣。而歸以驛聞。則大臣許以改爲。而令有司爲給米布。亦有聞而相助者矣。遂先治正館之東軒。次改慈聖御室。而廊廳中大廳武庫諸宇。無不重新矣。戊申監司閔公維重謂侯曰。今茲苟完矣。若並治西軒。豈不盡美矣乎。侯亦以一簣之虧爲惜。而如其命焉。今年庚戌春。工告訖事。摠大小凡三十九間。而前後見助者。慶尙監司李公泰淵。統制使李枝馨,金鏡。本道兵使李元老。全羅兵使閔震益也。旣而侯問其所以名者。且以記文爲請。余曰諸人之越封而相助者。豈所以私於侯者。然則諸公以財。而余以文字之末。寓其區區螻蟻之誠。亦其義然也。昔帝堯觀于華。華封人祝之以壽富多男子。今日臣民爲聖上願之者。豈外於此哉。如取此義名其館曰華祝則其庶矣乎。或曰壽與多男子。固所願之大者。而聖上方以外本內末爲戒。富亦可願者歟。曰富豈府庫之藏之謂歟。時和歲豐。家給人足。而禮樂可興者。斯豈非吾聖上之富歟。不幸數年以來。饑饉荐臻。人民多死。聖上憂勞於上。惻怛之敎屢下。聞之者無不感泣矣。倘天心悔禍。雨暘時若。多麥與黍。然後雖非臨幸之日。歲時慶節。侯與吏民傴僂祝釐於庭下。如對咫尺之威顏。豈不可乎。吾欲以外本內末之戒。獻於承弼之諸賢。而以此三者之祝。爲封疆之臣道也。因並記問答之語。報于侯。侯以爲如何也。時崇禎上章閹茂仲秋日。恩津宋時烈記。崇禎上章閹茂(庚戌, 1670)
천안현화축관기
금상전하께서 을사년 이후로 연이어 온천에 행차하셨다. 또한 때때로 동쪽 궁전을 받들어 그곳에 이르렀다. 길을 따라 여러 읍이 각기 관아를 수리하여 맞이하였다. 그 중 천안 정관은 만력 임인년(1602년. 선조 35)에 노수 대하가 지었으나 매우 허물어져 있었다. 창녕 조후 경빈이 병오년에 이 읍으로 부임하였다. 예전에는 이 읍에 범상한 변고가 있어 강등되어 현이 되었다. 6월에 후가 상관에 도착하여 그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집을 수리하는 것은 실로 수령의 직책이다. 하물며 지금 대가가 해마다 임어하시니, 비록 성상께서 자애로우시고 검소한 덕으로 토계와 초가의 누추함을 편안히 여기시지만 신민들이 상을 맞이하는 도리는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월봉을 모두 내놓겠으니, 어르신들도 자녀가 오는 것을 맞이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어르신들이 모두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애로우신 성상이 거처하시는데 불행히도 고장이 있으면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의 체제가 또한 감히 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감찰사 임공 의백이 후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아뢰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신이 이를 허락하여 개조할 수 있게 하였고, 지방관에게 명하여 쌀과 천을 지급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듣고서 서로 도운 자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먼저 정관의 동헌을 수리하고 다음으로 자애로우신 성상의 거실을 개조하였으며, 행랑과 청사 중의 대청, 무고 등의 여러 건물들을 모두 새롭게 하였다. 무신년에 감찰사 민공 유중이 후에게 말하였다.
“이제 대강 완성되었소. 만약 서헌도 함께 수리한다면 어찌 완전하지 않겠소?”
후도 작은 결함을 아쉬워하여 그 명에 따랐다. 금년 경술년 봄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총 대소를 합하여 서른아홉 칸이었다. 앞뒤로 도운 자들은 경상 감찰사 이공 태연, 통제사 이지형, 김경, 본도 병사 이원로, 전라 병사 민진익 등이었다. 이에 후가 그 명칭을 물어오며 글로 기록해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서 서로 도운 것이 어찌 후를 사사로이 위해서겠는가? 그렇다면 여러 공들이 재물을 내었고, 내가 글자의 끝으로 진실되고 작은 성의를 담아내는 것도 또한 그 의리일 것이다. 옛적에 요임금이 화에 행차했을 때, 화의 봉인이 그에게 장수와 부유함과 많은 자식을 기원하였다. 오늘 신민들이 성상께 기원하는 것도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이 뜻을 취하여 그 관을 '화축'이라 명명하면 어찌 부합하지 않겠는가?”
혹자는 말하였다.
“장수와 많은 자식은 본래 크게 기원하는 바이지만, 성상께서는 외본내말(외부는 근본, 내부는 말단)로 경계하시니 부유함도 기원할 수 있는가?”
“부유함이 어찌 창고에 재물을 쌓아두는 것을 말하겠는가? 시절이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집집마다 풍족하고 예악이 흥할 수 있는 것이 어찌 우리 성상의 부유함이 아니겠는가? 불행히도 몇 년 동안 흉년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많이 죽었으니 성상께서 위에서 근심하고 슬퍼하시는 가르침이 자주 내려졌다. 이를 듣는 자마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다. 만약 하늘의 뜻이 재앙을 뉘우쳐서 비가 알맞게 내리고 보리와 기장이 많이 난다면 비록 임어하는 날이 아니더라도 세시의 경축일에 후와 관리들이 몸을 굽혀 뜰 아래에서 축하를 올리는 것이 마치 지척에서 위엄 있는 얼굴을 대하는 것처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외본내말(外本內末)의 경계를 승필의 여러 현자에게 바치고 이 세 가지 축원을 봉강의 신하로서의 도리로 삼고자 한다.”
이에 묻고 답한 말을 함께 기록하여 후에게 보고하였다. 후가 이를 어떻게 여기는가. 숭정 연간 양무 중추일에 은진 송시열이 기록하다.
☞화축관(華祝館址)
화축관(華祝館)은 조선 시대에 천안군에 건립되었던 행궁이다. 천안 군수 노대하(盧大河)가 1602년(선조 35)에 건립하였고, 천안 군수 조경빈(曺敬彬)이 중수하였다. 이에 대한 우암 송시열의 기문이 남아 있다. 그 후로도 수차례 중수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경찰서와 헌병대 건물로 사용되다 이후 모두 철거되었다. 관련 시설 중 화축관의 문루였던 영남루만 현존하고 있다.
천안시 동남 구청에서 영성로를 따라 남쪽으로 200m 거리에 천안 중앙 초등학교가 있다. 화축관은 천안 중앙 초등학교 일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 국왕이 온양 행궁으로 행차를 하면서 천안에 머물렀던 기록이 보이는데 조선 초에는 아무 건물도 없는 홍경원 벌판에서 유숙을 하기도 하였다. 선조 대에 이르러서 천안 군수 노대하가 1602년에 화축관을 세웠고, 그 뒤로 국왕이 화축관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이동하던 와중에 1624년 2월 12일 천안에 도착해 화축관에 머무르다 관군의 승전 소식을 듣기도 하였다.
우암 송시열의 「천안현 화축관기(天安縣華祝館記)」에 1670년(현종 11) 천안 군수 조경빈이 화축관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때에 정관의 동헌(東軒)을 먼저 수리하고 다음으로 자성어실(慈聖御室)을 고쳤으며 낭청(廊廳)·대청(大廳)·무고(武庫)등 총 39칸을 수리하였고, 그 비용은 경상 감사 이태연(李泰淵), 통제사 이지형(李枝馨)·김경(金鏡), 충청 병사 이원로(李元老), 전라 병사 민진익(閔震益)이 보태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 호조 각장 사례 별례방 기록 중에는 온천 행궁을 수리할 때에 천안 화축관의 예(例)에 따라 거행하라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숙종실록』에는 1717년(숙종 43) 숙종이 국왕의 온천 행차 때에 거처하시는 관사에 사객(使客)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면서 다만 직산(稷山)의 영소정(靈沼亭)과 천안의 화축관은 선조(先朝)가 지은 것이니 제외하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영조실록』 1750년(영조 26) 9월 15일에는 대가(大駕)가 직산현(稷山縣) 영소정에서 머물렀을 때에 영조가 직접 시를 짓고, ‘옛날을 추억하는 감흥[憶昔興感]’이란 네 자를 친히 써서 새겨 화축관에 걸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화축관은 여러 차례 중수되었는데 중수기(重修記)에는 1733년(영조 9), 1832년(순조 32)에 중수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화축관의 건물 형태에 대해서는 영조 대에 편찬된 지리지인 『여지도서』에 상세하게 나타나는데 이에 따르면 화축관은 관아의 서쪽에 있으며 정청(政廳) 10칸[전후 퇴주 9칸], 동서랑(東西廊) 각 5칸, 시녀방(侍女房) 3칸, 정문(正門) 2칸의 큰 규모이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천안군의 고지도에는 천안군 읍치의 아사와 객사 건물 사이에 화축관이 그려져 있다. 가장 상세하게 보이는 것은 1872년에 제작된 지방 지도이다. 여기에는 건물의 배치가 매우 잘 나타나 있어 문루인 영남루의 형태도 파악이 된다. 지도에는 영남루를 지나 사령청이 동서에서 마주보고 안쪽 내삼문을 지나면 동익랑과 서익랑이 마주보고 가장 안쪽에 화축관의 본 건물이 있다. 주위에는 낮은 담이 둘러져 있다.
화축관은 일제 강점기에 경찰서 숙소 및 헌병대 사무실로 사용되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학교 관사로 활용되다가 헐리었다. 화축관의 문루인 영남루만 남아 있지만, 영남루는 1959년 천안 삼거리 공원으로 이전 복원됨에 따라 2013년 현재 화축관 터에는 화축관과 관련된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화축관 터에는 현재 천안 중앙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화축관은 국왕이 머무는 행궁으로 다른 관아 건물보다도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안 지역사에 화축관은 큰 영향을 미쳤다. 왕실의 행차로 주민이 고초가 심하니 대동미를 가을로 미뤄 받으라는 숙종의 명은 이 같은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화축관과 관련된 연구 조사가 이루어진 바가 없고, 화축관의 문루로 쓰였던 영남루만 현존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축관 [華祝館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