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 21:17~22:23
운전할 때 EBS 라디오 자주 들음. 거기서 들은 말, '거의 전부인 발 발짝.' 포기한 반 발짝이 완성이었던 결정적 실수.' 그렇다면 그 반발짝이 전부인 것임. 한라산 등정 때 느끼는 것, 인생은 결국 한 발짝이라는 것. 초기에는 한 걸음 내딛는 게 너무 힘들었지만, 한 발짝씩 걷다보면 정상에. (홍수환의 예시가 생각남). 오히려 앞으로의 "한 발짝이 미지의 것'이니까 더욱 내딛어야 하는 것.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할 지 모르는 것. 아니면 평안과 복의 시간일지도.
사도 바울의 여정을 생각해보면, 그의 여정도 거의 반 발짝의 연속이었음. 큰 그림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망칠 수 있는 행보도 피하지 않음. 혹여 큰 그림을 망치더라도. 하나님 뜻에 따라 반 발짝을 내딛는. 고난을 향해서 내딛는 반 발짝.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낼 기회로 여겼기에. 그렇다면 신자의 길을 이렇게 정의 '고난을 향해 기꺼이 가는 길'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가는 걸음. 고난을 통해서만 담기는 복음의 영광을 생각하며. 예루살렘의 리더십에는 이런 것에 부담감이 있음. 유대인 출신에서 크리스천으로 회심한 사람이 증가되고 있음. 그런 현상 속에서 불편함과 걱정도 증가. 유대인 크리스천들도 유대교적 율법, 종교에 철저해져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걱정의 기운들. 율법/할례/규례 등에 대해 소홀하게 말하는 것들 등에 대한 걱정. 바울을 경계, 적개심, 미움 등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었던 듯. 유대인에 앞서,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이러한 현상이나 문제를 해결해야 했음. 바울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것을 뛰어넘어야 할 어떤 상황에서는 자신의 캐릭터를 극복해서 그렇게 함. 그래서 '나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로. (어떤 신학자, '참으로 해방된 영혼은 자기가 해방됐다는 사실에도 매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환란과 봉변을 당하는 계기가 됨. 바울에 대해 큰 적개심을 가진 세력이 선동하고, 체포하여 고문하는 상황 발생(21:26~30). 과장과 왜곡, 오해로 바울을 그렇게 함. 지금도 비슷한 상황임. 정서적/문화적/정치적 이념 등의 광풍에 휩싸이면 절대적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색해 짐. "예수와 복음, 십자가와 사랑"을 늘 찾아가야 함. 내가 말씀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이끌도록 해야 함. 바울을 포박한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에게 묻지 않음. 그저 바울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확정하고 행동함. 이때 예루살렘의 리더들은 보이지 않음. 혹시라도 제2의 스데반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는 걱정 때문? (그 사건 이후 교회가 많은 탄압). 바울은 예루살렘을 개입시키지 않음.
그런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여기게 되는 걸까? 논쟁과 비난이 멈추지 않을 것임. 여러 그룹에서 많은 비판이 있겠지만....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사자 바울"임. 이 상황조차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들이는 바울. 우리는 보통 '결과주의자'이다.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이끄심'이다. 혹 나의 발걸음이 나쁜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함. 바울은 오히려 여유 만만. 천부장이 간신히 구해줬는데도 자신을 체포한 사람들에게 설교하고자 함. 당시 가장 언어파워가 있었던 헬라어를 바울은 능숙. 천부장이 유대인이면서도 헬라어를 잘 하는 바울에게 놀람. 언어 때문에 놀라서 설교 허락. 그런데 설교할 때에는 모국어로. 2,3,4세 디아스포라 유대인인데, 히브리어(모국어, 아람어..시리아어)로 말하기 시작하자 청중들이 놀람. 어떻게 저렇게 잘할까? 그들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움직이도록 '간증설교'를 함. 자신이 어떻게 배신자가 되었는지의 과정을 간증. 이때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바울의 가슴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확실. 바울의 마음에는 '사랑의 불'이 있었을 것임. (롬9:3) - 너무 감동적인 말씀(꼭 찾아봐라). 139년 된 교회에 목사님이 말씀 전하러 갔음. 겁이 없이 말하는 편. 139년 때문에 큰 눌림이 있었음. '하나님, 사랑하게 해 주세요. 여기 있는 영혼 영혼이 연약한 사람임을 잊지 않게 해 주세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잊지 않게 해 주소서.' 사랑이 품어졌음. 바울의 힘있는 설교는 마음에 사랑의 불을 잃지 않는 것 때문. 그 설교는 한 명의 영혼이라도 얻기 위한 반 발짝. 바울은 '탁월한 학문적 배경을 설명. 그때 심한 핍박자. 공문을 가지고 다닌 공인 예수장이 핍박자. 그런 자신에게 어느 날 불가항력적 일이 생김.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다메섹의 겪은 일 설명. "사울아, 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나사렛 예수'니라. 그 진짜 이름. 인생을 바꾼 그 이름. 진리인 그 이름." "내가 뭐하면 되겠습니까?" 마치 갑자가 버스를 갈아타듯이. 아나니아로부터 눈을 뜸. 죄악의 눈이 감기고 성령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눈이 떠짐. 우리의 예배가 바로 다메색 도상이어야 함. 예배 전에는 나를 통해 누군가가 죽어나가는, 예배 후에는 사람을 살리는. 어둠에서 빛, 죽이는 일에서 살리는 일로, 또 다시 반 발짝.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명령(22:18~21). 여러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도 떠나라고. 왜? 일단은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동시에 바울아 너가 빚진 자들에게 고백하야 시원한 마음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이방인에게 전하는 일이 진짜로 빚을 갚는 일, 진짜 화해를 하는 일이 된다는 의도일 것 같음. 어쨌든 바울은 획기적으로 변화했음. 세상에서 열심이 교회에서 열심으로 바뀌는 것이 혹시 필드만 바뀐 것,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이 될 수도 있음. 인정 받는 곳이 아니라 어딜가나 핍박 받는 곳으로 가는 바울은 정말로 '변화'한 사람임.
동시에 유대인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함. 당시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인간적으로 바울이 매우 배신자로 여겨질 수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중에서 크리스천이 많이 나왔음. 바울이 그런 채무의식으로 설교하려고 하는 것임.
바울은 사실, 청중은 거짓. 사실이 거짓으로 들리는 이유는 내 안의 두터운 장벽이 있기 때문. 내 확신을 보장받기 위해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설명해 줘야 함.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두터운 장벽의 확신으로 마땅히 내가 들어야 할 것에도 귀를 막게 됨. 그렇지 않으면 얄팍한 편견의 희생이 될 가능성이 많음. 부부 안에서도 목표는 같은데, '내 방식'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때문에 문제. 그럼 어떻게? 내 방식을 버려야 함. 영원한 평행선을 인식하고 대화하며 어떻게 조금이라도 반 발짝 전진해야. 존재 대 존재는 건들지 말고 그 존재의 생각과 저 존재의 생각이 싸우게 하라.
1,2,3차 선교 동안 바울은 열심히 내딛었음. 그런데 오늘을 시점으로 죽을 때까지 끌려 다님. 중요한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끌려 다님. 진짜 아름다운 모습은 '남편이 아내에게 끌려다니는 것. 그런데 억지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끌려 다녀야 아름다움.' 수동적 적극성'. '적극적 수동성'. 반 발짝을 걷다보면 크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