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6.
서리
빈약하다. 비닐하우스 내의 두 평짜리 채소밭. 쌈채소 중에서 청상추가 가장 키가 작으며 상추대조차도 약하다. 이유는 모른다. 그나마 적상추는 튼실하지만, 넓은 아래 잎을 뜯은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먹을 게 없다. 손톱 길이보다 작은 여치가 비트잎 연한 부분을 갉아먹어 치우는 중이다. “이런 나쁜 놈들!” 그래서인지 내 비트가 씨알이 제일 적어 보인다. 한 보름 정도만 참아주면 좋으련만. 녹색의 애벌레가 적겨자잎을 기어 다니며 구멍을 뚫어 파먹고 있다. 얼마나 먹었으면 애벌레 색이 이토록 고운 녹색일까?
친환경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친환경과 유기농의 차이도 아직은 애매모호하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병충해 예방법에 대해서 배운 바가 없어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목초액을 사용하거나 식초를 뿌리라고 숱하게 들었다. 그런 방법으로는 효과 없다는 이야기도 주거니 받거니 한다. 역시 다른 교육생들의 흉내를 낼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눈치껏 기다려야 한다.
돼지고기 수육에는 쌈채소가 필수다. 아삭이상추, 적상추, 청상추, 비트채, 적겨자채, 청경채, 루꼴라, 고수, 비타민채, 케일 등 쌈채소가 있어야 궁합에 맞는 쌈장을 준비할 게 아닌가. 그런데 없다. 내 밭에서는 뜯을 만한 마땅한 쌈채소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갖 채소들이 즐비하다. 어른 손바닥보다 큰 상추가 유혹한다. 신선한 비트잎이 한들거리며 가져가 달라고 하트를 날리는 듯하다. 마음이 흔들린다. 양심으로 세운 자존심이 무너져 내린다.
“안녕하세요. 제가 그 집 겨자채 서리했어요”
“아이쿠! 잘하셨어요. 다른 것들도 좀 뜯어가세요”
장바구니에 가득한 쌈채소는 주인이 여럿이다. 여기서 적상추 조금, 저기는 청상추 스무 장, 조기는 겨자채 열다섯 장. 돌아가며 조금씩 조금씩 서리해서 담으니 양이 제법 된다. 찜찜한 마음으로 비닐하우스 밖으로 나오는데 쌈채소 주인들이 여기저기서 밭일하고 있다. 큰소리로 서리했음을 알리니 웃으면서 잘했다고 한다. 진짜로 잘한 일인가. 서리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떼를 지어서 주인 몰래 남의 과일, 곡식, 가축 따위를 훔쳐먹는 장난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장난이라고 한다. 그래서 잘했다고 하는가?
나도, 서리 당하고 싶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없이 물주고 풀 뽑아서 싱싱하게 자란 쌈채소를 자랑하고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쌈채소에 질린 교육생들이 내 밭을 탐할 일은 없어 보인다. 눈을 돌려 감자밭이나 옥수수밭, 고구마밭에서 서리 당하는 욕심을 가져 본다.
첫댓글 여기저기 다 나눠주고 없는거지
ㅍㅎㅎ
자세한 건 세세히 밝힐 수 없음을 양해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