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업원 (1)-국가 공인의 비구니도량 / 민순의의 조선의 스님들
왕실 여인들이 출가해 수행한 비구니 도량
높은 신분 여성은 가문 몰락하거나 남성 묵인 전제로 출가
정업원, 국왕 행차 이뤄질 정도로 국가권력 비호 받는 사찰
비구니스님 교종 최고 계위 승통 법계로 주지소임 가능성
지은원 소장 관경변상도에 나타나는 비구니와 여성 신도 모습
(추보경, ‘고려시대 비구니 사찰의 존재와 운영’, 영남대 석사학위논문, 2014, 26쪽에서 캡처)
정종 1년(1399) 9월 태상왕 이성계와 계비 신덕왕후 강씨 사이의 딸
경순공주(‘실록’에서는 경순궁주(慶順宮主)로 명명되었다)가 출가하였다.
‘실록’으로 확인되는 조선 왕실의 첫 번째 출가 사례였다.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가 실각한 지 1년여만의 일이었다.
경순공주와 동복형제인 이방번과 이방석은 물론 남편인 이제(李濟)까지
정변 당시 살해당한 마당에 공주의 입장에서는
출가하여 비세속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차라리 안전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친(至親)들의 죽음으로 야기된 속세에 대한 무상감이
그를 출가의 길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실록’에는 이 일이 아버지인 이성계의 결정에 의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성계는 머리를 깎는 딸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臨剃髮, 泫然泣下]고 한다.
이날의 기록은 몇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첫째, 조선시대에 왕족 등 지체 높은 신분의 여성들은 정변 등의 이유로
가문이 몰락하고 의지할 남성이 없게 되었을 때 출가의 길이 고려되었다.
둘째, 이러한 경우 고위급 여성들의 출가는 남성의 결정에 의하거나
최소한 남성 사회의 묵인이 전제되는 것이었다.
셋째, 이들의 출가란 단지 사찰에 몸을 의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머리를 깎고[剃髮] 비구니스님이 되는 것[爲尼]이었다.
비구니가 된 경순공주가 어느 사찰에 기거하였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출가한 지 8년 뒤인 태종 7년(1407) 그가 죽었을 때
임금이 덕수궁으로 가 조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태종실록’ 14권),
당시 덕수궁은 태상왕 이성계가 머무르던 이궁(離宮)이었으므로
태종의 조문 행차는 경순공주의 빈소를 향한 것이라기보다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부왕을 향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1차 왕자의 난의 영향으로 출가한 왕실의 여인은 경순공주뿐만이 아니었다.
공주의 작은올케가 되는 소도군(昭悼君) 이방석의 부인 심씨도 출가하였는데,
경순공주보다 오래 살았던 심씨가
태종 8년(1408) 정업원의 주지가 되었다는 기사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씨가 다른 절에 있다가 정업원에 주지로 부임되어 온 것일 수도 있지만,
출가사찰을 정업원으로 두고 그곳에서 지내다가 주지가 된 것이라면
경순공주의 출가사찰도 정업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경순공주의 수명이 좀 더 길었다면 태종 8년 정업원의 주지는
심씨가 아니라 경순공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업원(淨業院). 업을 깨끗이 닦는 사원. 사찰의 이름치고는
그 의미가 자못 속 깊은 이 절은 사실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비구니 도량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의종 18년(1165) 왕이 정업원으로 이어한 바 있고(‘고려사’ 18권)
고종 38년(1251)에는 “박훤(朴暄)의 집을 정업원으로 만들어
성 안의 여승[尼僧]들을 모아 살게 하고 바깥 담을 쌓아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이로 보건대 고려시대의 정업원은 비구니의 거주지를 제한하여
일반인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사찰로서,
국왕의 행차가 이루어질 정도로 왕실 또는 국가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그 비호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충숙왕 10년(1323)에 조성된 일본 지은원(知恩院) 소장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는 그 화기(畵記)에 발원자 중 한 명으로
‘정업원 주지 승통(僧統) 조□(祖□)’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이는 당시 정업원에도 주지가 엄연히 존재하였고,
그 지위는 승통의 법계에 해당하는 것이었음을 말한다.
고려의 승정제도에서 승통은 교종 최고의 법계였다. 둘 중 하나다.
고려시대 정업원은 비구니 사원이지만
그 주지 직에는 승통의 법계를 지닌 비구가 임명될 수 있었던가,
정업원의 주지에는 응당 비구니가 임명되지만 그 정도 승직의 비구니에게는
여성일지라도 교종 최고의 계위인 승통의 법계가 주어질 수 있었던가.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전자의 가정은 비구니 도량이라는 정업원의 취지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승려의 법계가 오직 남성 비구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는 편견을 전제한다.
비록 승려의 법계 취득이 승과 입격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하더라도,
또 승과 입시의 기회가 과연 비구니에게도 주어졌을까 의심스럽다 하더라도,
특수한 승직을 맡은 비구니에게 법계를 수여하는 선례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 개국 당시 많은 제도가 그러했듯이 정업원도 고려의 제도를 계승했을 요량이 크다.
조선 최초의 정업원 주지는
고려 공민왕의 후궁이었던 혜비(惠妃) 즉 혜화궁주(惠和宮主) 이씨였다.
태종 8년 그가 사망하자 이방석의 과부로서 일찍이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있었던 심씨가 정업원의 주지 직을 계승하였던 것이다.
정업원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세종 23년(1441) 조정의 논의에서 “…
이제 창덕궁과 수강궁은 모두 종묘의 주맥(主脈)에 매우 가까워서
비록 좌우에 끊어짐이 없다 하나,
정맥(正脈)이 있는 곳은 적이 파헤쳐지고 손상된 곳이 있으니,
정업원 동쪽 언덕으로부터 종묘 주산에 이르기까지 정척(正脊)의 좌우 20~30보 되는 곳에
소나무를 재배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청이 있어(‘세종실록’ 92권, 23년 5월19일),
정업원이 창덕궁 뒤쪽의 산등성이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왕궁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조선의 정업원이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왕실 또는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는 공인사찰이었음을 의미한다.
정업원에 대한 국가의 대우와 관리는 세종 30년(1448) 11월 정업원을 중부학당으로 삼고
그 소속 노비를 타 기관에 이관하자는
예조판서 허후(許詡)의 의견이 논의되었던 때에도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정업원에 국가로부터 공노비가 지원되고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업원의 소속 노비는 이후 모두 전농시(典農寺)로 이관되는데,
서울의 노비가 484명에 그 외 전국적으로 산재한 수는 3025명에 달하는 규모였다.
사실 태종 때 전국의 사원전을 정비하던 와중에도 정업원의 토지는 존속시키고
매달 분향 비용으로 4석의 요(料)를 지급했던 터였다(‘태종실록’ 24권, 12년 7월29일).
세종 초 사찰노비를 혁파했을 때에도 정업원의 노비는 유지되었다가
세종 30년에 이르러서야 이처럼 타 기관으로 이관 배치되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2022년 6월 22일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