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모더니즘 시
1930년대 시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은 모더니즘 시의 대두라고 랄 수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우리 시단의 주변에는 재래와 전통 서정시가 지닌 감읍벽이나 당대 계급주의문학이 갖는 투쟁성, 목적의식에서 한 걸음 탈피하여, 언어의 미적 가공과 신선한 이미지의 제시 등을 통해 시 속에 시대의 변화에 걸맞은 감각적 표현을 담아내려는 노력들이 있어왔다. 주목해야 할 점은 프로시단이 카프라는 짜임새를 갖춘 조직을 중심축으로 하여 시종 집단적인 운동의 형태를 유지했다고 한다면, 이 시기 모더니즘 시운동의 경우는, 구인회라는 동호인적 성격을 지닌 단체가 있긴 하였지만, 집단적이라기보다는 주로 시인 개개인의 활동들이 주축을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정지용 등에 의해 자연발생적인 형태로 추구되었던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1930년을 전후하여 대학에서 영미 모더니즘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한 김기림과 최재서 · 이양하 등이 문단에 진출하면서, 이들의 이론적 뒷받침에 힘입어 시단의 중심 세력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주로 서구 자본주의 문명의 세례를 받은 도시 1세대들로서, 도시 생활 속에서 그들이 경험하게 된 문화적 충격을 새로운 감각과 기법 속에 담아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또한 서구 문예의 흐름과 최신 동향에도 일정한 관심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해보고자 하는 쪽이었다.
본래 서구 시단에 있어서 모더니즘이란 크게 작품 창작과 해석에 있어 이성 내지는 질서의식을 존중하는 영미 중심의 신고전주의적 성향과, 이성이나 질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유럽 대륙의 신낭만주의적 성향으로 대별된다. 이 가운데 1930년대 우리 시단에 보다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영미 계열의 신고전주의적 성향의 모더니즘,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미지즘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미지즘적인 경향은 문학적인 태도면에서 현실인식이나 역사의식과는 무관하게 언어 자체의 미감과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의 제시에 치중하는 사조였다. 김기림이 「기상도」를 통해서, 그리고 이상이 「오감도」 연작을 통해서 일부 문명 비판적인 내용을 그들의 작품 속에 수용하려 시도한 바가 없지 않으나, 대체로 이 당시 활동하였던 많은 모더니즘 문인들은 그런 인식에서 한 발짝 비켜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이 시절에 활동하였던 대부분의 모더니즘 시인들(김기림 · 정지용 · 김광균 · 오장환 · 장만영 등)은 영미 이미지즘에서 강조하고 있는 선명한 이미지의 제시와 참신한 언어 조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이다.
처음 이들 시인들의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는 퍽 소박한 수준의 것이었다. 그 중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김기림의 경우만 하더라도, 문단 활동 초기인 1930년대 초 얼마간은 서구문명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와, 그것에 대한 맹목적인 지향성으로 인해 경박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재래의 전통적 서정시와는 다른 시를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나쳐, 주제나 형식면에서 도리어 심하게 단순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⁹ 외래어나 이국적인 소재어들의 남발, 생경한 감각적 이미지들의 잦은 동원 등은 후대 사가들에 의해 그의 시가 뿌리 없는 코즈머폴리터니즘을 노정하고 있다는 비판을 낳게 하였던 주 요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적 한계는 정지용이나 김광균 · 장만영 · 오장환과 같은 역량 있는 신진 시인들이 모더니즘의 진영에 가담하면서 차츰 극복되어 갔다. 특히 정지용이나 김광균과 같은 경우 애초 모더니스트로서의 뚜렷한 자의식을 지니지 못한 채 출발한 것으로 보이나, 그들 시에 나타난 모더니즘적인 특성을 김기림 등이 거론하면서 이에 호응하여 차츰 의식적인 모더니스트로서 변모하여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러갔구나!
-정지용, 「유리창 • 1」(1930) 전문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을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양 엉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김광균, 「와사등」(1938) 부분
각각 정지용과 김광균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위 인용시들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앞서 김기림에게서 지적되었던 모더니즘의 초기적 한계들이 상당 부분 기능적으로 극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시적 이미지를 지닌 일상적이며 구체적인 소재들을 시어로 적절히 채용하면서 시인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토로하는 대신 이러한 소재들을 통해 우회적이며 절제된 표현기법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결국 시작에 있어서 시인의 상상력의 수준과 구성 능력의 치밀성을 대변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들 시작품은 영미의 이미지스트들이 강조한 '지적 정서적 복합체'에 부합되는 것들로서, 당대 시단이 낳은 정교한 조직적 틀을 갖춘 가편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외에도 장만영 · 오장환 · 장서언 · 백석 등이 이 시절 시단의 대표적인 이미지즘 시인들로 기억되고 있다. 한국에 있어서 이미지즘 시는 영미의 경우와는 달리 낭만적 · 감상적 요소가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원래 영미 이미지즘 운동에서 말하는 이미지란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등이 강조했다시피 건조하고 견고한dry and hard, 즉 가급적이면 감정과 정서를 배제한 이미지를 뜻한다. 그러나 1930년대 우리 시단은 위 두 시인의 인용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정서적 측면을 이미지화하여 표현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는 당대 우리 모더니즘 시단의 독자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중요하게 인식될 필요가 있다.
한편, 이러한 전반적인 모더니즘 진영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비롯한 『삼사문학』의 일부 동인의 경우¹⁰는 1920~1930년대 유럽 대륙에서 유행하던 초현실주의적인 시작품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이상李箱의 경우를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 문학 단체인 구인회에 가입하여 김기림 · 정지용 등과도 교유 관계를 유지했던 그는,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초현실주의에서 소개하는 자동기술이나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한 시들을 주로 발표하면서 당대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문단의 이색적인 존재로, 이전까지는 결코 시에 사용될 수 없었던 수식이나 기호까지를 자신의 시에 도입하고, 일상의 논리적인 사유로는 이해하기 힘든 구절들을 반복한다거나 고의로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등, 시종 난해한 수법으로 인해 그의 당대는 물론 이후로도 한참 동안 지속적인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 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 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헤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 「오감도 시 제1호」(1934) 전문
연작시 「오감도」의 제1호인 위의 작품은 발표 당시부터 그 해석을 둘러싸고 문단과 학계에 다양한 화제와 추측을 불렀다. 게다가 당시 이 작품을 대하는 일반인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미쳤다’라는 것이었다. 이후 제15호까지 발표되었으나, 독자들의 빗발치는 비난과 항의로 더 이상의 연재를 지속하지 못하고 결국 중단되고 만다. 그런 사실에 대해 이상이 보인 반응이란 아쉬움과 불만에 가득 찬 것이었다.¹¹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그가 이와 같은 난해한 시들 속에서 자본주의 문명의 특징 및 그 위기적 징후를 예리한 눈길로 읽어내었으며, 이와 관련된 자의식 분열의 위기감을 초현실주의에 입각한 독특한 방식으로 표출해내려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당시 문단에 단편적이나마 수용되었던 유럽 대륙의 모더니즘 사조로는 다다이즘과 미래파, 입체파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다다이즘의 경우 초기 계급주의문학에 경도되기 이전의 임화나 김화산 · 고한승 등에 의해 시도된 바 있으며, 미래파는 김기진 · 양주동 · 김기림 등의 산문과 시에, 그리고 입체파의 경우는 김기림이나 정지용의 일부 시들을 통해 그 영향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¹²
------------------
9 이 점에 대해 김용직이 새로운 것을 향한 김기림의 맹목적인 편향성이 또 다른 감상적 태도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평가한 것은 적절한 지적이라 판단된다. 김용직, 「모더니즘의 시도와 실패」, 『한국 현대시 연구』, 일지사, 1979, 284쪽.
10 이시우 · 정현웅 · 한천 · 신백수 · 김정도 등.
11 참고로 당시 이상이 보인 반응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모르는 것은 내 재주도 모자라겠지만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보아야 아니하느냐………….” 이상, 「오감도 작가의 말」, 「이상 문학 전집』 3. 문학과지성사, 1992, 353쪽.
12 이 부분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오세영 「한국 모더니즘 시의 전개와 그 특징」 『20세기 한국시 연구』 새문사, 1987 참조
『한국 현대 시문학사』 이승하 외 지음
2025. 1. 27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