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이미지 이론에 입각한 <시민 케인> 분석은 잠재성(the virtual)과 현실성(the actual)이라는 개념의 식별 불가능성에 관한 영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잠재적이라는 것은 가상적인(virtual) 것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이 개념의 핵심은 "현실화 되지 않은(not yet actualized) 것도 실제(the real)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 케인>에서 '장미 꽃봉오리'라는 수수께끼 같은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케인이라는 인물의 정체성과 그 단어의 의미를 찾기 위한 한 기자의 추적 과정은 케인이 살아온 삶의 우연성과 그의 삶을 평가하는 주변 인물들의 현실적 증언들의 식별 불가능성을 증명해 준다. 현실적인 이미지로서의 케인의 삶의 다른 단편이 역시 현실적 이미지로서의 삶의 다른 단편의 잠재태가 되는 방식으로 잠재태와 현실태가 식별 불가능하게 되는데, 이는 케인의 삶에 대해 증언하는 각각의 주변 인물들이 케인에 대해 일치하지 않는 견해를 내놓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를 명확히 식별 가능한 명제로 환원시킬 수는 없기에,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그들 증언들 모두를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케인이라는 인물의 삶의 단편들 전체가 현실화된 형태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은 잠재성과 현실성의 개념 짝이 아닌 가능성(the possible)과 실제성(the real)의 개념 짝에 주목하고 있는 영화이다. 한 살인 사건과 그에 대한 증언들로 구성된 <라쇼몽>에서, 네 인물들의 서로 다른 네 가지 증언들은 현재의 재판 과정을 통해 플래시백의 형식으로 제공된다. 물론, 영화가 이들 네 증언들 중 어느 것이 진실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지는 않기에, 우리는 특정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에 관한 문제, 한 사건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과 법적인 판결이 과연 얼마만큼이나 정당한지에 관한 문제 등 수많은 철학적인 질문들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네 증언 중 어느 하나도 궁극적인 진실로서 주어지고 있지 않기에, 그리고 네 증인 또한 모두 각각의 증언들 속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기에, 우리 관객들은 어떤 캐릭터와도 쉽사리 공감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한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목격하고 또 경험하게 된다. <라쇼몽>의 열린 결말 역시 네 증언 중 어느 하나가 진실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 혹은 역으로 네 증언 모두가 거짓일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의 관점이라는 문제가 적극적으로 실험되고 있는 모습이 엿보이는 것이다.
케인의 삶의 몇몇 현실화된 단편적인 양상들이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요소들과 함께 케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던 것과는 달리, 만약 <라쇼몽>에서 제시된 네 가지 관점 중 하나의 관점이 옳은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나머지 세가지 관점들은 필연적으로 옳지 못한 진술이 되어 버린다. 네 가지 관점은 서로가 서로에게 모순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각각의 관점은 다른 관점들과 명백히 식별 가능한 것으로 존재하고,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는 논리적인 모순에 기초하고 있다. 어떤 증언 혹은 어떤 관점이 옳은 것인지 열려 있는 상태라면 네 관점은 모두 '가능성'이 있는 관점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느 한 관점이 옳은 것으로 판명된 이후라면 그 한 관점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모두 '불가능한' 것, 따라서 '실제성'을 결여한것이 되어 버린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민 케인>이 잠재성과 현실성이라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제시했던 것에 비해서, <라쇼몽>은 가능성과 실제성이라는 개념을 영화화한 것이다. 따라서 잠재적인 것의 우연성과 식별 불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시민 케인>이 보다 적절한 영화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잠재성과 현실성이라는 다소 어려운 철학적 주제를 꺼내 든 이유는 바로 영화가 '현실의 반영'이냐, 아니면 '반영의 현실'이냐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앞서 꾸준히 살펴보아 왔던 것처럼, 카메라를 들어 세상을 바라보고 그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여 재현 혹은 재구성하는가는 궁극적으로 사실주의와 형식주의의 차원으로까지 이어진다. 영화적 사실주의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앙드레 바쟁이 애초 우리에게 던져 준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자 반영의 현실이다." 현실의 반영을 위해서 사실주의적 전통이 마련되어 왔고, 사실주의 전통 아래에서 딥포커스와 미장센이라는 영화적인 형식들이 발전해 왔으며, 그것이 형식주의 전통과 맞물리면서 더욱더 정밀한 '현실의 반영'을 위해 이야기 전달상의 파격적 진행 형식이 나왔고, 현실의 재현보다는 재구성에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된 후에는 이미지 자체에 주목하는 경향이 나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