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지대본위화폐' 시대를 상상한다⑨ㅡ헨리 조지의 나라, 미국은 무엇을 잊었나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AI 동료들
지난 회에서 원화가 이미 지가본위 화폐임을 짚으면서, 우리 사회의 지공주의 논의를 언급하며 헨리 조지의 이름을 잠깐 스쳤다. 이번에는 그 사람의 나라로 간다. 오늘의 세계 화폐질서를 쥐고 있는 나라이면서, 뜻밖에도 이 사상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미국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밝혀둘 것이 있다. 지대를 사회가 환수하자는 이 사상은 미국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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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의 베스트셀러
헨리 조지는 1839년 필라델피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학업을 그만두고 선원과 인쇄공을 전전하다 언론인이 된 인물이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철도 건설이 토지의 가치와 지대를 끌어올리는데, 그 상승 폭과 속도가 임금 상승을 훨씬 웃돌아 일반 대중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879년에 펴낸 『진보와 빈곤』이 그 결실이다. 출판사가 거부해 처음에는 자비로 500부만 찍었던 이 책은, 19세기 말까지 영어로 쓰인 논픽션 가운데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되었다. 메시지는 단순했다. 부의 불평등한 분배의 가장 큰 원인은 토지 소유의 불평등이니, 토지 소유에서 생기는 불로소득을 세금으로 환수하고 다른 세금은 폐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책상에만 머물지 않았다. 1886년 11월 2일 뉴욕시장 선거에 연합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민주당의 에이브럼 휴잇에게 지긴 했으나 공화당 후보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앞질러 2위를 기록했다. 훗날 미국 26대 대통령이 되는 인물을 토지개혁론자가 눌렀던 것이다.
여기서 최근의 일 하나를 겹쳐볼 만하다. 139년이 지난 2025년, 같은 도시에서 서민 생활고 해결을 핵심 공약으로 내건 후보가 뉴욕시장에 당선되었다. 조란 맘다니다. 주거비 문제가 다시 그 도시의 중심 의제가 된 것이다. 헨리 조지가 던진 물음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남아 있는 흔적들
그러니 토지가치세는 유럽에서 수입한 이론이 아니다. 미국이 세계에 내보낸 사상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펜실베이니아의 여러 도시는 건물보다 토지에 훨씬 높은 세율을 매기는 이단계 재산세를 오랫동안 운영해왔다. 건물을 지으면 세금이 늘어나는 통상의 재산세와 달리, 땅을 놀리면 세금이 늘고 잘 쓰면 부담이 줄어드는 구조다. 도심 공동화를 막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가 여럿 나왔다.
더 주목할 것은 알래스카다. 이 주는 석유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부를 기금으로 적립해 그 운용 수익을 모든 주민에게 해마다 배당한다. 반세기 가까이 이어져온 제도이고, 정치적으로도 굳건하다. 자원에서 나오는 지대를 시민에게 직접 나누는 일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세계적 사례가 미국 안에 있는 것이다. 앞서 제안한 토지배당을 설명할 때 이보다 나은 예를 찾기 어렵다.
좌우를 가로지르는 논거
흥미로운 것은 이 사상이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장주의 경제학의 대표 격인 밀턴 프리드먼이 토지가치세를 "가장 덜 나쁜 세금"이라 평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논리는 이렇다. 노동에 세금을 매기면 일할 유인이 줄고, 자본에 매기면 투자가 위축된다. 그러나 토지는 공급이 고정되어 있으니 세금을 매겨도 땅이 줄어들지 않는다. 생산을 위축시키지 않는 유일한 세원인 셈이다.
그러니 미국에서 이 논의는 좌우 어느 쪽 언어로도 말할 수 있다. 불로소득 환수라는 정의의 언어로도, 시장을 왜곡하지 않는 효율적 과세라는 시장의 언어로도.
그런데 오늘 미국의 화폐는 무엇에 기대는가
이제 현실로 오자. 미국은 자기가 낳은 사상을 잊었을 뿐 아니라, 정반대의 화폐질서를 세웠다.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할 때는 반드시 무언가를 자산으로 사들인다. 그 자산이 곧 담보다. 연방준비제도가 보유한 자산의 양대 축이 무엇인가. 국채와 주택저당증권이다.
국채는 앞으로 걷을 세금을 근거로 한 약속이고, 주택저당증권은 주택담보대출을 묶은 것이니 결국 앞으로 발생할 지대를 근거로 한 약속이다. 즉 달러의 담보는 아직 걷지 않은 세금과 아직 오지 않은 지대다. 앞선 회들에서 중국의 출양제를 두고, 한국의 주택담보 신용창조를 두고 했던 이야기가 세계 기축통화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미국은 국채본위와 지가본위를 겸하고 있다.
왜 자기 돈을 찍는 나라가 빚을 지는가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짚어야 한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40조 달러를 넘어섰고, 그 이자만 해마다 1조 달러를 웃돌아 국방비를 앞질렀다. 그런데 미국은 달러를 발행하는 나라다. 논리적으로는 빚질 이유가 없다.
제도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재무부는 화폐를 발행하지 않는다. 발행은 연방준비제도가 하고, 재무부는 세금과 국채로만 돈을 조달하도록 법이 정해두었다. 연준은 재무부에서 국채를 직접 살 수도 없고 반드시 시장을 거쳐야 한다. 발권력을 정치에서 떼어놓겠다는 취지였고, 그 명분에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대가가 있다. 자기 돈을 자기가 찍을 수 있는 나라가 굳이 이자를 물고 빌려 쓰는 구조가 된 것이다. 그 이자는 누구에게 가는가. 흔히 떠올리는 것과 달리, 미국 국가부채의 채권자는 대부분 미국인 자신이다. 8조 달러는 정부가 사회보장 신탁기금 등 자기 자신에게 진 빚이고, 나머지 32조 가운데 21조가 국내 채권자 — 뮤추얼펀드, 연기금, 은행, 개인, 그리고 연준이다. 해외 보유분은 3분의 1이 채 안 되며 그중에서도 일본과 영국이 중국보다 많다.
즉 해마다 1조 달러의 이자는 세금으로 걷어 국채를 가진 이들에게 넘겨주는 돈이다. 국채를 많이 가진 쪽은 대체로 자산 상위층과 금융기관이니, 이 흐름은 역진적 재분배다. 발권 이익이 국고가 아니라 채권 보유자에게 흘러가는 구조 — 한국에서 지주와 은행에게 흘러가는 것과 형태만 다를 뿐 같은 일이다.
앞선 회에서 짚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논의가 겨냥하는 것이 바로 이 구조다. 화폐 발행 권한을 공공으로 되돌리면 이자를 물고 빌려 쓰는 통로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다만 그렇게 하고 나서도 남는 물음이 있다. 그 화폐를 무엇에 근거해, 얼마나 발행할 것인가.
국가로서는 잃지만 시민으로서는 얻는다
그렇다면 미국이 이 구상을 받아들일 이유가 있는가. 국가로서는 없다. 기축통화 특권과 그것을 떠받치는 군사·금융 패권을 내려놓는 이야기이니 명백한 손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기축통화 특권의 이익은 미국인에게 고르게 분배되었는가.
달러가 강세를 유지하는 동안 수입품은 싸졌고 소비자는 그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같은 기간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자본은 생산이 아니라 자산가격 상승으로 흘렀고, 그 이익은 해안의 금융 중심지에 집중되었다. 러스트벨트의 쇠락과 월가의 번영은 같은 구조의 앞뒷면이다. 시뇨리지의 이익도 마찬가지다. 국고로 들어가 국민 전체에게 쓰이는 대신 채권 보유자에게 이자로 나갔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미국 시민 다수가 기축통화 체제에서 실제로 얻은 것은 생각보다 적다. 이 논지를 세우면 "미국만 손해 보라는 이야기냐"는 반박에 답이 된다. 지대본위는 미국을 이기자는 제안이 아니라, 미국 시민이 자기 나라의 부를 되찾는 방법에 관한 제안이 될 수 있다.
갈리는 지점
미국 안에서도 이해는 엇갈린다.
잃는 쪽이 있다. 국채와 주택저당증권을 축으로 돌아가는 금융 부문, 부동산 자산가와 대형 임대사업자, 국채 이자를 받는 자산 상위층. 그리고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가계 자산의 상당 부분이 주택에 묶여 있는 중산층의 노후 불안 문제도 그대로 생긴다.
얻는 쪽도 분명하다. 무주택 임차 가구, 자산 형성의 입구를 찾지 못하는 청년층, 그리고 뜻밖에도 제조업 지역이다. 신용이 부동산 담보에서 생산 부문으로 옮겨간다면 그 수혜지는 해안 대도시가 아니라 내륙이다. 미국의 산업 재건을 말하는 이들에게 이것은 낯선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다만 정직하게 덧붙이면
패권을 스스로 내려놓은 나라는 역사에 없다. 영국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소진된 뒤에야 파운드의 자리를 넘겼다. 미국 내부의 지지가 아무리 넓어져도 그것이 국가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데는 위기라는 계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현실적인 경로는 연방 차원의 화폐 논쟁이 아니라 도시와 주 차원의 주거 논쟁일 것이다. 주택가격과 임대료가 소득을 훨씬 앞질러 오르면서 주거는 미국 정치의 초당적 현안이 되었고, 도시계획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운동 안에는 토지가치세 지지자가 적지 않다. 펜실베이니아의 사례가 다른 주로 번지고, 알래스카의 배당이 다른 자원 지대로 확장되는 방식. 그렇게 밑에서부터 쌓이는 편이 훨씬 승산이 있다.
잊은 것을 상기시키는 일
정리하자. 미국은 지대 환수라는 사상의 발원지이면서, 오늘날 지대를 자본화한 자산을 담보로 세계 화폐를 발행하는 나라다. 이 역설이 미국의 자리다.
그러므로 이 연재가 미국에 대해 말하려는 바는 이렇다. 우리는 미국에 낯선 것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잊은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헨리 조지가 뉴욕시장 선거에서 2위를 했던 그 도시에서, 139년 뒤 다시 주거비가 최대 쟁점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 말의 무게를 대신한다.
다음 회에서는 자원 강국들로 간다. 러시아와 걸프, 호주와 캐나다. 파내야 값이 되는 자원을 가진 나라와 남겨두는 것이 값이 되는 자원을 가진 나라가 이 기준 앞에서 어떻게 갈리는지 살펴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