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 3
가장 긴 감옥
겨울비는 저녁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잔잔해졌다.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은 마치 세월을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가는 글씨 같았다.
계곡은 말없이 흘렀고,
난롯불은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카페 안에는 대추 향기만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여인은 사진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삼십 년 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놓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더 허전해진 것 같았다.
소진은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한때는 많이 미워하며 살았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들었다.
소진도 그런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눈빛이었다.
소진은 창밖 계곡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살다 보면..."
"원망하게 되는 사람이 생기더군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도 당하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상처도 받고."
"이해할 수 없는 이별도 겪게 되고."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도..."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수없이 하늘을 원망하며 살았어요."
여인은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의 이름만 떠올려도 잠이 오지 않았어요."
소진은 대추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온기가 목을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그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조차 미웠습니다."
"잊으려고 애쓸수록 더 선명하게 떠올랐고."
"용서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화가 났어요."
그녀는 창밖의 빗줄기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어요."
"나를 가장 오래 괴롭힌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소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미움을 놓지 못했던..."
"제 마음이었어요."
카페 안은 깊은 침묵에 잠겼다.
지영은 아무 말 없이 장작 하나를 난로에 올려놓았다.
작은 불꽃이 다시 살아나며 따뜻한 빛을 비추었다.
소진은 그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움을 품고 산다는 건."
"뜨거운 숯을 손에 쥐고."
"상대에게 던질 기회만 기다리는 것과 같더군요."
"하지만..."
"그 숯에 먼저 데이는 사람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어요."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 말이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
삼십 년 동안 자신이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
바로 뜨거운 숯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놓으셨어요?"
소진은 미소를 지었다.
"쉽지 않았어요."
"지금도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창밖의 계곡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용서는."
"상대를 풀어주는 일이 아니더군요."
그리고 아주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담아 말했다.
"용서는 상대를 풀어주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을 감옥에서 꺼내 주는 일이에요."
그 순간,
카페 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계곡물도,
빗소리도,
난롯불 소리도.
모든 것이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
여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참으려 했던 눈물이 끝내 흘러내렸다.
삼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누구 앞에서 울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나는..."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그 사람들을 감옥에 가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감옥에 갇혀 있었던 건."
"바로 저였네요."
소진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지영도 조용히 휴지 한 장을 건네며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위로는 말보다 마음이 먼저 전해질 때가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한참 동안 울던 여인은 겨우 눈물을 닦았다.
창밖의 겨울비는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소진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에도 비가 오래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긴 겨울이라도,
언젠가는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찾아오듯,
용서도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가는 작은 용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그녀는 오늘의 이야기를 마음속에 새기며 조용히 다짐했다.
가장 긴 감옥은 철창으로 만든 감옥이 아니라, 미움을 놓지 못한 마음이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었다. 그리고 그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언제나 내 손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