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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신부님은 탐정》
## 제47화 ― 「백 년 된 성경책의 낙서」
주일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교중미사가 끝난 뒤에도 은솔성당 안에는 아직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성가대는 악보를 정리하고 있었고, 제대 봉사자들은 제의방과 성전 사이를 오갔다.
김맑음 프란치스코 신부는 제의를 벗어 정리한 뒤 성당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김하늘 안젤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품에는 두껍고 낡은 성경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신부님.”
“응.”
“어제 말씀드린 거요.”
하늘이 성경책을 내밀었다.
표지는 짙은 갈색이었다.
가죽은 군데군데 벗겨졌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앞표지 안쪽에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은솔본당 소장
1926년**
김맑음 신부가 책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정말 백 년 가까이 됐구나.”
“근데 여기 보세요.”
하늘이 페이지를 펼쳤다.
본문 옆 여백에 연필로 작은 숫자가 쓰여 있었다.
**23**
다른 페이지.
**북쪽**
또 다른 페이지.
**느티나무**
그리고 몇 장을 더 넘기자—
**7**
**우물**
**오른쪽 세 걸음**
김맑음 신부의 눈빛이 달라졌다.
하늘이 웃었다.
“나왔죠?”
“뭐가?”
“프란치스코 홈스 표정.”
김맑음 신부가 천천히 하늘을 바라봤다.
“그 별명 아직도 쓰니?”
“신부님 없는 데서만요.”
“지금 내가 있는데?”
“방금은 설명이었어요.”
김맑음 신부가 피식 웃었다.
---
성경책은 은솔성당 자료실에서 발견됐다.
백 년 된 성당답게 자료실에는 오래된 전례서와 교적 장부, 기념사진, 성경책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며칠 전 폭우 때문에 천장 누수 여부를 확인하던 김하늘이 정리를 돕다가 이 책을 발견한 것이다.
최병철 베드로 사무장이 성경책을 보더니 얼굴이 굳었다.
“누가 이런 귀한 책에 낙서를 했습니까?”
오미자 안나가 말했다.
“그걸 찾아내는 게 사건이죠.”
최병철이 고개를 저었다.
“낙서한 사람만 찾으면 됩니다.”
“왜 낙서했는지도 알아야죠.”
“회장님.”
“왜요?”
“또 탐정단장 하시려고요?”
오미자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미 탐정단장입니다.”
박복례 마리아가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탐정단에 월급은 나와요?”
오미자가 잠시 멈칫했다.
“마음으로 받죠.”
박복례가 말했다.
“그럼 많이 받으세요.”
김맑음 신부는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성경책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책을 아주 천천히 넘겼다.
낙서는 모두 연필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이 있었다.
본문 위에는 절대 쓰지 않았다.
모두 여백.
그것도 페이지 바깥쪽.
글자를 훼손하지 않으려 조심한 흔적이었다.
김맑음 신부가 말했다.
“책을 함부로 다룬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최병철이 물었다.
“낙서했는데요?”
“네.”
“그런데요?”
“성경 본문에는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장태식 요셉 관리장이 책을 들여다봤다.
“연필도 오래된 건 아닙니다.”
“어떻게 아십니까?”
“이 정도면 오래돼도 몇 년 안 됐어요. 오십 년 전에 쓴 연필 자국은 아닙니다.”
한서윤 세실리아 기자가 말했다.
“그럼 누군가 최근에 일부러 옛 성경책에 단서를 남겼다는 거네요.”
오미자가 두 손을 탁 쳤다.
“역시 사건.”
최병철이 한숨을 쉬었다.
---
낙서는 모두 열두 개였다.
하늘이 노트에 차례대로 적었다.
**23
북쪽
느티나무
7
우물
오른쪽 세 걸음
1974
돌담
마리아
집
봄
기다린다**
한서윤이 팔짱을 꼈다.
“암호 같아요.”
오미자가 말했다.
“23번지 아닐까요?”
최병철이 말했다.
“어느 동네 23번지인지 없잖아요.”
“북쪽이라고 써 있잖아요.”
“은솔시 북쪽에 23번지가 하나뿐입니까?”
오미자가 입을 다물었다.
김하늘이 휴대전화를 두드렸다.
“1974년 지도 같은 거 인터넷에 없을까요?”
한서윤이 말했다.
“신문사 자료실에 옛 지도 있을 겁니다.”
김맑음 신부는 ‘느티나무’라는 글자를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은솔시에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습니까?”
박복례가 즉시 대답했다.
“있죠.”
모두 박복례를 바라봤다.
“어디요?”
“북정동.”
장태식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얼마나 오래됐습니까?”
“몇백 년 됐을 겁니다.”
박복례가 말했다.
“옛날에는 그 동네를 느티나무골이라고도 했어요.”
김맑음 신부가 노트를 바라봤다.
**북쪽.
느티나무.
23.**
“북정동 옛 23번지를 찾아보면 되겠네요.”
---
한서윤은 그날 오후 신문사 자료실에서 1970년대 은솔시 지도를 찾아왔다.
현재 도로명과 지번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북정동 23번지.
지금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974년 지도에는 있었다.
느티나무에서 북쪽으로 약 백오십 미터.
작은 집들이 모여 있던 곳.
그리고 그 가운데—
우물 하나가 표시되어 있었다.
김하늘이 말했다.
“우물도 맞아요.”
김맑음 신부가 다시 낙서 순서를 살폈다.
23.
북쪽.
느티나무.
7.
우물.
오른쪽 세 걸음.
“7은 뭘까요?”
최병철이 말했다.
“7번 집 아닐까요?”
김맑음 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23번지가 있습니다.”
한서윤이 말했다.
“일곱 살?”
오미자가 말했다.
“일곱 명?”
장태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돌담 일곱 번째 돌일 수도 있죠.”
사람들이 그를 바라봤다.
장태식이 목덜미를 긁었다.
“그냥 생각해본 겁니다.”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가보면 알겠죠.”
이도현 형사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어디를 가는데요?”
김맑음 신부가 돌아봤다.
“도현 씨.”
“또 어디 갑니까?”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 서로 존댓말이었다.
오미자가 말했다.
“보물 찾으러요.”
이도현의 얼굴이 굳었다.
“보물?”
“백 년 된 성경책에 암호가 있어요.”
이도현은 김맑음 신부를 바라봤다.
“설명해주시죠.”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아직 범죄는 아닙니다.”
“그 말을 들으면 더 불안합니다.”
---
북정동 옛 23번지.
지금은 빈터였다.
오래전 집들은 모두 철거되고 작은 공원 조성 예정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한쪽에 느티나무는 그대로 있었다.
거대한 나무였다.
굵은 줄기와 넓은 가지.
오래된 동네가 사라진 뒤에도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장태식이 말했다.
“우물도 남아 있네요.”
수풀 뒤쪽.
낮은 돌담 근처에 오래된 우물이 있었다.
지금은 안전을 위해 철판으로 덮여 있었다.
김하늘이 성경책의 낙서를 읽었다.
“우물.”
그리고 다음.
“오른쪽 세 걸음.”
모두 우물 오른쪽으로 세 걸음을 걸었다.
하나.
둘.
셋.
낮은 돌담 앞이었다.
오미자가 말했다.
“다음은 7.”
최병철이 돌담을 보았다.
“설마 진짜 일곱 번째 돌?”
장태식이 쪼그려 앉았다.
돌담 아래쪽의 돌을 하나씩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일곱 번째 돌에는—
아주 희미하게 작은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김하늘이 숨을 삼켰다.
“진짜예요.”
김맑음 신부는 돌을 만지지 않고 자세히 살폈다.
돌 아래 흙은 주변보다 조금 부드러웠다.
누군가 최근 파헤친 흔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무언가 묻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도현이 말했다.
“잠깐.”
모두 멈췄다.
“땅에서 뭐가 나올지 모릅니다.”
오미자가 말했다.
“금괴?”
“회장님.”
“왜요?”
“시신일 수도 있습니다.”
오미자의 얼굴에서 기대가 즉시 사라졌다.
“금괴가 낫겠네요.”
김맑음 신부가 말했다.
“둘 다 아니면 더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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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입회 아래 땅을 조심스럽게 팠다.
약 삼십 센티미터 아래.
삽 끝에 금속이 닿았다.
톡.
작은 철제상자가 나왔다.
녹이 심하게 슬어 있었다.
가로 삼십 센티미터 정도.
자물쇠는 이미 삭아 있었다.
이도현이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끼이익—
안에는 금괴도 없었고 위험한 물건도 없었다.
작은 공책 두 권.
유리구슬.
딱지 몇 장.
낡은 장난감 자동차.
빛이 바랜 사진.
성모상 모양의 작은 메달.
그리고—
봉투 두 개.
한 봉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리아에게.**
다른 봉투에는—
**요한에게.**
김맑음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타임캡슐이군요.”
한서윤이 사진을 들여다봤다.
흑백사진 속에는 열두 살쯤 된 아이 둘이 서 있었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두 아이 모두 은솔성당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진 뒤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1974년 4월 21일**
그리고 문장 하나.
**쉰 살이 되면 같이 열어보자.**
김하늘이 계산했다.
“그럼 벌써 오래전에 열었어야 하는데요.”
김맑음 신부가 말했다.
“그런데 열지 못했나 봅니다.”
---
두 아이의 이름은 공책에 적혀 있었다.
**최마리아**
**강요한**
둘은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일기처럼 적은 글에는 두 사람의 작은 약속들이 가득했다.
‘어른이 되어도 친구하기.’
‘서로 결혼해도 편지 보내기.’
‘한 사람이 먼저 은솔시를 떠나도 다시 돌아오기.’
‘쉰 살이 되면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나기.’
타임캡슐은 두 사람이 열두 살 때 묻은 것이었다.
오미자가 말했다.
“친구끼리 이렇게까지 해요?”
박복례가 대답했다.
“어릴 때 친구가 더 오래 가는 법이에요.”
한서윤은 공책을 넘기다가 한 문장에서 멈췄다.
**마리아가 서울로 가면 나는 편지를 쓸 것이다.**
다음 장.
**요한이가 군대에 가면 나는 매주 기도할 것이다.**
김맑음 신부가 말했다.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한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과 나이가 있으니 해보겠습니다.”
---
최마리아는 쉽게 찾았다.
현재 일흔네 살.
세례명은 실제로 마리아.
본명은 최정숙이었다.
놀랍게도—
은솔성당 교우였다.
박복례가 이름을 듣자 말했다.
“최정숙 마리아?”
“아십니까?”
“알죠.”
박복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런데 몇 년째 미사에 안 나와요.”
“왜요?”
“딸 따라서 대전에 갔다고 들었는데.”
최정숙은 현재 은솔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몇 달 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강요한은?
본명 강태호.
그는 더 찾기 어려웠다.
한서윤이 옛 주민등록 자료와 신문 기사까지 뒤졌다.
그리고 결국—
한 줄짜리 기록을 찾아냈다.
**강태호, 1981년 캐나다 이민.**
그 뒤 흔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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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맑음 신부는 최정숙이 입원한 요양병원을 찾았다.
정숙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머리는 희었지만 눈빛은 맑았다.
김맑음 신부가 사진을 보여주자 그녀의 손이 떨렸다.
“이걸…….”
“아십니까?”
정숙이 사진을 두 손으로 받았다.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다 웃었다.
“요한이.”
“강태호 씨 맞습니까?”
“네.”
“함께 타임캡슐을 묻으셨지요?”
정숙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게 아직 있었어요?”
“네.”
“세상에.”
그녀는 사진을 쓰다듬었다.
“우리가 쉰 살 되면 열기로 했는데.”
“왜 못 여셨습니까?”
정숙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싸웠어요.”
“두 분이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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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스무 살이 넘어서도 친구였다.
강태호가 군대에 갈 때 최정숙이 배웅했고, 정숙이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 때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태호가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다.
그는 정숙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연인이어서가 아니었다.
당시 태호의 누나 가족이 먼저 캐나다에 정착해 있었고, 일자리를 알아봐줄 수 있으니 정숙도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정숙은 늙은 어머니를 두고 갈 수 없었다.
태호는 답답해했다.
정숙은 화를 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크게 다퉜다.
“나를 겁쟁이라고 했어요.”
정숙이 말했다.
“저도 화가 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다시는 보지 말자고 했어요.”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태호는 떠났다.
그 뒤 몇 번 편지가 왔다.
정숙은 처음에는 뜯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시간이 지나 화가 풀렸을 때—
주소를 잃어버렸다.
“쉰 살이 되었을 때 기억났어요.”
정숙은 창밖을 바라봤다.
“느티나무에 갔습니다.”
“타임캡슐을 찾으려고요?”
“네.”
그런데 동네는 이미 재개발 중이었다.
집도 사라지고 돌담 일부만 남아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성경책 낙서는 자매님이 하셨습니까?”
정숙이 놀라 신부를 바라봤다.
“성경책?”
“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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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원점이었다.
타임캡슐의 주인은 찾았다.
하지만 누가 최근 성경책에 위치를 적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김맑음 신부는 성당으로 돌아와 성경책을 다시 펼쳤다.
연필 자국.
숫자.
장소.
그리고 마지막 두 단어.
**봄.
기다린다.**
하늘이 말했다.
“최정숙 할머니가 쓴 게 아니면 누구죠?”
한서윤이 말했다.
“강태호 씨가 돌아온 건 아닐까요?”
“캐나다에서?”
“가능성은 있죠.”
김맑음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위치를 알고 있던 사람이어야 합니다.”
“태호 씨라면 알겠죠.”
“그렇지만 왜 직접 파보지 않았을까요?”
모두 조용해졌다.
김맑음 신부는 성경책을 덮었다.
“그리고 왜 하필 이 책이었을까요?”
최병철이 말했다.
“오래된 책이라서?”
“그것만은 아닐 겁니다.”
김맑음 신부가 표지 안쪽을 다시 보았다.
**은솔본당 소장 1926년**
그 아래 아주 희미한 도장이 하나 더 있었다.
**청년회 도서**
장태식이 말했다.
“옛날에는 청년회에서 책을 빌려보기도 했습니다.”
“대출 기록은 남아 있습니까?”
최병철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백 년 전 대출기록까지 찾으시려고요?”
“1970년대면 됩니다.”
최병철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게 더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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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맨 아래 서랍.
먼지투성이 장부 한 권이 나왔다.
**은솔성당 청년회 도서대출부 1971~1980**
페이지를 넘겼다.
1974년.
성경책 대출번호 31.
빌린 사람.
**강태호 요한**
김맑음 신부가 손을 멈췄다.
한서윤이 말했다.
“역시 태호 씨네요.”
그런데 바로 아래—
같은 책을 반복해서 빌린 다른 이름이 있었다.
**강민수 요셉**
“누구죠?”
박복례가 이름을 듣더니 생각에 잠겼다.
“강민수…….”
잠시 후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태호 씨 동생 아닐까요?”
---
강민수 요셉.
예순아홉 살.
은솔시 외곽에서 작은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김맑음 신부와 한서윤이 찾아갔을 때—
민수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바라봤다.
김맑음 신부가 오래된 성경책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민수의 얼굴이 굳었다.
“이 책 아시지요?”
대답이 없었다.
“낙서하셨습니까?”
오랜 침묵 끝에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왜 그러셨습니까?”
민수는 과수원 의자에 앉았다.
“형이 시켰습니다.”
김맑음 신부의 눈빛이 달라졌다.
“강태호 씨가요?”
“예.”
“어디 계십니까?”
민수는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낡은 편지 한 통을 가져왔다.
봉투에는 캐나다 우표가 붙어 있었다.
발송일은 삼 년 전.
민수가 말했다.
“형은 돌아가셨습니다.”
---
강태호는 삼 년 전 캐나다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동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안에는 어린 시절 타임캡슐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었다.
**민수야.**
**내가 정숙이에게 끝내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우리가 묻어둔 상자를 찾아주면 좋겠다.**
**정숙이가 아직 살아 있다면 돌려줘라.**
민수는 형의 부탁대로 북정동을 찾았다.
하지만 장소가 많이 변해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형이 젊은 시절 자주 빌렸던 성경책을 기억해냈다.
형의 옛 공책에는 타임캡슐 위치를 성경 구절 페이지 번호와 연결해 암호처럼 적어놓은 흔적이 있었다.
민수는 그것을 해독해 위치를 찾았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상자를 파내지 않았다.
“왜요?”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민수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정숙 누님한테 직접 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왜요?”
“형이 떠날 때…… 저도 누님한테 심한 말을 했습니다.”
당시 어린 민수는 형 편을 들었다.
정숙에게 말했다.
‘형 인생 망친 사람은 누나다.’
정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수는 그 말을 평생 후회했다.
“그래서 성경책에 위치를 적어놓으셨습니까?”
“누군가는 발견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성경책이었습니까?”
민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형하고 정숙 누님이 제일 많이 같이 읽던 책이니까요.”
“그리고 ‘봄, 기다린다’는 말은요?”
민수의 눈이 붉어졌다.
“형의 마지막 말입니다.”
---
타임캡슐 안에는 두 봉투가 있었다.
**마리아에게.**
**요한에게.**
정숙이 자신의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열두 살의 강태호가 쓴 편지가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
**마리아야.**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 싸워도 다시 친구하자.**
**네가 먼저 화내면 내가 기다리고, 내가 먼저 화내면 네가 기다려라.**
**둘 다 화나면 봄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만나자.**
**봄은 매년 오니까.**
정숙은 편지를 읽다가 울었다.
그리고 웃었다.
“바보.”
김맑음 신부가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왜 바보입니까?”
“쉰 살에 열어보자고 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가 일흔이 넘어서야 열었잖아요.”
“그래도 열었습니다.”
정숙이 신부를 바라봤다.
김맑음 신부가 말했다.
“안 열린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정숙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
며칠 뒤.
강민수도 정숙을 찾아왔다.
병실 문 앞에서 한참 들어가지 못했다.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왜 안 들어가십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싶었던 말씀부터 하시면 됩니다.”
“너무 늦었잖습니까.”
김맑음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늦은 말도 하지 않은 말보다는 낫습니다.”
민수가 문을 열었다.
정숙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민수가 고개를 숙였다.
“누님.”
“민수야.”
“미안합니다.”
정숙이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뭐가?”
“그때 제가 한 말이요.”
정숙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 작게 웃었다.
“나는 기억도 잘 안 난다.”
민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정숙이 말했다.
“네 형이나 기억하자.”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 탁자에는—
열두 살 두 아이가 함께 찍은 흑백사진이 놓여 있었다.
---
그 주일.
김맑음 신부는 강론에서 오래된 타임캡슐 이야기를 직접 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때때로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성당 안이 조용했다.
“너무 오래된 미안함.”
“너무 늦은 사과.”
“너무 멀리 떠나버린 사람.”
그는 잠시 멈췄다.
“그러나 어떤 마음은 아주 오래 기다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해도.”
“우리가 돌아오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말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김맑음 신부는 교우들을 바라봤다.
“그러니 마음속에 오래 묻어둔 말이 있다면 너무 늦기 전에 꺼내십시오.”
“미안하다고.”
“고마웠다고.”
“보고 싶었다고.”
“그리고 다시 친구하고 싶다고.”
맨 뒤쪽에는 강민수가 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
미사가 끝난 뒤.
김하늘은 성경책에서 낙서를 지우기 시작했다.
문화재 보존 경험이 있는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아주 조심스럽게 연필 자국을 제거했다.
최병철이 옆에서 지켜봤다.
“살살.”
“알아요.”
“더 살살.”
“사무장님.”
“왜?”
“제가 하는 게 불안하면 직접 하실래요?”
최병철이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계속하세요.”
오미자가 웃었다.
그때 박복례가 김맑음 신부에게 말했다.
“신부님.”
“예.”
“오늘은 사건 끝났죠?”
“예.”
“그럼 밥.”
“예.”
박복례가 멈칫했다.
“요즘 너무 순순히 대답해서 오히려 이상하네.”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저도 성장합니다.”
이도현이 성당 문으로 들어오다가 그 말을 들었다.
“누가요?”
김맑음 신부가 돌아봤다.
“나.”
“무슨 성장?”
“생활력.”
이도현이 신부의 발을 내려다봤다.
“맑음아.”
“왜?”
“양말.”
김맑음 신부가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
한쪽 양말이 뒤집혀 있었다.
하늘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미자도 웃었다.
박복례가 이마를 짚었다.
“성장은 무슨.”
김맑음 신부가 태연하게 말했다.
“조금씩 하는 거죠.”
---
오후.
김맑음 신부는 자료실에 성경책을 다시 꽂아놓았다.
낙서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한 줄만큼은 지우지 않았다.
책 맨 뒤 빈 여백에 아주 작게 적힌 글.
**봄은 매년 온다.**
그 문장은 낙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기다림처럼 보였다.
성경책을 덮은 뒤 김맑음 신부는 창문 밖을 바라봤다.
느티나무 아래 묻혀 있던 상자는 오십 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 안에서 정말 발견된 것은 오래된 장난감이나 편지가 아니었다.
끝난 줄 알았던 우정.
하지 못했던 사과.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이었다.
그날 저녁.
김맑음 신부가 사제관으로 가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도현이었다.
“왜?”
“맑음아.”
“응.”
“은솔장례식장 알지?”
“알지.”
“거기로 좀 와.”
김맑음 신부가 걸음을 멈췄다.
“왜?”
전화기 너머로 이도현의 한숨이 들렸다.
“죽은 분 장례식에 아들이 둘이 나타났어.”
“형제가 둘?”
“아니.”
잠시 침묵.
“둘 다 외아들이래.”
김맑음 신부가 안경을 고쳐 썼다.
전화기 너머에서 이도현이 바로 말했다.
“또 그 표정 짓지 마.”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
김맑음 신부는 사제관 쪽을 바라봤다.
박복례가 창문 너머에서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전화기에 말했다.
“밥부터 먹고 갈게.”
몇 초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도현이 물었다.
“너 맞냐?”
“끊는다.”
김맑음 신부는 웃으며 사제관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은솔장례식장에서는—
이미 또 하나의 이상한 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제47화 끝 ―**
### **제48화 ― 「장례식장에 나타난 가짜 아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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