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농부와 늙은 소 이야기 <워낭소리>
작년 미국소 수입문제로 촛불이 타올랐을 때 수입소의 연령을 20개월로 할 것인가, 30개월로 할 것인가에 대해 사람들이 혈전을 벌일 때 생각했다. 소의 수명은 어떻게 되지? 한번도 농촌에서 살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소가 단지 고기가 아니라 한 생명이라고 보고 싶어졌으니까. 그래서 나이든 소와 늙은 농부가 조력자가 되어 농촌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스치듯 했었다. 그런데 올 초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의 프리뷰를 읽고 퍼뜩 놀라고 말았다. 나와 똑 같은 생각을 가졌던 한 감독이 몇 전부터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화면에 담고 있었으니까.
지난 금요일, 대학로의 하이퍼텍 나다에서 영화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가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뒷얘기라는 게 영화보다 재미있고, 100분토론 보다 길게 이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마감 중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관을 찾았다. --- 이래서 자꾸만 책출간이 늦어진다는…ㅠ,ㅜ 영화는 늙은 소와 농부, 그리고 농부의 부인 셋의 관계에 천착해 깊숙히 밀고 들어간다. 산다는 게 결국 관계의 문제 아닌가. 그들의 관계에 그들이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농부는 소에게 사료를 주지 않고 매번 쇠죽을 끓여 먹이는데 꼴에 농약 쳤다가 소 죽으면 어쩌냐고 논이고 밭이고 농약을 치지 않는다. 평균 수명인 15살을 훌쩍 넘어 40년 가까이 늙은 농부와 사는 소는 농부의 농기구이고 교통수단이고 도반(친구라는 표현보다는 도반이라는 말이 적합하다!)이다. 그리고 그 둘에 대해 늘 퉁을 놓는 농부의 부인은 한국 사회 어머니들의 모습 그대로지만 그대로 그 둘의 관계를 인정한다. 코미디보다 웃긴 할머니의 촌철살인의 대사에 킬킬거리다가 서로를 마음 깊이 이해하는 농부와 소의 관계에 마음이 묵직하다가 늙은 소가 기어이 머리를 넘어뜨리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래서 불이 켜져도 쉽게 엉덩이가 떼지지가 않는다. 최근에 본 한국영화 중에서 최고가 아닌지. 설연휴에 헐리우드영화만 판치고 한국영화는 죽었다고 미디어는 말하지만 한국 영화의 희망은 되지도 않은 액션과 멜로, 코미디에 죽 쑤는 그런 대자본 영화 말고, 진짜로 유기농 꼴 베다가 쇠죽 쑤는 이런 영화일 것이다. 다큐 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어찌나 기승전결이 탁탁 맞는지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연출 아니냐는 볼멘 소리가 나올 정도로 완성도 높은 영화이다. 그리고 내레이션 없는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하지만 노부부의 알아듣지 못할 사투리만을 자막으로 처리한 덕분에 관객은 여백의 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생각하지 않고 느낄 수 있었다는 것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물론 나로서는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그건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래서 만난 동물이라고는 개와 고양이가 비둘기가 전부인, 또 가족의 관계가 그들과는 조금 다른, 그런 차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늙은 농부와 늙은 소의 관계를 ‘자연’ 자체로 바라보는데 전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사실 이 영화를 책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유혹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자신이 없어졌다. 이 좋은 영화를 책으로 ‘잘’ 옮길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냥 관객으로 남는 게 이 영화를 돕는 일인 것 같다는 ^^;; 힘든 시절, 새해를 충만한 마음으로 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혹,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블로그 이웃들이 있다면 언제 벙개 쳐서 단체관람이라도 해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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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물과 사람이 더불어, 동물행성 원문보기 글쓴이: 더불어밥
첫댓글 우리 누렁이소. 할아버지 사랑 많이 받던 울 착한 순둥이.
소 죽으면 내가 상주 슬 낀데 말씀하시던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