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영웅의 이야기를 서술하지만 역사의 뒤안에는 역사를 역사적으로 만든 세상에 희생된 평범한 인물들이 살아있다. 특히 당대를 살아가는 여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규원가로 유명한 허난설헌, 아예 이름을 남기지 못한 무수한 여인들의 아픔과 고통은 또 얼마나 많은 영웅들을 만들어내는 마중물이 되었단 말인가.
오백년 전 조선의 파란 만장한 소용돌이 속에 살다 간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당쟁과 사화의 불길에 집안이 몰락하는 것을 눈으로 보다가 정신을 놓아버린 불쌍한 소녀였다. 보는 앞에서 숙부가 처형당하고 아버지가 유배에 끌려가고 어머니가 자살을 하고 가족들이 관비가 되어나가는 판국에 누군들 정신이 온전할 리 있겠는가.
권씨 부인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황의 두 번째 아내가 된다. 이황은 성리학의 대가일 뿐이고 한낱 고리타분한 인물이라고 폄훼했었던 나를 반성한다. 좋은 가문에서 공자 왈 맹자 왈이나 읊고 학문수양 운운하며 정신수양만 일삼던 그저 금수저 엘리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권씨부인의 남편 이황은 로맨티스트였고 휴머니스트였으며 사랑쟁이였으며 인간 존중과 배려가 몸에 베인 멋진 남자였다.
첫째 부인을 잃고 방황하던 이황은 스승 권질의 권유로 두 말 안하고 권질의 딸이었던 권씨 부인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요즘 말로 이미 기울어진 정권의 딸, 모두 돌아서고 배신하며 혹여 다음 정권의 집권자들에게 찍히지나 않을까하여 친하던 사이도 돌아서는 상황에서, 그것도 정신이 이상해진 딸을 아내로 맞아들일 생각을 하다니... 아무튼, 권씨 부인은 이황의 사랑과 배려 속에서 파란 만장한 파도를 잠재운다. 봄바람은 아니더라도 잔잔하게 한평생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권씨 부인은 아이를 낳고 그만 죽어버린다. 이황과 너무 멀리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당신에게로] 가는 길은 읽는 내내 마음이 아리고 아프고 안쓰러웠다.
우리의 역사는 이렇게 많고 많은 사람들의 아픔으로 다져진 역사이며 또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우리 민족을 세워 나갈 것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수많은 여인들과 평범한 인물들과 또 충성스런 사람들과, 안간힘으로 버텨 온 세월과 위태롭게 유지해 나가는 우리의 역사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부디 권씨 부인이 저세상에서는 온전한 정신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