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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보 제180호 세한도 추사 김정희(1786-1856)
추사체로 더욱 유명한 그의 생애는 생략하고 완당은 조선말기에 남종문인화를 개척하였고 문인화지상주의적 경향을 이루었다. 많은 서화가들이 김정희파를 이루었으며 그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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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 23.0 X 61.2 cm. 두루마리 길이가 10.8 m. 개인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소장
.1974년 12월 31일 국보 180호 지정>
세한도는 많은 여백을 두고 단순화된 집 한 채와 노송 한그루 잣나무 세그루 뿐이다. 세한도는 자신의 서화관에 의하여 탁월한 기법으로 내면의 세계를 표현한 문인화의 정수이다.
그림의 동기는 중극어 동역관인 제자 이상적이 중국을 드나들며 귀한 서적을 많이 구해서 드린 고마움과 의리에 감동하여 추은 날씨에도 제일 늦게까지 푸르름을 간직한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해서 그린 것이다.
세한도는 1926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한 후지즈카 지카시(1879-1948)가 추사의 학문에 매료되어 서울과 청나라 고미술품 거리를 다니면서 수집한 자료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이를 안 서예가 손재형(1902-1984)이 1943년부터 2년간 매일 방문하여 가격은 요구대로 줄 터이니 넘겨줄 것을 간곡히 요구하자 지카시는 이에 감복하여 무일푼으로 잘 보관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넘겨 받았다고 한다.
2.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 겸재 정선(1673-1759)
정선은 타고난 그림 재능으로 이웃에 살던 노론의 거두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 형제의 영향으로 시화에 매진하게 되었고, 성장해서도 그들의 도움으로 양천 현감이란 화가로써 파격적인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명예로운 만년을 보내다가 84세로 천수를 다했다.
*겸재(謙齋) 정선은 공재(恭齋) 윤두서, 현재(玄齋) 심사정과 삼재(三齋)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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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제색도> 국보 제216호 종이에 수묵.79.2×138.2cm *호암미술관>
인왕산 아래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그 부근에서 살았던 정선은 비온 뒤의 인왕산의 정경을 그린 것인데, 어릴 때부터 친구인 시학자 이병연(1671-1751)이 중환으로 병석 중에 있는 친구에게 안개가 걷히듯 병석에서 훌훌 틀고 일어나라는 소망을 담은 그림이 인데, 완성된 5일 후에 이 친구는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림의 구성은 위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과 멀리서 위를 쳐다보는 고원법으로 생생한 현장감을 대담한 필치로 실경의 순간을 보고 인상적으로 작품화하였다. 이런 기법을 진경산수화라고 하는데 산수의 외형의 형상과 산수가 지닌 정신이 모두 내포된 산수를 정선 이 남종화법을 토대로 하여 한국적인 화풍을 그려낸 것으로 진경(眞景)산수화의 개척자이다. 이전의 실경(實景)산수화는 북종화풍으로 그렸다.
3.국보 제217호 금강전도 1734년 작 겸재 정선(1673-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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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전도> *국보 제217호. 1734년 작. 종이바탕에 수묵담채,
130.7×59cm. 삼성미술관 리움 >
정선은 여러 차례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고 무려 100여 폭에 달하는 금강산을 그렸다고 한다.
겨울철 내금강의 전경을 부감법으로 그렸다. 실경과는 차이가 나지만 나머지 세부적으로는 금강산 곳곳에 있는 사찰과 명승을 상세하게 표현하여 금강산 전체의 모습을 빠짐없이 조망하도록 했다. 정상 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는 비로봉을 중심으로 해서 오른편의 화강암 백색 암봉을 날카롭게 모진형상을 수직준법으로 조형적 표현을 했고, 왼편의 토산은 부드러운 필선과 굵은 미점으로 그려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다. 정선의 화풍을 완성시킨 최고의 작품이다.
4. 국보 제139호 군선도 단원 김홍도(1745-1806이후)
김홍도는 부친이 64세에 얻은 늦둥이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그의 외가 안동 장씨 집안은 대대로 도화서의 화원을 배출한 집안이다. 그래서 외가의 영향을 받고 자랐으며, 그림의 천재로 소문이 나 서화가 강세황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으며 강세황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가 28세 때 어용화사에 선발되어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의 초상화를 그렸다. 정조 5년(1781)에 두 번째 어진을, 정조15년(1791)에 세 번째 정조어진을 그렸다. 김홍도는 어진을 그렸을 때마다 관직을 맡았으며, 이번에는 충북 괴산 연풍의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자 김홍도의 역할이 없어졌다. 그는 말년에는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가난 속에 병고로 여생을 마쳤다.
*단원(檀園) 김홍도는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과 삼원(三園)으로 불리운다
그리고 단원(檀園) 김홍도는 *긍재(兢齋) 김득신 *혜원(蕙園) 신윤복과 풍속화 3 대가로 일컫는다.
*김홍도는 산수화와 풍속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화가이다.
산수화에서 단원법이라 부를만한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하였으며, 풍속화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인간미가 넘치는 그의 특유한 서민의 정서가 표출하는 풍속화로 조선후기에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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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선도 부분. 1776년작, 종이에 수묵담채,132.8×575.8cm. > <일부만 게재>
*김홍도가 32세인 1776년에 그린 그림인데, 8폭의 병풍그림으로 3개의 족자로 분리되어 있다. 신선도의 대표작으로 ‘서왕모의 반도회’에 초대받고 약수를 건너는 신선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아무런 배경도 없이 나열한 인물들의 감정이 살아 있는 듯이 한 묘사와 풍속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얼굴의 둥근 눈매가 특징이다. 이런 화풍은 조선 후기 신선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 국보 제135호 「신윤복 풍속도화첩」(申潤福風俗圖畵帖)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1758-1814),
*신윤복은 화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신일흥(申日興)과 종증조부 신세담(申世潭)은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화원(畵員)으로 알려졌다.
부친 신한평(申漢枰)(1726-?)은 영조 때 임금의 화상인 어진(御眞) 제작에 참여한 화원이었다. 그리고 신윤복은 도화서에서 첨절제사가 되었으나 지나친 속화를 즐겨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도 전한다. 신윤복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알려지지 않았다.
*혜원(蕙園) 신윤복은 *단원(檀園) 김홍도, *오원(吾園) 장승업과 삼원(三園)으로 불리운다
그리고 *혜원(蕙園) 신윤복은 *단원(檀園) 김홍도는 *긍재(兢齋) 김득신 과 풍속화 3 대가로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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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풍경> 혜원풍속첩 28.2×35.2 종이에 담채. 국립중앙박물관>
1) 일본 고미술상에서 구입
이 화첩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문화재수집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이 1930년 일본 오사카의 고미술상에서 구입해서 새로 표구하였다. 이 때 오세창이 표제와 발문을 썼다. 이 도첩에는 28.2×35.2cm 크기의 종이에 수묵과 채색으로 그린 30점의 제목의 그림이 있다.
2) 작품내용
① 단오(端午)의 유래
음력 5월 5일은 1년 중에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시기이며 우리나라는 「수리」라고 하여 가락국 신라 때 숭상하여 이 날에는
그네뛰기, 격구, 편싸움 등의 경기가 성행되었으며 여인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창포뿌리를 머리에 꽂기도 하였다. 또한 독특한
냄새가 나는 궁구이풀도 뜯어서 머리에 꽂고 다녔다.
②작품내용
이 그림은 단옷날 추천(鞦韆: 그네타기)놀이를 나온 여인네들이 골짜기에 그네를 매고 냇물에 몸을 씻으며 즐기는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여기가 서울 어느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부녀자들이 이 날만은 밖에서 야유를 즐길 수 있다. 인적이 끊어진 후미진 곳이었기에 여인네들은 산에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마음 놓고 옷을 훌훌 벗고 냇물에 들어가서 몸을 씻으며 즐기고 있다. 그러나 바위틈에는 승려 둘이서 숨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막힌 풍경을 보고 있다. 두 승려의시선이 유심히 쏘아보고 있는 장면들이 성적이고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두 승려의 각각 다른 시선을 자세히 보세요.(?) 드물게 있을 수 있는 장면을 실제 그림으로 표현된 것으로 신윤복의 그림의 일면을 보여준 것이다.
3) 혜원 화풍
풍속도 화첩은 주로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 간의 애정과 낭만. 양반사회의 풍류를 다루었다. 김홍도의 화풍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자신의 독특한 풍속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우리나라의 회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기법으로 보면 인물들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주위의 배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김홍도의 퐁속화와 대조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 작품에 짤막한 글과 함께 낙관이 있지만 연대를 밝히지 않아 그의 화풍의 변천과정을 알 수 없다.
◈국보 제240호 윤두서상(尹斗緖像).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
. *고산 윤선도의 증손으로 윤두서는 26세인 1693년(숙종19)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 서, 화로 생애를 보냈다.
서화뿐만 아니라 유학, 천문지리, 수학, 병법 등 각 방면의 학문에 능통한 실학적인 태도는 가풍으로 전해졌다.
*윤두서는 18세기 풍속화의 효시이며, 조선후기 문인화가로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심사정과 더불어 삼재(三齋)라 한다
아들 윤덕희는 . 손자 윤용은 그림에 뛰어 났다고 한다.
조선후기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은 그의 외 증손이 된다.
*1774년(영조50)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하였다
◈국보 제240호 윤두서상(尹斗緖像)
1)인물화의 전신사조(傳神寫照)
우리나라 자화상은 문헌상으로 고려시대에 「공민왕조경자사도(恭愍王照鏡自寫圖)」, 김시습의 노소(老少) 두 자화상이 있다고 한다. 18세기에는 이광좌(李光佐), 강세황(姜世晃)의 자화상도 전해진다.
*초상화나 인물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정신세계를 즉, 성품, 인격, 기질까지도 표현된 그림을 전신사조라고 한다. 모양의 닮음보다 정신의 닮음을 더 중요하게 평가한다. 전신사조를 가장 잘 나타낸 인물화라 하면 조선시대 윤두서의 <자화상>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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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자화상의 의문점
*한국 최고의 자화상으로 평가받는 윤두서의 자화상이 매우 특이하며 몇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①있어야할 두 귀. ②목과 상체가 없다
(1) 윤두서 자화상의 옛 사진 발견 (앞의 오른편 자화상 사진)
전 한신대 강사 오주석(작고)씨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37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사료집진속’을 찾았다. 거기엔 윤두서 자화상의 옛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 사진 속에는 목과 상체가 선명하게 남아있고, 도포를 입고 있다
* 상반신 윤곽선이 빠진 이유(오주석)
「버드나무 숯인 유탄으로 그린 상체는 지워지고 먹으로 그린 얼굴만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미완성 상태로 후대로 내려오다 관리소홀과 미숙한 표고상의 실수라고 했다.
(2) 국립중앙박물관 연구팀의 분석한 결과
국립중앙박물관 연구팀이 적외선 투시한 분석결과에 의하면 얼굴만 그려진 미완성의 그림으로 알려졌던 그림이 원래는 목 부분과 상체의 옷깃과 도포의 옷 주름선이 그려진 것으로 확인 되었다. 얼굴 양쪽 가장자리 부분을 현미경으로 확대한 결과 양쪽에 귀가 붉은 선으로 그려진 사실도 드러났다. 도포는 전체가 흰색으로 은은하게 채색되어 있었다고 한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원래 말려져 있던 것을 그의 후손들이 펼쳐서 액자로 표구한 것은 1960년대로 알려져 있다.
< 줄이고 줄였는데도 많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