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쯤 분단된 남녘땅에 마지막 진달래꽃의 혼불이 번진다는 강화도 고려산을 다녀왔다.
과연 장관이었다. 강화도는 예사로운 섬이 아니다. 내가 반년동안 머물던 진도와 더불어 우리에게 자존과 굴욕의 역사에 오열하고 있는 통한의 섬이다. 그 옛날 삼별초는 이곳 외포항에서 천여척의 배를 띄워 진도로 향했다. 진도 용장산성에다 궁성을 짓고 도읍을 정하여 몽골과 괴뢰왕정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배중손...마땅히 그는 역사의 재평가를 받아야 하리.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으로 부터 방송의 독립을 지키고자 사상 최장기 파업을 하고 있는 MBC에서 마침 고려무신정권의 역사를 다룬 드라마가 유일한 시청률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다. 벗이여, 고래산을 한번 다녀오시라. 그리고 정의로운 반역의 역사, 진달래보다 더 붉은 충절의 역사를 사색해보라. 강화의 노을은 한없이 아름답다. 이 글을 꽃과 함께 한 세상을 하직한 고 이정식 교수의 혼백에 전한다. 오해마라. 이 글은 아직 살아 남은 자가 부르는 생명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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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아리랑
노화욱
오월이다. 창을 넘나드는 거래가 있다. 라일락 분홍꽃이 은밀한 봄을 파네. 사춘기였던가. 그때부터 너의 향기는 내 청춘의 오랜 밀어가 되었지. 한 자락 바람춤에도 흐드러지듯 안겨 오는 저 현기증 같은 유혹. 그러나 이봐, 어쩌란 말이야. 세월이 강처럼 흘렀는데.
식탁에도 봄이 오른다. 도다리 쑥국 한 냄비에 춘정이 향긋하다. 제기랄, 도리없이 떠나야겠다. 묵은 추억 속에다 갯가를 두고 온 놈이니 갯봄이야 하냥 그립지. 오월은 남정네 마른 가슴에도 봄바람이 절로 이는가. 이즈음이면 느지감치 꽃불 붙는 고려산(高麗山)의 강화(江華)섬으로 나는 간다. 비 갠 후 파르라니 잘 뻗은 김포벌 둑방길은 정인(情人)의 연초록 치마 속처럼 육덕지다.
저게 몸부림이지 무슨 산봉우리야. 흘겨보는 내가 다 부끄럽다. 아아 그렇지만 혼불처럼 타오르는 진달래 꽃바다를 헤엄치는 산행이야말로 황홀하게 숨차 오르는 오르가즘이다. 제 전신을 휩싸는 오로지 연분홍 한 색(色)으로 오월의 강화는 온종일 전율하고 인파에 신음한다. 이곳의 만홍(滿紅)은 영변 땅 약산으로 떠나기 전 남녘의 섬산에서 판 벌이는 마지막 초야(初夜)려니.
한나절 내내 단 몸과 붉게 물든 속을 어디다 식힐 데 없어 바닷가 한적한 암자에다 내렸더니 아뿔싸 막 서쪽 하늘의 노을이 불그레 번져온다. 산홍(山紅)에 물든 심홍(心紅)이 다시 천홍(天紅)에 불붙는가. 장엄한 다비(茶毘)로다. 지리산 피아골의 삼홍소(三紅沼)는 가을에 타오르는 혈화(血花)지만 이곳의 삼홍(三紅)은 화려한 봄 꿈마저 아미타에 헌화하는 소신공양 (燒身供養)일지니.
뒷산의 꿩 한 마리 초저녁부터 피 토하듯 울어 대는 게 심상찮더니 하늘에는 서서히 먹구름이 몰려든다. 천지의 생명이 열린다는 봄밤은 두렵다. 꽃이 그냥 피는가. 새는 예사로 우는가. 지상의 모든 미물이 제 생명을 이어가는 짝짓기가 일제히 시작되니 이 신비로운 초혼례는 천신과 지신이 벌이는 한바탕 굿판으로부터 막을 연다. 운우지정(雲雨之情)이라, 하늘과 땅의 흘레. 삼라만상 음양의 교접 중에 이보다 더 웅장한 스펙터클이 또 있으랴. 조자룡의 청홍검인가 난데없는 벼락은 비단치마 내리찟듯 하고 우레소리는 강산을 뒤흔들어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의 심장을 정지시켜 놓는다. 염제신농(炎帝神農)의 딸 요희가 무산(巫山)의 선녀가 되어 동정호에서 초(楚)나라 회왕(懷王)을 희롱했다던 바로 그 날. 해마다 오곡의 씨앗을 준비하고 들녘을 갈아엎을 봄날이면 꼭 치러야 할 기우제의 요란한 굿판인가.
저것들은 욕정 하나 참 걸판지게 나눈다. 천지사방을 종잡을 수 없이 이쪽 골짜기에 우당탕 저편 하늘에 와르르, 미친 봄밤의 저런 카프리치오(capriccio)에 지상의 어느 담대한 관객도 오로지 숨 죽이는 침묵뿐이다. 쏟아지는 장대비는 대지를 적시고 골을 타는 붉은 황토물은 동맥처럼 박동하며 마른 내를 채워 흐른다. 아무리 천하의 생명을 잉태한다 해도 그렇지. 천지간에 저런 무도한 것들이 있나. 봄날이 어디 제 세상인가. 하룻밤 흘레치고 뭐가 저리도 요란할까.
날이 샌다. 꼬박 여덟 시간. 산 짐승 날 짐승 할 것 없이 굼틀거리는 모든 것들은 잠 한숨 못 이뤘을 것이다. 창문을 여니 햇살이 부서진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새침 떼는 아침 표정은 화장기 한 점 없이 해맑은 새댁의 얼굴이다. 밤새워 쏟은 빗물에 논밭은 질펀하고 새벽까지 질러대던 천둥소리에 하얀 목련이 다 졌구나. 처연하다 봄날이여.
요사채 마루턱에 앉아 섬 땅의 옛일을 생각한다. 마니산 골안개처럼 피었다 지는 상념에 갯바람이 소슬한데 잠방이 걸친 농부가 부지런히 논물을 괴니 나도 이제 일어서야 겠다. 단상(斷想)을 얽은 시조 세 수를 찻삯으로 놓고 봄날의 하룻밤 뜬 꿈과 작별한다.
강화도에서
강화섬 고려산(高麗山)에 봄 꿈이 화려한데
왕조의 천도몽(遷都夢)도 저 꽃을 닮았어라
세상사 십일홍(十日紅)인 줄 알고도 모르나니
외포항(外浦港) 타는 노을 넋 놓고 바라보며
삼별초(三別抄) 천여 척의 남도뱃길 회상하네
화홍(花紅)은 만건곤(滿乾坤)한데 인간사 공허해라
봄날의 거친 밤을 암자에서 만났더니
음양의 묘한 이치 밤새워 깨닫도다
꽃 진다 서러워 말게 생멸(生滅)이 불이(不二)라네
첫댓글 花無十日紅 이지만 多元이 곧 一元이란다. 먼저간 친구에게 보내는 친구의 노래가 절창이다.
생멸이 불이라! 평안하시게,먼저간 친구여!
亡者는 조용히 갔다지만 남은 자들에게는 뭐라고 위로 할까? 고려산의 아름다운 진달래도 화들짝 피었다가 지는 것에 비하면 그래도 인간사를 많이 경험하고 갔다고 위로해 주어야 할까? 生滅이 不二 라고 마음 먹기 나름이라고 할까? 어째던 노교수의 글로 다시 한번 먼저간 친구에게 애도를 표한다.
병고에 지친 자식이 낳아 준 어미를 배웅하고
보름 후 자신도 귀천한 사실을 두고
어찌 생멸이 다르다 하겠는가? 숙연한 천륜의 효(孝)를 보았느니...
엊그제 본 듯한데. 목소리 귓가에 맴도는 데.... 꿈인가 하노라...영면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