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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47) 2023. 11. 15
내 아들 압살롬아
삼하18:19-33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쓰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압살롬의 ‘비참한 최후’를 보았습니다. 그의 ‘비참한 최후’는 그가 인생을 잘못 살아왔음을 증거해주는 것입니다. 조금만 인내하고 기다렸다면 왕위를 물려받을 1순위자였는데도, 성급하게 아버지를 배신하고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이 부끄럽지 않도록, 보람 있는 삶, 그리고 믿음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히마아스의 자원>
반란을 제압한 요압은 그 소식을 다윗 왕에게 전해야 했습니다. 군대가 귀환하기 전에 먼저 전령을 보내 전쟁의 결말을 알리는 것이 그 동서고금을 막론한 일반적인 관행입니다.
마라톤의 유래 - 기원전 490년, 그리스의 아테네군과 페르시아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들이 싸우던 곳이 바로 '마라톤' 평원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아테네군이 이겼는데, 이 기쁜 소식을 고국에 알리려고 전령 페이디피데스가 아테네까지 42.195Km를 달려 "기뻐하라. 우리가 이겼다"를 외치고 바로 쓰러져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생긴 운동이 바로 마라톤입니다. 하지만, 마라톤 전투를 상세히 기술한 기록 어느 곳에도 해당 일화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저 하나의 전설일 뿐입니다.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을 아테네에서 개최할 때 마라톤을 정식종목으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때는, 마라톤의 유래가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이긴 전쟁에서 기원했다는 이유로 페르시아를 계승했다는 이란이 마라톤을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에서 빼버리는 간 큰 결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전쟁의 결과를 전하는, 특히 ‘승전보’를 전하는 전령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때 가장 먼저 자원하여 나선 사람이 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였습니다.
19~23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20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21 요압이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23 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그는 원래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다윗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 후새가 알려준 정보를 다윗에게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반란을 제압하자 승리의 소식을 즉시 다윗 왕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요압에게 허락을 구합니다. 그는 다윗 왕이 승전의 소식을 들으면 기뻐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그를 말립니다. 요압은 다윗 왕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승리의 소식에 기뻐하기보다는 압살롬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왕명을 거역하고 압살롬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왕명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중히 여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평소 왕에게 좋은 소식만을 전하던 아히마아스 대신 구스(에디오피아) 사람을 전령으로 보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히마아스가 아닌 구스 사람이 전령으로 올 때에 다윗이 나쁜 소식임을 짐작게 함으로 그 충격을 감소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둘째는 그도 아히마아스를 자신의 아들로 부를 만큼(22절 “내 아들아”) 사랑하였으므로, 혹시라도 그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삼하1장에 보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해 사울 왕과 사울의 세 아들이 전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블레셋 군사들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사울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무기를 든 자가 감히 사울을 찌르지 못하자, 자기의 칼에 엎드러져서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소지품을 훔치는 아말렉 청년이 사울 왕의 소지품을 들고(‘팔에 있는 고리’ 전쟁에 나갈 때 사용하는 왕의 표식) 다윗에게로 와서 그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울 왕을 죽였다고 허풍을 떨었습니다. 부상 당한 사울 왕이 자신을 보고는 너무 고통스러우니 죽여 달라 요청하였고, 자기 보기에도 사울이 살지 못할 것 같아 그의 요구대로 죽여주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상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말이 거짓인 줄을 단번에 간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의 손에 죽는 것을 모욕으로 여기는 사울 왕이 그런 요구를 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며 자신의 부하를 시켜 그 자리에서 그를 쳐 죽였습니다.
물론,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다윗이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달라”고 명령하였는데, 그의 죽음의 소식을 전하면 혹시 아히마아스에게 무슨 불행한 일이 생길까를 염려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히마아스는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해달라”(22)고 청합니다. 요압이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거듭 말렸지만, 아히마아스는 포기하지 않고, 허락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결국, 요압은 마지못해 허락합니다.
허락을 받은 아히마아스는 승전보를 자신이 전하려는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는 먼저 출발한 구스 사람보다 먼저 다윗에게 도착하였습니다. ‘들길로 달렸다’고 했는데, 들길은 ‘요단 계곡의 길’을 의미합니다. 그 길은 돌아가는 길이지만 비교적 평평하여 빨리 달릴 수 있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구스 사람은 에브라임 수풀에서 마하나임으로 가는 직선거리를 택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길은 산길로 험난하나 거리상 가장 짧은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아히마아스는 구스 사람보다 자신이 먼저 승전보를 전하려는 열망에 쉼 없이 달려 결국 구스 사람보다 먼저 마하나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전쟁의 소식을 기다림>
한편, 다윗 왕은 전쟁의 결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4~27절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25 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26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27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다윗은 두 문 사이에 앉아 있었습니다. ‘두 문 사이’란 성의 외문과 내문 사이를 의미합니다. 보통 성문은 이중으로 설치가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온종일 이 두 문 사이의 공간에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전쟁터에서 기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침내 파수꾼이 전령이 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소식을 왕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또 내다보니 또 한 사람이 이어서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파수꾼이 앞서 달려오는 사람의 모습을 보니 아히마아스같다고 말합니다.
다윗 왕은 기대가 커졌습니다. 다윗은 아히마아스가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단지 승리의 소식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아히마아스를 희망적인 마음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아히마아스의 보고>
다윗 왕 앞에 도착한 아히마아스는 승리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28~30절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30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아히마아스가 제일 먼저 한 말은 ‘평강 하옵소서’입니다. 이는 히브리어로 ‘샬롬’이란 말인데, 이 말을 외친다는 것은 매우 기쁜 소식을 전하리라는 암시를 줍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찬양하면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를 왕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합니다. 아히마아스는 사독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앞으로 제사장이 될 인물입니다. 그는 먼저 승리의 공을 여호와께 돌리며 감사의 찬양을 돌린 것입니다.
자, 그럼 다윗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의 첫 번째 관심사는 압살롬의 안부였습니다. 다윗은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29절)고 물었습니다. 아히하마스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승리의 소식에 다윗이 기뻐할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기뻐하는 기색 없이 압살롬의 생사여부에만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황한 그는 똑바로 보고하지 못하고 얼버무립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뜸을 들였을 것입니다. 잠시 생각한 그는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29) 하고 대답을 회피합니다. 물론,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의 죽음을 알고 있었지만, 다윗 왕에게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히마아스는 전령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하였습니다. 평소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매우 영악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는 다윗 왕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니 다윗의 마음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압살롬을 잃은 다윗의 마음이 어떨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다만 승리의 소식을 전하여 다윗을 기쁘게 함으로, 상이라도 받아볼까 하는 생각만 있었던 것입니다. 즉, 권력과 상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그를 물리치고, 구스 사람을 부릅니다.
<구스 사람의 보고>
늦게 도착한 구스 사람도 동일하게 승리의 소식을 전달합니다.
31~32절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구스 사람도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라며 간접적인 어법으로 승리의 소식을 전합니다. 마음이 급한 다윗은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구스 사람은 간접적이지만 정확하게 전달하였습니다.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압살롬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전한 것입니다.
<슬퍼하는 다윗 -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의 죽음 소식을 들은 다윗은 몹시 괴로워하며 성문 위층으로 올라가 압살롬의 죽음을 애곡합니다.
33절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그는 ‘내 아들 압살롬아’를 네 번이나 반복하여 외치고 자신이 대신 죽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며 애곡합니다.
<슬픔의 내막>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그토록 애곡하는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을 배반한 아들이라도, 아들의 죽음을 기뻐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압살롬은 다윗이 사랑했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던 아들이었습니다.
압살롬이 자기 형을 죽이고 그술 땅으로 도망쳤을 때도 다윗은 압살롬을 생각하는 마음에 밤잠을 이루질 못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끊임없이 압살롬에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삼하13:38~39절의 말씀을 보면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한지 3년이라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이 첫 번째 충격이라면,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쉬지 않고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를 반복하며 부르며 애곡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의 마을을 아프게 한 자식일지라도 그 자식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의 눈에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사이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릅니다(요1:12).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선택하신 다음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주셔서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롬8:15).
그래서 우리는 신앙고백(사도신경)을 할 때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사랑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는 ‘독생자’이십니다. 유일한 아들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독생자 아드님을 주실만큼 크셨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마7: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3)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실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눅15:11~32)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 –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다윗의 애통함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에 그토록 애통하는 이유는 그가 아직 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그는 아직 ‘어린아이’였습니다. 전령에게 압살롬의 생사여부를 물을 때에도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자꾸 그가 아직 어리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요절한 것도 마음 아프지만, 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회개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압살롬의 죽음이 지난날 자신이 범했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신 벌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1) 다윗의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12:10).
재앙이 임하는데, 그 재앙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정(자녀)에서부터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근친상간(암논과 다말), 알살롬의 암논 살해, 압살롬의 반란 등...
2)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겁탈했듯이, 다윗의 아내들도 대낮에 사람들 보는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11절). 놀랍게도 그 일은 그의 아들 압살롬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압살롬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일을 벌였습니다(삼하16:22).
3) 다윗과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기가 죽으리라는 것입니다(12:14).
다윗은 자신의 집에 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특히 아들들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징계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는 압살롬의 죽음도 결국 자신의 죄로 인해 벌어진 결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자책 때문에 더욱 애통했을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압살롬의 죽음을 대하는 다윗의 애통함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을 대할 때, 그 내용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아버지 다윗의 모습을 통해, 오늘도 회개하고 구원의 길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생자 아드님까지 구원의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배신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압살롬과 같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충성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여 하나님의 애통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사명인 줄도 믿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삶,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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