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작업(travail de deuil)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Trauer und Melancholia," 1917)이라는 글에서 애도 작업을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리비도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반대로 이러한 정상적인 애도 작업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자아의 일부가 상실된 대상과 동일화될 때, 그리고 자아가 이 자신의 일부를 외부 대상으로 취급할 때 자아는 상실된 대상을 자기 자신의 일부분의 상실로 받아들이게 되며, 여기에서 우울증이 일어나게 된다.
데리다의 친구였던 니콜라스 아브라함(Nicolas Abraham, 1919~1975)과 마리아 토록(Maria Török, 1925~1998/아래 사진)은 비정상적인 애도 작업, 즉 우울증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통해 이러한 프로이트의 관점을 수정한다.
이들은 프로이트가 상실된 대상과의 동일화로 간주한 것을, 타자를 자아의 내부에 위치한 일종의 지하 납골당 안에 안치하는 것으로 개념화할 것을 제안하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자아가 자신의 내부에 "합법적인 묘소"를 마련함으로써 타자의 시신을 안치하고 이를 통해 이미 상실된 타자의 죽음 이후의 삶을 계속 유지시키고, 더 나아가 자신의 동일성을 이 타자가 죽은 이후의 삶과의 동일화로 대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들의 작업의 중요성은 …… 정상적인 애도와 병리적인 애도의 경계를 문제삼는다는 데 있으며,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자아 또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는 데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데리다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이들이 프로이트를 비록한 대부분의 정신분석가들이 동일시했던 입사(introjection)와 합체(incorporation)라는 개념을 분명히 구분하고 이를 정상적인 애도 작업과 실패한 애도 작업, 또는 납골과 각각 결부시켰다는 점이다.
아브라함과 토록에 따르면 입사는 적절한 상징화 과정을 통해 부재, 간극의 장애를 극복하고 이를 통해 자아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데 있으며, 따라서 이는 정상적인 애도 작업과 결부되어 있다. 반면 근원적으로 환상적인 성격을 지니는 합체는 대상의 부재를 상징화 과정을 통해 은유화하지 못하고 이 대상을 탈은유화해서 자아 안으로 삼켜버리며(이른바 식인성 합체), 더 나아가 이를 납골당 안에 안치시키고 이 합체된 대상과 스스로를 동일화한다.
데리다는 이처럼 아브라함과 토록이 입사와 합체를 구분하고 납골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비정상적인, 또는 실패한 애도 작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한 점을 높게 평가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구분은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이러한 구분이 정상적인 애도와 병리적인 애도, 또는 성공한 애도와 실패한 애도의 구분을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애도 작업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상징적·이상적으로 내면화하는 것, 곧 타자를 자아의 상징 구조 안으로 동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소위 정상적 애도, 성공적인 애도는 타자의 타자성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타자에 대한 심각한 (상징적) 폭력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데리다가 보기에 애도가 타자에 대한 존중, 타자에 대한 충실한 기억을 목표로 하는 이상, 정상적 애도는 실패한 애도, 불충실한 애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납골로서의 실패한 애도, 합체는 타자의 온전한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오히려 성공한 애도, 충실한 애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데리다는 이 역시 충실한 애도일 수 없다고 본다. 자아 내부에 타자가 타자 그 자체로서 충실하게 보존되면 될수록 이 타자는 자아로부터 분리된 채 자아와 아무런 연관성 없이 존재하게 되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입사에서보다 더 폭력적으로 타자는 자아와의 관계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애도의 필연성 및 불가능성이라는 역설 또는 이중 구속이며, 이는 주체가 근본적으로 식인 주체라는 점을 보여 준다. 곧 타자와의 관계 이전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아· 주체· 우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 주체· 우리는 항상 이미 타자와의 입사나 합체를 통해 비로소 자아· 주체· 우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 애도라는 관념이 전제하는 것처럼 타자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실패한 애도라는 관념이 전제하는 것처럼 타자의 완전한 합체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자아, 주체의 존재가 항상 이미 타자의 존재, 타자에 대한 애도를 전제한다면, 중요한 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의 문제,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타인과의 관계, 곧 정의") 타자와 어떻게 정의로운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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