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탄압의 서곡
순조는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가리는 인물이었다. 옥새를 거머쥔 정순왕후는 우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판직에 앉히고 벽파들을 대거 등용한다. 권력을 잡은 김관주,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거 살육함으로써 벽파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즉시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를 표방했다. 이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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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의 천주교 탄압의 두가지 이유
그 첫째가 왕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군신간의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의 지배 윤리인 유교 윤리를 근 본적으로 부정하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미연에 막는다는 것이요 둘째가 천주교를 공부하거나 믿는 사람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천주교도를 잡아들이는 것은 곧 유교 윤리를 받든다는 명분도 얻을 뿐더러 반대파인 정적을 제거하는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실권을 잡자마자 척사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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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작통법
이는 본래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서 서로 강도, 절도 같은 범법 행위가 일어나는지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치안 유지법이었다. 그 방법을 천주교도 색출에 동원하여 다섯 집끼리 서로 천주교도가 있는지 감시하고 고발하게 하였 다. 그 중에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다섯 집이 모두 화를 입게 되는 식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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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작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동안 실권을 잡고 있던 김관주는 정조의 뜻을 배신한 죄와 왕비의 삼간택 방해를 방조한 죄목으로 귀양가다가 병사하고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는 이미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해치려 한 죄목으로 역적의 율로 다스려졌다. 이 후로 국왕의 장인인 국구가 된 김조순은 나이 어린 왕을 곁에서 모시면서 세도 정치의 첫 장을 열게 된다. 후대 사가들은 김조순이 그런 대로 청류임을 표방하여 어떤 종류의 벼슬도 사양하며 오로지 국왕의 보필에 전념을 다했다고도 하지만 벽파가 물러난 조정의 자리를 채운 것은 바로 김이익, 김이도,김달순, 김명순 등 안동김씨일문이었다. 이들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해버리니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견제세력이 없는 정권은 부패하게 마련이다. 안동김씨 일문이 요직에 앉아 한가문의 영달을 위해 갖가지 전횡과 뇌물 수수를 일삼으니 공평한 인사의 기본인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신분 질서의 급속한 와해와 함께 왕조 사회의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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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서북인 차별대우 철폐와 세도정권의 가렴주구 혁파, 정도령의 출현 등을 기치로 내세운 이 반란은 몰락 양반과 유랑 지식인 서민 지주층의 재력과 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난 대규모 반란으로서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체제 변혁 까지를 도모하는 정치적 반란이기도 했다. 광산 노동자, 빈농, 유민들을 봉기군의 중심 부대로 삼고서 홍경래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출병했다. 그리하여 거병한지 열흘 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 정주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곧 관군의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해 들어간다.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보급로가 끊긴 채 무려 4개월 동안 관군과 대치하다가 1812년 4월 마침내 관군에 의해 제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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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대의 세도정치
집권 초기에는 정순왕후를 둘러싼 경주 김씨 일문 아래 있었고 친정을 하게 된 15세 이후로는 장인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 아래 있었다. 순조 역시 세도 정권의 전횡을 모를리 없었기에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서 풍양조씨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외척세력인 풍양조씨 일문의 세도정권을 만들어냈을뿐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지는 정계 개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처럼 당시의 세도정권은 당쟁이 없는 대신에 반대파가 없는 독재 정권으로서 민생과 사회문제는 도외시하고 일문의 영달과 영예에만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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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의 배경
군신관계와 상하관계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성리학적 지배원리는 조선왕조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사상적, 통치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인 의례를 거부했으며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사상과 유일신사상을 주장했으니 그것은 유교사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또한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 양반층과 수탈과 횡포에 시달리던 서민층이 천주교 신앙을 통해 결합되는 것도 지배 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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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변천사와 폐단
순조시대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전단하다가 헌종대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에게 넘어가고 그것이 철종대에 와서는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에게로 넘어간다. 세도정권의 특징이라면 당쟁시대와는 달리 견제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어린 왕을 정권에서 배제시켜버리는 세도정권의 전횡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관료 사회의 부패와 백성을 상대로한 수탈, 민생의 피폐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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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원왕후 김씨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1800년(정조24년)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을 앞두었을 때 갑자기 정조가 죽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외척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로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1802년(순조2년) 10월에 왕비로 책봉된다. 순원왕후 김씨는 아버지 김조순과 오라비 김좌근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씨 일문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한 때 세자비의 외척인 풍양조씨 일문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기다가 헌종대에 이르러 다시 회복하지만 헌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자손이 없는 헌종의 왕통을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때 순원왕후 김씨는 조대비 일문이 미처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원상에 권돈인을 지명하고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지목하여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함으로써 안동김씨의 세도정권이 절정기를 맞게 한다. 순조와의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1857년 창덕궁에서 죽었다. 능호는 인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효명세자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났으며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다. 1812년 순조 12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이 때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으나 대리청정 4년만인 22세에 죽는다. 이때 그의 외척인 조씨 일파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김씨 일파와 정치적 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아들 헌종이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익종에 추존되었으며 1899년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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