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릉앞에서 나무쌤 친구들 단체샷!!
공양왕의 이름은 “요”, 20대 신종의 7대손이자 정원부원군 “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 비는 창성군 “진”의 딸 순비 노씨이다.
그는 어질고 자비로웠지만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유약한 임금일 수밖에 없었다. 즉위 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성계 일파의 압력과 간섭으로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죽이고, 1392년 조건이 건국되자 원주로 쫓겨났다가 간성군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으로 강등되었다. 1394년 다시 삼척부로 옮겨져 죽음을 당하고 만다.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
1392년에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도성인 개성에서 도망쳐 지금의 왕릉 근처로 도망쳐오게 된다. 마침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워졌고, 두려움과 배고픔으로 지쳐 있는 왕의 일행에게 건너편 골짜기에서 한 가닥 불빛이 보여 찾아가 보니 마침 작은 절이 있어 하룻밤을 묵고자 부탁했다. 그러나 때가 때이니 만큼 절에서 머물기는 어렵게 되었고 인근의 대궐고개 다락골 누각에 간신히 피신하게 되었는데, 인근 절의 스님들이 밤마다 몰래 공양왕에게 식사를 날라다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식사동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왕과 왕비가 보이지 않아 스님들과 왕씨 일행이 온 산을 뒤지며 왕을 찾았으나 허사였다. 다만 공양왕과 왕비가 귀여워하던 삽살개만이 골짜기의 작은 연못 속을 향해 계속 짖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연못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람의 형상이 보였고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자 그 안에 왕과 왕비가 편안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장례를 치루고 능을 지키기 위해 삽살개 모양의 석물을 세워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로 인해 인근에 식사동 뿐만 아니라 왕이 잠들었다는 의미의 어침이 마을, 왕이 머문 곳은 한낱 고개라도 대궐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대궐고개, 왕이 묻혀 있어 이름 붙여진 왕릉골 등 여러 지면이 생겨나게 되었다.
비도오고 날씨가 쌀쌀해서 밖에서 하는 답사를 힘들어 하는 친구들을 위해 고양향교에 도착했을때 수업전에 간단히 몸풀기 게임 먼저 했는데 우리 친구들 너무 재밌어 하네...샐러드게임 재밌었지???
토마토라고 했을까? 오이라고 했을까?
술래가 됐음에도 그저 신나는 우리 친구들 너무 예쁘다^^
친구야 친구야 나 뭐라고 외칠까??? 그래...양배추라고 할까? ㅎㅎㅎ
세번 걸린 친구들 벌칙으로 코끼리코 15번 돌고 차렷!!! 우리 친구들 코끼리코 하고도 안넘어지더라,,,
단체로 코끼리코...
고양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양향교는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처음 지었으며, 이후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명륜당, 전사청, 외삼문은 1984년에 새로 만들었고, 그 외 건물들은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고 한다.
건물 배치는 교육 공간을 앞쪽에, 제사 공간을 뒤쪽에 둔 전학후묘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앞쪽에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으며,뒤쪽에는 대성전과 동무·서무, 전사청이 있다.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전사청은 서무 뒤쪽에 자리하며 지금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을 교육시키고 교관이 머물던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향교에 대하여 쌤이 수업하고 있는데 우리 친구들 똘망똘망하게 수업을 잘 들어서...쌤이 사진도 예쁜게(?) 찍어 주었단다^^ ㅎㅎㅎ
대성전은 제향공간이지?
우리 친구들 공수배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
쌤이 포토제닉상을 주겠다고 했더니 우리 친구들 아주 멋진 포즈로 자신의 장기를 뽐내고 있네^^
버스 안에서 최영장군이 얘기한것을 내가 최영장군이 되어 읽고 있는 친구들!!!
최영장군묘
우왕 즉위 뒤 고려의 외교는 친명에서 친원으로 바뀌어, 고려·명나라 관계가 악화되었다. 1388년 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 관하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에서 최영장군이 중심이 되어 명의 대 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정벌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는 정벌군이 압록강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②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③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벌할 염려가 있으며, ④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⑤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며 요동정벌은 불가능하다고 상서로써 회군을 청하였다.그러나 평양에 있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5월 20일 회군을 결행하여 군대를 국내로 돌이켰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정벌군과 싸우려 하였으나, 얼마 뒤 최영은 이성계에게 붙잡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우왕도 강화도로 쫓겨났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한손에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참고로 최영장군묘 뒤에 묘가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은 최영장군의 아버지 최원직공의 묘이다.
최영장군묘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고 있는 친구들...
나중에 쌤이 무슨 소원 빌었냐고 물어 봤더니...중간고사 잘보게 해달라고 한 친구들 있고, 부모님과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는 친구도 있었고...
아마 최영장군이 다 들어주실꺼라 믿는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와서 날도 쌀쌀하고 우리 친구들 답사하기 힘들었을텐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수업하는 모습이 참 기특했단다.
신나게 공부하고 신나게 놀고 역쉬~~ 우리 한뫼 친구들 화이팅!!!
우리 친구들 한달동안 잘 지내고 다음달에는 박물관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