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1850~1927년 3월29일 일흔여덟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27년 4월7일 원남 이상재 선생의 유해는 10만 군중의 슬픔속에 경성을 떠나
그의 고향인 충청도 서천에 묻혔다
장례식에 참가한 사회 단체는 129개나 되었고 그날 모인 군중은 1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사회 운동가,애국 지사, 호는 월남 일찍이 박정양 홍영식 등과 사귀며
사회 개혁에 큰 뜻을 두었다.
서재필과 함께 독립 협회 를 조직하여 민중 계몽에 힘썼고,개화당 사건으로 복역 중
기독교 신자가 되어, 신앙 운동을 통해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898년 만님 공동회의 사회를 맡아 정부에 보내는 결의 사항을 의결하였다.
이 때 우리 나라 최초로 다수결 방법을 채택하여 진행시켰다.
소년 연합 척후대 초대 총재, 조선일보사 사장,신간회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는 일생을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애국심으로 살다 간 애국자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민족의 선각지 월남 이상재 선생은 당시대 우리 민족의 정신적 표상이었다.
독립협회 신간회 등의 민족 운동 단체를 주도하며 개화와 자주 독립 정신을
담은 명연설로 대중을 이끌었다.
한말의 풍운과 치욕의 일제 암흑기를 살면서도 해학과 풍자를 잃지 않았던
이상재 선생 그의 풍자 속에는 민중을 깨우쳐 주는 비수가 늘 숨어 있었으며,
늙은 청년이라 불리 만큼 젋은이들과 어울리길 좋아했다.
백발의 청년이란 이름에 걸맞게 죽는 날까지 왕성한 사회 활동을 전개해
스스로 젊은이들의 모범이 되었다.
웃음 가운데 눈물을 감추시었고, 벼슬은 하였으나 영달에 팔리지 않았다.는
월남 선생의 묘비문에 새겨진 문구는 그의 인물 됨됨이를 그대로 표현한 말일 것이다.
민중의 벗 이상재
선생은 웃음 가운데 눈물을 감추시었고 위엄을 지니시었다.
벼슬을 하였으나 영달에 팔리지 않으시었고, 부귀를 탐내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뜬 구름과 같이 여기시었다.
아 글은 월남 이상재의 묘비에 씌어 있는 비문의 일부로 그의 인생관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청년들에게 올바른 의식을 심어 주었으며,
민족의 지도자로서 이해 타산이나 일신의 영예에 현혹되지 않고 민중과 삶을 함께
한 이상재의 지도자적 위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끼닛거리 대신 책을 살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그의 지극한 효성과 슬기는 이헌 집안의 분위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효자이며 총명했던 이상재는 집안의 덕망 놓은 어른으로부터
나라 사정과 나라 밖의 정세에 관하여 듣고, 과거 시험 공부를 열심히 했다.
벼슬길에 오르면 나라를 위해 힘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나라 사랑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시험에 부정 부패가 만연했던 때라 낙방의 고배를 마셔 실의에 빠진다.
그러다 그는 우연치 않게 승지 박정양의 집에서 식객으로로 머물면서 생활하게 된다.
박정양과의 만남이 커다란 전환점이 될 줄은 그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집주인이었던 박정양과 교분으로 이상재는 신사 유림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 시찰을 하게 된다.
일본의 발달된 제도와 문물을 살펴본 그는 개화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개화를 통해 나라가 발전되어야 해
그 후 식객 생활 17년 만에 우정국 주사 벼슬에 올랐으나 기쁨도 잠깐 임무를 맡은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갑신정변이 일어나 더 이상 일을 할 수없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상재는 박정양과 함께 미국에서 외교 활동을 할 기회를 얻었다.
그 곳에서 그는 우리 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자주적 외교 활동을 펴 한민족의 위대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자주적 외교 활동이 그만 청나라의 화를 불러일으켜 귀국 명령을 받게 된다.
힘없는 나라의 슬픔이 아니랄 수 없다.
그런 와중에서도 서재필과 독립 협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민족 운동을 벌리는 데 앞장 서는
그를 재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애국 애족의 뜻을 담은 강연을 하고 다녔으며 황성 기독교 청년회에 가입하여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나라 사랑의 정신을 심어 주는데 온 힘을 쏟았다.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풍자와 해학으로 그들의 행위를 규탄하고 매국노들에 대한
처단을 주장했던 이상재!
그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행동으로 보여 준 실천적 인간이었다.
늙은 청년 이라 불리던 이상재는 미래의 주인이 될 청소년들과 호흡하면서 일제 치하의 절망을
극복한 애국자요
민중과 함께 한 참다운 지도자로서 우리들의 가슴에 남을 것이다
마가목
쉬땅나무열매
스킨답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