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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환 작품해설
냉철한 시대진단과 선비정신의 지표
민 병 도 (시인)
'좋은 시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각기 다양하다. 시대에 따라서도 다르겠지만 같은 시대라 할지라도 신분이나 환경에 따라 다르고 가치관에 따라서도 그 대답은 판이하다. 어떤 이는 도덕성이나 잠언적 메시지를 말하기도 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집단적 이익이나 이데올로기를 꼽기도 할 것이다. 언어가 지닌 아름다움을 주장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형식이 갖는 조형미를 택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양한 대답을 관류하는 한 가지의 공통점은 그 시를 통한 감동과 깨달음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감동이나 깨달음에도 각각의 느낌이 있을 것이나 대개는 다음의 두 가지로 분류가 된다. 그 하나는 글 쓴 이의 개인적 감동이나 깨달음에 초점을 맞춘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적인 감동과 깨달음을 지향한 경우가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가 비교적 아마추어적 지향이라면 후자의 경우가 프로페서에게 요구되는 가치덕목이라 하겠다. 오늘날의 시가 고도로 발달한 인쇄문화라는 수단을 빌려 독자에게 전해지는 까닭에 독자들은 시인에게 후자의 의무를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독자를 감동시킬 것이며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것인가. 감동이란 모름지기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현상의 발견에서 오는 마음의 동요에 다름이 아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려의 깊이나 꿈꾸지 못한 미지의 세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양심의 노래 등 감동의 불씨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그런데 그 감동의 인자들은 반드시 깨달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는 사실이다.
깨달음,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바라볼 줄 아는 자세라야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일이 눈부시기 마련이다. 따라서 감동을 주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깨달음의 자세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걸어온 지난날들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의 경험이 미래로 나아가는 길잡이 인 것만은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미래로 가는 길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버릴 것과 주머니에 담아야 할 것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충분한 고민과 실사를 통한 검증만이 미래에 대한 보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주환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독도』를 읽으면서 문득 '좋은 시'가 지녀야 할 조건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의 시에는 바로 그 좋은 시를 위한 깨달음으로 가는 갖가지의 방법들이 사전처럼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는 시종일관 현실에 대한 진단과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처방으로 가득하다. 아니 어쩌면 아직은 임상실험이 끝나지 않은 섣부른 처방전보다는 오진(誤診)에 대한 우려와 근심이 더욱 큰 것인지 모른다. 어떻든 그의 시를 감싸고 있는 긴장미는 읽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다.
사실 조주환은 지금껏 두 권의 시집을 상재하면서 한 번도 작품해설을 붙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필자에게 작품해설을 청해왔을 때 실은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는 자신의 시조에 관한 한 대단한 자존심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1986년, 그러니까 등단 10년 만에 묶은 첫 시조집 『길목』의 상재 이후 20년 만에 묶는 작품집이다. 물론 1991년 『사할린의 민들레』를 발간한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심도 있게 파고 든 장편시조였던 점을 감안하면 지나치리만치 그의 보법은 조심스럽다.
등단 30년에 세 권의 시집, 물론 가려서 뽑은 것들이지만 분량으로 말하자면 조금은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질적으로 그 아쉬움을 충분히 메워주고 있다.
1. 역사적 자각과 길 찾기
조주환의 시에서 우선 두드러지는 관심은 역사기행을 통한 자각과 미래에 대한 길 찾기이다. 역사란 다가올 미래의 거울과 같다. 비록 시간적 차이에서 오는 모습은 다르지만 세심하게 읽어보면 판단의 순간마다 어떤 역정을 딛고 그 고비를 넘겼는지, 그리하여 앞으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지나간 역사는 역사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거기서 미래를 읽을 수 있다는 데 의미가 크다.
풀빛 언덕으로 실바람은 나부끼고
연신 물결져 오는 그 감성의 바다 위로
한 떨기 조선의 별이
제 속살을 태운다.
낯선 이국의 하늘, 그 혹한의 벌판에 떠는
깡마른 수숫대 같은 흰 옷섶의 뼈 속에 박힌
그 먹빛 피멍을 삭히며
가슴에 뜬 별 하나.
-「윤동주 생각」 전문
'-용정중학교에서' 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에서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민족의 이름으로 죽어간 윤동주 시인의 고결한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과 감사의 마음이다.
용정중학교는 항일 시인 윤동주가 다닌 학교로 그는 재학시절에 광명중학교를 다녔으나 통합하여 대성중학이 되었다가 해방 이후에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특히 이 학교 졸업생 가운데에는 70여명의 항일(抗日)열사가 배출되어 민족운동사에 이름을 빛내기도 하였다. 용정중학교 교정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와 윤동주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이러한 민족의 혼이 불타오르고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시인은 오롯이 빛나고 있는 별 하나를 만난다. 그것도 하늘에 뜬 별이 아니라 가슴에 뜬 별이다. 조국을 사랑하였다는 죄로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목숨을 빼앗기고 이국의 하늘을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정신의 길을 비추는 별이 된 윤동주, 조 시인은 지금 그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아무런 구원과 위안의 손길을 보낼 수는 없지만 "깡마른 수숫대 같은 흰 옷섶의 뼈 속에 박힌" 조국애에 가슴 아파하고 있다.
이 시는 두 수 한편으로 된 짧은 기행시에 불과하지만 일반적인 기행시가 갖는 수사적 가벼움이나 정서적 흥분에서 벗어나 있다. "풀빛 언덕으로 실바람은 나부끼고"로 시작되는 초장부터 시인은 고도의 상징성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풀빛 언덕'은 어디인가? 물론 윤동주가 자란 만주의 용정이겠고 지금 시인이 서 있는 용정중학교일 것이다. 하지만 풀빛이 가져다 주는 이미지는 단순한 들판의 풀빛만이 아니다. 순하기만 한 풀의 이미지를 지닌 조국의 땅이요, 나부끼는 '실바람'은 평화로운 시간의 설정이다.
그 평화의 땅에 "연신 물결져 오는" 자연의 질서를 그르치며 "한 떨기 조선의 별이/ 제 속살을 태"우는 현장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역사의 거울에 비친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고치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시인이 행간에 흐르는 조사 하나 마저도 소홀히 다루지 않고 감정의 내면으로 가라앉히는 이유는 바로 윤동주의 거룩한 죽음을 헛되이 하지말기를 다짐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푸른 유리컵 같은 저 동해의 자궁을 열고
몇 조각 뼈로 태어난 백두의 핏줄 독도가 산다.
수줍은 태초의 햇살이
맨 처음 닿는 곳.
해협 밖 미친 바람이 제 뿌리를 흔들 때는
시퍼런 힘줄을 떠는 겨울바다의 등뼈
결연히 창검을 세운다.
그 실존의 한 끝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혈육들이 다 잠든 밤
거친 풍랑에 꺼질듯 깜박이다
가끔은 고독에 깎이며
소금 꽃을 꺾어 문다
-「독도」 전문
독도, 최근 일본의 한 지자체에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조례를 통과시킴으로써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섬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에 속한 섬으로 동경 131 51 21 ∼131 52 30 , 북위 37 14 ∼37 15 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에는 삼봉도, 우산도 등으로 불렀으나 고종 18년(1881)부터 독도라 부르게 되었다. 물론 일본에서는 다케시마(죽도-竹島)라 부른다.
그런데 조주환 시인이 이 시를 발표한 시기는 1997년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영토분쟁과는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백두'라는 단어가 두 번씩이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민족의 가슴속에 절대불변의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백두'란 한반도의 상징적 이름이며 정신의 뿌리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떨어져 사는 자식을 그리워하던 부모가 마침내 자식을 만난 그 감회처럼 그저 애잔하고 그저 대견하기만 하다. 그것은 '푸른 유리컵 같은 저 동해의 자궁을 열고' 나온 '백두의 핏줄'이며 그것은 '동해의 등뼈'였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인식의 저편에서 날마다 파도와 싸우고 있는 그것은 곧 '몇 조각'의 '뼈'였던 것이다.
첫 수가 독도의 태생적 존재의 대한 환기였다면 둘째 수는 자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아무리 자연의 이치대로 변해 가는 모습들이라고는 하지만 예기치 못한 비바람과 가뭄과 작열하는 태양과 무서우리만치 캄캄한 어둠 앞에서 결연히 일어서서 자신을 지키는 일은 거룩하다. 그것이 생명체이든, 생명체로 환치된 바위 덩어리이든 시인에게는 그것이 삶의 교과서에 다름 아니다. 놓치기 쉬운 행간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서 자신의 미래는 물론 독자에게 전하는 일은 일종의 구도자적 노동이다.
그러기에 '시퍼런 힘줄'을 읽어내고 그 힘이 지향하는 '실존의 한 끝'을 찾아 '결연히 창검을 세'우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아름다움이며 그것이 존재의 위의(威儀)인 것이다.
하지만 허용 받은 시간이라고 마냥 칼날을 세우는 날들의 연속일 수는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보다 그 섭리에 순응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깨닫고 있다. 그러기에 '백두대간을 따라 혈육들이 다 잠든 밤'을 '소금 꽃' 꺾어 물고 고독을 견뎌내는 독도의 자세를 가슴 깊이 새겨 넣는 것이다.
이 시 독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주환의 시에서는 유난히 '뼈'가 많이 등장한다. 뼈는 생명체를 지탱하는 기본 구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피와 더불어 생명체의 상징적 개념이며 본질이나 근원적인 현상, 존재의 가치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메타퍼의 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조주환은 심도 있는 정신적 접근 방법으로 형식의 담금질 못지 않게 일정한 시어의 연상작용을 빌리는 수법을 즐긴다고 보여진다. 이 또한 삶에 임하는 그의 자세이리라.
여기 역사의 질곡에서 아픈 상처로 남겨진 또 하나의 현장이 있다.
한·중 국경에 와 두만강의 신음을 본다.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무산 탄광이 쏟아내는
적갈색 하혈을 흘리며
중병이 들어 누운 강.
회억(回憶)의 눈발들은 갈꽃으로 부서져 삭고
아비의 땅을 탈출해온 피묻은 이야기들이
이국(異國)땅 풀섶 곳곳에
유골처럼 드러났다.
내 핏줄이 닿아 흐를 강 건너 산등들은
낯선 구호를 쓰고 웅크린 채 말이 없고
섬뜩한 상복을 걸친 듯 하늘은 자꾸 추락한다.
-「두만강에서」 전문
일반적으로 기행시에 있어서는 개인적 감정이 짙게 묻어나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시인의 감정이 최대한 절제되어 있다. 물론 조주환의 눈에 비쳐진 피사체의 묘사가 주조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상투적인 접근이나 흥분됨이 없이 견지자적인 평정심을 지키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러한 모습은 역사의 현장이라는 보편적 정서를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반추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다.
때로는 선린우호의 관계로, 때로는 반목과 적대의 관계로 이마를 맞대어야 했던 한반도의 국경에서 피묻은 민족의 아픈 역사를 되짚어 보는 시인의 마음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 게다가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무산 탄광이 쏟아내는/ 적갈색 하혈을 흘리며/ 중병이 들어 누운 강'을 보자니 자꾸만 그 옛날 갖가지의 핍박과 국란을 피해 건너야 했던 그 조상들의 모습이 어려온다.
왜 이다지도 수많은 사연으로 민족의 가슴을 가로질러 흐르는가. 게다가 분단이라는 조국의 현실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강이 무슨 잘못인가? 조주환은 지금 인간이 저질러서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다. 말하자면 역사를 통한 반성적 성찰이며 미래로 향한 길 찾기인 셈이다.
2. 시간에 대한 이해와 순응의 자세
시간은 누구에게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균일하게 다가온다. 왕후나 무수리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고 어린이나 노인이라 할지라도 차별이 없다. 그것은 자연의 순리이며 질서이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며 인간만이 그것을 기피해볼 역심을 품는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소중한 오늘일지라도 영겁의 세월 속에 스쳐 가는 한 순간일 뿐이며 광대무변의 우주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헤아릴 수 없는 모습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렇듯 찰라적인 순간을 보다 크게 확대재생산하고 보다 의미 있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차별성일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만이 나의 것이 아니며 나에게 의미되어지는 것만이 소중한 것 또한 아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기쁨만이 기쁨이 아니며 나를 쓰러뜨리는 불행만이 불행이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깨달음이 자신을 버리는 일이라고 한다면 자신을 긍정하는 일은 그 깨달음의 첫걸음이다. 시간의 속성 안에 자신을 의지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철학자라면, 성직자라면, 시인이라면 능히 그 시간의 변화 속에서도 절대불변의 기쁨과 마음의 충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흔을 겨우 넘자 글자들이 흔들리더니
자꾸 눈을 닦아도 달아나는 낱자들.
생각은 산 너머 하늘
노을처럼 번진다.
다시 고개를 돌려 돋보기로 낱자를 잡다
눈감고 그저 감감히 눈감고 볼 수밖에
달아나 벽면에 박힌
그 낱자를 찾는다.
눈에 안 뵈던 것들 눈감으니 더 잘 보인다.
낱낱이 가슴에 쏠려 이슬 빛을 단 것들
그 모두 용서도 하고
실타래를 풀어준다.
-「심안」 전문
이 시에서 조주환이 발견한 깨달음은 '눈에 안 뵈던 것들 눈감으니 더 잘 보인다'라는 셋째 수 초장에 집중되어 있다. 지금껏 눈을 통해 그토록 많이 보아온 것들은 표피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에 불과하였다. 나이를 먹고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얻는 나이가 되어서는 그토록 화려해 보이던 꽃도, 그토록 뜨겁게 목마르던 사랑도 빛이 바래고 열기 또한 식어버리기 마련이다. 마음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이미 깊은 깨달음의 과정에 들어 있다는 반증이다.
그쯤에 가면 풀지 못할 분노도 없으며 용서 못할 죄악도 없다. 조 시인은 시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이미 색(色)이 곧 공(空)이요, 공이 곧 색이라는 불이(不二)사상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3수로 된 이 시는 이미지 전개과정이나 수사에 있어서의 절제가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언어의 직조 속에서 읽혀지는 익숙함보다 내용이 주는 메시지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이러한 경향은 「폭포에게」에서도 여전히 호소력 있게 읽혀진다.
누구를 위한 투신(投身)인가. 이 청맹(靑盲)의 목숨이여
웅크려 응달에 떠는 핏줄도 이웃도 두고
제 한 몸 허공에 내던져
도주(逃走)하듯 사라진,
이 비열한 영혼이여, 돌팔매를 치느니.
광장 분수에 가 치솟는 분노를 보라
한 떨기 가녀린 풀꽃도
살을 떠는 연대에,
한 시대의 양심을 비껴 바위틈에 숨어든 뒤
육신을 자학(自虐)하듯 부서져간 그 절벽에
핏발선 역모의 밤 같은
긴 흉터만 남아 떤다.
장엄한 소리를 앞세우며 떨어지는 폭포 앞에서도 시간에 대한 이해와 역설적으로 다가오는 순응의 자세는 여일하다. 다만 「심안」이 자신의 변화에 대한 관심이라면 「폭포에게」는 자신의 감정이 이입된 자연현상에 대한 사유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투신(投身)'이라고 하였다. '제 한 몸 허공에 내던져/ 도주(逃走)하듯 사라진' 물줄기는 지금 조주환의 눈앞에서 흐르는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양심을 비껴 바위틈에 숨어든 뒤/ 육신을 자학(自虐)하듯 부서져간' 사람의 흔적이요, 시대의 정신이다. 지형을 따라 그저 무심히 흘러갈 뿐인 물줄기이지만, 그리하여 광장에서 치솟는 '분수'이거나 '한 떨기 가녀린 풀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시인의 가슴에 닿으면 아무도 읽어준 적 없는 인생독본이 된다.
3.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
조주환 시의 또 한가지 갈래 가운데에는 문명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적잖게 눈에 띈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대개 역사적 근거나 사실에 입각해서 기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넓히고 있다.
신석기 바람이 이는 그 태고의 나일 골짜기
터놓고 옷고름 풀고 젖 먹였을 그 날의
아직도 애끊는 모정에
눈 못 감고 우는 게다.
-「대영박물관」 세수 중 둘째 수
등뼈마저 허옇게 헐린 산등은 황달을 앓고
강둑을 흔들어대는 차량들의 불빛에 질려
쫓기듯 헐벗은 논밭이 도심으로 달아난다.
-「겨울 들」 3수중 둘째 수
등뼈가 구부러진 저 산의 속내를 보라.
밤낮 핵분열하듯 제 골수를 무너뜨리는
끔찍한 내전의 화염에
반란군을
안고 우는,
-「백혈병」 전문
첫 번째 작품은 '-여자 미이라'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영국의 박물관 전시품 가운데 서기전 1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여자 미이라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외형적으로는 단순히 시인의 눈에 들어오는 유물에 대한 단상이지만 시인의 포커스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사체유기, 혹은 상업적 면죄부에 대한 비판과 연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뼈 속까지 말리고 말려 영원을 살려던 여인'이 어쩌다가 고국 이집트는 고사하고 영국까지 끌려와 '대영 박물관 유리관에 갇혀'서 울고 있는가. 생성과 소멸은 우주의 가장 보편적 질서에 속한다. 비록 생시의 욕망과 집착에 따른 미이라라 할지라도 그 자체의 존엄과 초상권은 보호받아 마땅하거늘 힘의 논리에 따라 남의 나라에 끌려와서 소멸마저도 거부당하는 형벌을 감내해야 하는가. 또 그렇다면 소위 힘의 논리와 문명의 이기는 가진 자들만의 기득권이란 말인가. 지금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자성이며 성찰의 마음이다.
두 번째의 작품에서는 인간생존의 터전으로 이용된 겨울 들판에서 문명이라는 이름이 남긴 상처와 산업화가 빚은 이농현상이 가져다 줄 정체성 상실을 우려하고 있다. 쌀이 재배되고 콩이 익어가던 생명체의 공간에 느닷없이 '아파트 군단'이 들어와 '병영처럼 진을 치'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고발성 비판은「백혈병」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등뼈가 구부러진 저 산의 속내를 보라'고 시작되는 이 시에는 정작 백혈병의 실체는 인간이 아니라 '등뼈가 구부러진 산'이다. 제 몸을 키워서 스스로 망해버린 공룡의 선택처럼 우리들의 선택 또한 '끔찍한 내전'으로 치닫고 있다.
이와 같은 시들에서 보여지는 조주환의 정신성은 매우 강건하면서도 건조한 향기를 지니고 있다. 자신의 감정에 도취되거나 흥분됨이 없이 언제나 일정한 소금 끼를 유지하여 자신으로 인한 변질을 차단하고 있다.
4. 긴장된 절제미와 서정의 아름다움
전체적으로 볼 때 조주환 시의 특징은 냉정하고 분석적이어서 교훈적으로 다가오거나 도덕적 재무장을 권유받기 마련이다. 그것은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가 「어머니」, 「천 년의 노을」, 「대왕암」, 「바람이 우는 날」과 같은 가족애 또는 혈육애이거나 「폼페이」, 「공룡 발자국」,「돌밭에서」와 같은 철리(哲理)에 대한 합일과 존재론적 성찰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시에도 주목할만한 회화성과 서정미 짙은 작품들이 있다. 「낙엽길」이 바로 그러한 작품이다.
낙엽진 가지 사이로 신의 자궁이 보일 듯하고
탯줄처럼 드러나는 저 원초의 고향길로
다 낡은 영혼의 집 한 채
지팡이에 끌려간다.
물소리로 흔들리는 개망초 꽃밭 너머
가을 소풍이 끝난 산그늘은 구부러지고
몇 마리 길 잃은 새들만
빈 벌판을 건넌다.
-「낙엽길」 전문
아름다운 작품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의 아름다운 한 때를 보내고 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 자신들의 본디 모습으로 돌아가는 계절이다. 비록 두수로 된 짧은 시이지만 시인이 겨냥한 세계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첫 수에서는 한편의 영화 포스트 같은 영상미가 돋보이는 화면을 연출해내고 있다. '신의 자궁이 보일 듯한' 하늘 아래로 또 하나의 출발과 귀환의 사이클을 형성하고 있는 고향 길로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가는 풍경이 눈에 훤하다.
그러면서도 행간마다 한껏 멋을 부린 흔적들이 역력하다. '다 낡은 영혼의 집 한 채/ 지팡이에 끌려간다'로 마무리 된 종장처리를 보면 얼마나 많은 조탁을 거쳤는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한 표현의 기교는 둘째 수에서도 한결 같다. '물소리로 흔들리는 개망초'도 그렇지만 '가을 소풍이 끝난 산그늘은 구부러지고'에 오면 마치 언어의 연금술사와도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몇 마리 길 잃은 새들만/ 빈 벌판을 건'너는 가을들에서 가을보다 먼저 돌아가 버린 마음의 길 찾기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다만 한 가지, 낙엽 길에 무슨 이유로 개망초가 등장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 밖에도 조주환 시인의 시에는 「무너지는 음절」,「부토」와 같은 시사진단과 「지명의 강」같은 개인적 자각과 반성적 성찰을 겨냥한 작품들도 많이 보인다.
지금까지 조주환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독도』에 실린 시편들을 애독자의 입장에서 읽어보았다. 20여 년 만에 묶는 시간성이 짐작케 하듯이 편편마다 정(釘) 자국이 눈부시고 행간마다 묵언의 메시지가 가득하다. 그의 언어는 느리되 정곡을 찌르고 그의 사유는 언제나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
조주환의 시조는 '사유'보다는 '직관' 쪽에 가깝다. 그것은 아마도 평생을 교육자로서 살아온 선비정신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편마다 청진기가 들려져 있고 시편마다 작은 촛불이 들려져 올곧은 삶을 향한 몇 갈래의 길들이 환하게 독자들을 인도하고 있다. 언제나 그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현실을 조명하되 좌절하지 않으며 냉철한 진단은 내리되 희망을 버리지는 않는다. 그것이 그의 시조가 지닌 가치요 미덕이다. 분명한 것은 결코 가볍지 않은 그의 처방이 가져다 줄 민족정신의 건강성과 그의 전정술에 다듬어져 온 사도(師道)라는 나무에 열린 시조열매가 지닌 향기는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