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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趙秉式]
1832(순조 32)~1907(융희 1). 조선 후기의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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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공훈(公訓). 아버지는 현감 유순(猷淳)이다. 1858년(철종 9)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검열·정자를 거쳐 1862년 임술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전라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그뒤 대사성·성천부사·이조참의·강화유수 등을 지냈다. 1878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충청감사 재임시의 탐학(貪虐)으로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883년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죄인을 신문중에 죽인 일로 다시 유배되었다. 1885년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에 가서 흥선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하여 귀국시켰다. 1888년 외무독판으로 전권대표가 되어 러시아 대표 베베르와 한로육로통상장정을 체결하여 경흥(慶興)을 새로운 개시장으로 지정했다.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 방곡령(防穀令) 실시를 계속하다 칙령항거의 죄로 3개월 감봉되고, 강원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이어 이조판서·공조판서·경기감사 등을 역임하고 1892년 11월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한 후 관할내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청원서(伸寃請願書)를 보내왔으나 묵살했다.
1893년 2월 삼례 집회가 열리자 교조신원은 지방관의 권한 밖의 일이므로 처리할 수 없으나 도내의 동학도에 대한 침탈은 금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여 해산시켰으나, 동학교도들이 그의 탐학불법을 논함으로써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의 요청으로 삭탈관직되었다. 1898년 의정부찬정이 되었으나, 7월 독립협회의 압력으로 해임되었다가 10월 복직되었다.
독립협회의 강요로 고종이 중추원관제를 공포한 그해 11월 4일 밤 군부대신서리 유기환(兪箕煥), 법부대신 이기동(李基東)과 모의하여 독립협회가 황제체제를 붕괴시키고 공화정치를 실시하려 한다는 익명서(匿名書)를 시내 거리에 붙이게 하고, 독립협회가 대통령에 박정양(朴定陽), 부통령에 윤치호(尹致昊), 내부대신에 이상재(李商在) 등을 임명하려 한다고 고종에게 무고(誣告)했다.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구속하고 협회를 혁파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이 때문에 만민공동회가 열리자 흉적(兇敵)으로 규탄을 받고, 11월 26일 열린 만민공동회 대표와 고종과의 면담에서 유기환·이기동·홍종우(洪鍾宇) 등과 함께 8흉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처형이 요구되었다. 그는 황국협회의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1899년 중추원의장이 되고, 이듬해 탁지부대신이 되고 주일특명전권공사로 일본에 다녀와 의정부참정으로 법부대신서리를 겸했으나 주일공사로 있을 때 공금을 횡령한 일로 입건되었다. 1902년 이후 궁내부특진관·외부대신·내부대신·참정대신·판돈녕부사·장례원경 등을 지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방곡령
개항 이후 중앙정부나 지방관이 일정 지역 내의 곡물이 타지방이나 외국으로 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행정의 강제력을 동원하여 곡물의 유통을 통제한 경제정책. [실시 배경] 조선 후기 이래 상품경제의 발전과 함께 지주의 소작미나 부농의 잉여생산물 등이 상품화하면서 지주나 부농, 또는 이들의 곡물을 매입하거나 판매를 위탁받은 곡물상인들은 대규모 곡물수요가 있는 서울을 비롯한 도시나, 흉작 등으로 곡물이 부족한 지방에 곡물을 운송해 상업상의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 이들의 곡물유출은 유출지역 내 곡물가격의 등귀현상을 유발해 해당지역 지방관은 관할지역 내의 수요곡물을 확보하고 곡가 안정을 꾀하는 수단으로 방곡을 실시했다. 그러나 원래 지방관의 방곡실시가 기존의 법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것인데다가 각 지역의 방곡이 심해질 경우 정치의 중심지인 서울의 곡가 안정을 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방곡이 실시될 때마다 이를 금지하고 있었다. 1876년 개항 이후에도 이같은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개항 초기 중앙정부는 방곡을 금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일본으로의 곡물유출이 증가됨에 따라 종래의 국내 곡물유통과는 다른 조건이 형성되었으며, 지방관의 방곡은 대일유출(對日流出)의 저지와도 긴밀히 관련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도 방곡은 여전히 법제적 명령으로서의 근거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1876년 체결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에는 곡물의 수출입을 허용하는 규정이 있어, 1883년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이 체결되기 이전에는 대일유출을 저지할 조약상의 명분이 없었다. 1883년에 이르러 국외로의 유출방지를 목적으로 1개월 전의 사전통보 후 방곡령을 시행할 수 있다는 조문이 마련됨으로써 제한적이나마 제도적 장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역시 일본측 주장에 따라 중앙정부의 명령에 의해 지방관이 시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되어, 지방관이 독자적으로 실시하는 법제적 근거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의 체결 이후 방곡시행 때마다 지방관들은 이에 근거해 방곡령을 발포했기 때문에 이 이후의 방곡행위는 방곡령이라는 행정명령의 시행으로 볼 수 있다. [실시 시기] 방곡령은 1876년 개항 이후 1904년까지 100건 이상 발령되었다. 실시 원인은 외압(外壓)에 의한 곡물유통구조의 변동과 관련되어 있으며 대개 3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 1876~84년 이 시기의 방곡은 14건 이상이 발생했는데, 종래와 같은 국내곡물수급 구조 내에서 발생한 경우와 대일유출을 저지하기 위해 나타난 경우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일본상인은 개항장 밖에서 행상할 수 없었으며 곡물수출도 일본과의 전체 무역량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전자가 보다 우세했다. 전자의 구체적 목적은 상인이 곡물을 매점하는 도매행위를 막는 데 있었으며, 후자는 밀무역(密貿易)을 막으려는 것과 세곡(稅穀)이 개항장으로 부정유출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역적으로도 중앙정부가 방곡시행을 금지한 곳은 서울 중심의 유통권과 관련된 지역이었으며, 주로 대일유출과 관련해 나타난 지방은 이 시기 곡물수출의 중심지인 부산항의 배후지인 경상도였다. • 1885~94년 이 시기에는 외국상인의 개항장 밖에서의 행상이 가능해지면서 일본상인에 의한 대량의 곡물유출이 이루어졌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방곡령이 급증해 적어도 75건 이상이 발생했다. 실시 원인으로는 첫째, 곡물의 국외유출을 막기 위한 중앙정부의 전국적 방곡령이 1건 있었고, 둘째, 대외무역의 증가로 개항장 중심의 새로운 유통권이 형성되면서 서울 중심의 곡물유통권이 위협받게 되자 이를 보호하기 위해 실시한 것, 셋째, 일본상인의 행상 증가로 조선상인의 상권이 침해받게 되자 이를 보호하기 위해 실시한 것, 넷째, 지방관이 중앙정부에 납부할 세곡의 확보를 위해 실시한 것, 다섯째, 지방관이 일본상인에 대해 상업세를 징수하기 위해 실시한 것, 여섯째, 지방관이 방곡령을 실시한 후 곡물을 매집(買集)하고 방곡 전후의 곡가 차이를 이용하여 폭리를 꾀하기 위해 실시한것, 일곱째, 일본상인의 곡물매집으로 관할지역 내의 곡가가 등귀하여 대중적 저항이 야기됨으로써 지방관이 이를 막기 위해 실시한 것 등이 있다. 1890년까지는 경상도가 발생건수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1891년 이후에는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에서 가장 빈번히 시행되었다. 이같은 경향은 종래 부산항을 중심으로 곡물을 구입하던 일본상인들이 행상의 증가와 함께 서울 중심의 유통권까지 깊이 침투한 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1889, 1890년에 황해도와 함경도에서 실시된 방곡령이 일본과 극심한 외교적 마찰을 일으켜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자 중앙정부는 이후 지방관의 독자적 방곡령에 대해 엄금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 1895~1904년 이 시기에는 일본상인들이 곡물 교역시 조선상인에게 자금을 선대(先貸)하거나 입도선매(立稻先買)로 농민의 생산과정까지 침투하고 있었으며, 직접 토지를 구입해 생산과정에 개입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곡물유출이 대일 총수출액의 80% 이상을 차지했지만 방곡령의 발생건수는 전(前) 시기보다 줄어들어 14건 정도에 불과했다. 그 원인은 함경도와 황해도 방곡령사건의 배상문제로 곤란을 겪은 데다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압력이 강화되면서 방곡령사건으로 인한 배상문제를 지방관에게 책임지우는 등 지방관이 임의로 실시하는 방곡을 중앙정부가 적극적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곡물을 구입해 생계를 잇던 도시 빈민이나 빈농층을 중심으로 방곡령실시요구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지방관이나 정부가 실제로 실시한 사례는 적었고, 실시되었다 하더라도 일본의 외교적 압력 때문에 중앙정부는 이의 철폐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도 흉작으로 인한 중앙정부의 방곡령이 1건 있었고, 정부의 반대입장에도 불구하고 지방관이나 암행어사에 의해 일본상인을 대상으로 지역적 곡물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방곡령이 몇 차례 실시되었다. 그리고 갑오개혁의 조세금납화(租稅金納化) 조치 이후 지방관들이 상납금을 전용해 곡물을 개항장 등지로 운반하고 상업상의 이익을 취하는 과정에서, 싼값에 곡물을 구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관할지역 내 농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례도 많았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관권에 의한 방곡령 실시가 어려워지자 정부는 곡물유출에 대한 아무런 대응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대량의 곡물공급지로 전락해가고 말았다. 요컨대 개항 이후의 방곡령은 중앙정부가 외압으로 국내 시장권을 보호하지 못한 가운데 지방관이 곡물을 구매하여 생계를 잇는 대중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곡물의 유통과정에 침투한 일본상인들로부터 지역적 곡물시장을 보호하려는 데 실시의 근본목적이 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방곡령의 소멸은 일본자본주의가 이미 국내의 곡물유통을 본격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