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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거일 씨의 `국제화' 비판> 남영신 [조선일보 98년7월6일]
‘세계화 위해 민족 버리자니…천박한 과잉 세계주의’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의 역할은 이제 끝난 것인가. 세기말, 세계화 열풍 속에서 민족주의의 유효성에대한 회의가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 싹트고 있다. IMF 사태의 근본 원인이 따지고 보면 상대를 도외시한채 자기 세계에만 빠져있던 맹목적 민족주의 사고에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족주의 비판이 최근 가장 감성적이고 극적으로 나타난 케이스가 소설가 복거일 씨의 저서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 지성사간)이다. 그는 "우리사회의 시급한 과제 중 하나가 민족주의를 제어하는 것"이라며 심지어 영어를 공용어로 할 것까지 주장했다. 20세기 한국을 이끈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민족주의는 어느 정도 심각한 위험 상황인가. 복씨의 주장이 조선일보 7월3일자 책 소개를 통해 보도되자 인문과학자들 사이엔 격렬한 논쟁이 일 조짐이다. 이번엔 복씨의 논거에 대한 반박이다.
요즘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우리의 의식구조도 상당히 다양해져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 했던 주장들이 제기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러나 최근 간행된 소설가 복거일 씨의 '국제어시대의민족어'에 실려 있는 주장들은 그런 부류의 하나로 보고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심각한 독이 들어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민족주의를 버릴 것'을 주장하고 있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민족어를 버릴 것'을 주장하고 있다. '지구제국' 시대에는 민족주의나 민족어는 불필요하다는 생각에서인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이는 대단히 '용감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는 독도영유권분쟁이나 동해표기 등의 문제가 터졌을 때 우리사회에 나타났던 여러 부정적인 민족주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이제는 민족주의를 버릴 때가 되었다고 충고하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만 따진다 하더라도 둘 사이에서 약한 나라는, 그래서 둘 사이의 분쟁에서 훨씬 손해를 크게 입을 나라는 우리다. 아쉬운 쪽은 일본이 아니다….". 그가 우리사회에 민족주의를 버릴 것을 요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약소국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쉽게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강대국의 민족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약소국의 대응전략은 무엇인가.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국제기구에 하소연하는 것인가? 그가 주장한 우리사회의 감정적인 민족주의의 위험성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그의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민족주의 죽이기'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두 번째 주장은 '민족어를 버리고 영어를 모국어로 삼자'는 것이다. 그가 영어를 모국어로 삼자고 주장하는 근거는 놀랍게도 단순하다. 지금은 미국을 지도국으로 하는 '지구제국' 시대이고 이 시대에는 영어가 국제어로 자리 잡고 있으므로 우리가 '지구제국' 중심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영어를 처음부터 모국어로 배우는 것이 가장 낫다는 것이다. 다만 지금 당장은 민족주의자들의 맹렬한 반대로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여 국어와 함께 사용하게 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구제국'이 어떤 나라인지 그가 밝히지 않았으니 알 수는 없으나 공용어인 영어만 잘하면 그 나라의 중심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도 천박할 뿐만 아니라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으로 보는 생각도 단순하고 위험하기는 그가 배척하고 있는 민족주의자들보다 더욱 심각한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영어를 국제어로 보고 국어까지 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그가 어떻게 하여 국어 속에 들어와 있는 '쓰리, 와이로, 히야카시' 같은 일본어 찌꺼기를 되살려 쓰자고 주장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일본어는 영어와 같은 반열에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국어는 아무렇게나 의사소통을 쉽게 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면 되는 하급언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1천년 전에 자기정체성을 잃고 국어를 중국어의 하위 언어로 전락시켜 우리문화와 민족의 자주성을 송두리째 짓뭉개버렸던 신라의 지식인이 21세기를 앞두고 환생한 것이 아닌지 착각하게 한다.
2)<열린 민족주의를 찾아서.> 복거일[조선일보 98년7월7일]
‘한국은 민족주의 과잉, 영어 공용어는 현실’
이 글은 졸저 <국제어시대의민족어>를 비판한 남영신씨의 '세계화 위해 민족 버리자고?'에 답하는 글이다. 남씨의 글을 읽으니, '민족주의와 민족어는 너무 예민한 주제들이어서 논의가 차분히 진행되기 어렵다는 사정'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민족주의와 민족어에 관한 내 생각은 지금 인류 사회들이 느슨하게나마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었다. 이제 이 세상에서 국경 안에서 끝나는 일은 드물다.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또는 환경문제 등. 이번 외환위기가 우리에게 아프게 일러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반영해서, 영어가 실질적 국제어로 자리 잡았다. 놀랍지 않게도, 이제 민족주의는 점점 현실에서 유리되고 비적응적으로 되어 간다. 특히 다른 민족들과 민족국가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함께 살기를 거부하는 '닫힌 민족주의'를 지닌 사람들은 둘레에 괴로움을 끼칠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해를 입힌다. 민족주의적 열정은 불이다. 그것을 잘 다스리면, 사회에 활력이 넘치지만, 잘못 다스리면, 많은 것들을 잃는다. 우리는 민족주의적 열정을 잘 다스려서 '열린 민족주의'로 다듬어내야 할 것이다. 남씨의 주장과는 달리, 나는 '민족주의를 버릴 때가 되었다'고 한 적이 없다. 그렇게 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민족주의에 대해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의 논지는, 민족주의를 추구함에 있어서, 우리가 이해득실을 냉정하게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몇 해 전 일본의 순시선이 독도 근해에 나 타났을 때, 우리 대통령이 군함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국내정치를 겨냥한 과잉대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외교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 우리가 외환위기를 맞자, 바로 그 대통령은 서둘러 경제부총리를 일본에 보내 원조를 요청했다. 그나마 돈도 빌리지 못했다. 나는 이런 공허한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것이다. 국제어와 민족어에 관한 내 주장을 '민족어를 버리고 영어를 모국어로 삼자'로 요약한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국제어로 자리 잡은 영어를 모국어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입는 손해가 이미 너무 크고 앞으로는 더욱 커질 터이므로, 경제논리는 사람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삼도록 만든다는 것이 내 주장의 바탕이다. 우리사회에서도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영어는 생존에 결정적인 기술이 되었고, 모두 영어를 배우는 데 큰 투자를 하고 있다. 아직 모국어도 배우지 못한 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내는 부모들부터 이어폰을 끼고 영어회화를 배우는 중년들에 이르기까지. 안타깝게도, 그런 투자는 효율이 아주 낮다. 그래서 나는 일단 영어를 우리말과 함께 공용어로 삼을 것을 제안한 것이다. 나는 독자들에게 물었다.
' 만일 막 태어난 당신의 자식에게 영어와 조선어 가운데 하나를 모국어로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어느 것을 권하겠는가? 한쪽엔 영어를 자연스럽게 써서 세상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고 일상과 직장에서 아무런 불이익을 보지 않고 영어로 구체화된 많은 문화적 유산들과 첨단 정보들을 쉽게 얻는 삶이 있다. 다른 쪽엔 조상들이 써온 조선어를 계속 쓰는 즐거움을 누리지만, 영어를 쓰는 것이 힘들어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고 평생 갖가지 불이익을 보고 분초를 다투는 정보들을 뒤늦게 오역이 많은 번역으로 얻어서, 그것도 이용 가능한 정보들의 몇 십만 분의 일이나 몇 백만 분의 일만 얻어서, 세상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 삶이 있다. 당신은 과연 어떤 삶을 자식에게 권하겠는가? 아예 그에게서 선택권을 앗겠는가?'
3<선택하라면 국어다>이윤기 조선일보 98년07/12
-셰익스피어를 잃지 않고도 세르반테스를 얻는 방법'.
두 꼭지의 뜻있는 글을 최근 읽었다. 어느 일간지가 번역, 게재한 미국 듀크대학 교수이자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미국은 2중 언어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와 도정일 교수가 잡지에 쓴 글 '아이자이어 버얼린의 선택'이란 글이다. 도르프만의 글 요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나는 영어로 자서전을 쓰고 스페인어로 희곡을 쓰는 혼성인간이다. 나처럼 언어의 양손잡이로 크는 것은 흔한 일일 수 없다…미국인들은 모든 나라들이 영어를 '당대의 언어'로 다투듯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왜 다른 나라 말을 배워야 하느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그건 단견이다. 언어교육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미국은 백년이 못 되어 멋진 다 언어 세계에서 단일 언어국가로 쳐질 것이다… (영어권 어린이가 스페인어를 배우면) 셰익스피어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르반테스를 얻게 될 것이다." 도정일 교수가 쓴 글의 요지는 이렇다. "유럽지성사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버얼린은 유태인이다. (그가) 친구에게 이런 테스트를 건 적이 있다. '알라딘 램프를 문지르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네…램프를 문질러 전 세계 유태인들을 한순간 스칸디나비아 인으로 만들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유태인은 역사의 기억, 오랜 고통, 유태인을 유태인이게 하는 모든 것들을 몽땅 잃겠지만 대신 행복한 백성이 될 수 있겠지. 문지를 텐가?'…그는 유태인이기를 포기한 일이 없다. 그가 선택한 것은 '문지르지 않는다.'였던 셈이다. 세계화주의자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인간의 가장 자연스런 감정, 그가 가진 인간적 가능성의 만개를 위한 조건, 그의 존재에 의미를 주고 그를 가장 편안하게 하며 그를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은 추상적인 세계성이 아니라 집, 고향, 동네, 친구들 같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국지성'이며 국지적 관계이다. 이 국지성은 세계성과 반드시 상치 대립하는 관계에 있지 않고 세계성 때문에 희생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성은 국지성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가능하다." 중학 1학년 때 나와 함께 미국으로 간 아들은 8년째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는 지난 겨울, 영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되었고, 영어라는 무기의 확보가 무한경쟁 시대의 유리한 고지 선점이 될 수 있는 만큼, 일찍이 영어 학습 환경을 만들어준 부모에게 무척 고마워한다고 말했다. 효율의 측면만 본다면 맞다. 아들은 도르프만의 길을 가고 있다. 하지만 딸은 버얼린의 길을 갈 모양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도미한 딸의 영어는, 한국어 발음습관의 잔재가 묻어있는 아들의 영어와는 달리 현지인 영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딸은 재작년, 입시 지옥을 알면서도 귀국을 고집했다. 딸은 너무 늦기 전에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공부하고 싶다고 했고, 하고 있다. 아들의 경우 어휘가 풍부하고 표현이 세련될 수는 있을지언정 현지인 발음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라는 뜻에서, 나는 영어 조기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찬동한다. 그러나 영어 조기교육이 민족어 교육에 지장이 될 정도로 강화되는 것에는 절대로 찬성하지 않는다. 영어가 판치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주장은 부정하지 않지만, 민족어 교육에 앞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나 민족어가 사멸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에는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복거일 씨의 전망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이고 그의 대안 제시가 얼마나 고뇌에 찬 것인지 나는 짐작한다. 어머니가 문둥이라고 할지라도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던, 유태인 아이자이어 버얼린 같은 조선인 김소운 선생이 그리워지곤 한다.
4 <영어 `내것화'가 관건이다>.정과리 [조선일보,98년07/13]
복거일 씨의 책 '국제어시대의 민족어'(문학과 지성사간)가 불씨가 되어, 남영신, 한영우, 이윤기 제씨가 잇달아 지핀 논쟁은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대립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아니다. 복거일 씨는 '영어를 모국어로 삼자'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지구제국'이라는 말을 단순히 강대국의 세계지배라는 뜻으로 사용하지도 않았다. 만일 비판자들이 그의 책을 꼼꼼히 읽었다면, 그 안에는 진단과 처방 사이에 미묘한 길항이 있으며, 진단은 세계 질서의 현재적 흐름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투명한 분석인 반면, 그 처방은 역설적이게도 뜨거운 민족주의적 열정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엄격히 보자면, 이 논쟁의 대립은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대립이 아니라 원리 민족주의와 실용적 민족주의의 대립이다. 그러나 이 대립이 이렇게 첨예하게 부각되는 것은 단순히 오해로 인한 것만은 아닌 듯 하다. 실로 이 둘 사이에는 도저히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빗장이 질러져 있으니, 그 빗장이란 '세계화'라는 세 음절 안에 집약되어 있다. 세계화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냉전 체제의 붕괴, 경제망의 확산,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자문명의 발달에 힘입어 세계가 점차로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원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계화는 민족국가의 운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지금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화는 전혀 별개의 또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자조적으로, 그러나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지금의 세계화는 곧 미국화와 동의어라는 것이 그것이다. 실로 현실사회주의 몰락이후 정치와 경제뿐만이 아니라, 학문 문화 기술 언어 등 삶의 모든 부문들이 미국의 영향력 안에 놓이고 미국적 방식으로 재편성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며, 바로 이것이 민족주의의 심장부를 치명적인 바늘처럼 파고들어 한 패권국에 의해 여타 민족국가들이 노예의 운명으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주입하는 것이다. 복거일 씨의 문제제기는 그러나 팍스 아메리카나의 수락이 아니다. 씨가 촉구하는 것은 세계화의 이중적 상황에서 한국인에게 요구되는 불가피한 생존조건에 대한 성찰 일뿐이다. 복거일 씨는 원리 민족주의자에게 바늘이 되었던 것을 내시경으로 바꾸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시경으로 비추어 볼 때, 세계화는 역전될 수 없는 추세이고, 그것의 기본 도구들을 미국이 선점했으며, 그러나 그 도구들을 기민하게 받아들여 우리의 자산으로 제것화한다면 세계체제내의 능동적 참여자로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는 것이 복거일 씨 주장의 요체이다. 그 주장의 실천적 항목의 하나로 복거일 씨가 들고 나온 것이 세상을 들끓게 하고 있는 영어 공용화론이다. 우선, 이것이 영어의 모국어화와는 다른 착상임을 지적하기로 하자. 다음, 영어가 사실상의 국제어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을 다음 세대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노력을 하는 것은 앞 세대 한국인들의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토론은 그 의무를 전제하고서 진행되어야 한다. 영어가 국제어가 된 오늘의 언어 환경은 단순히 영어권 국가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가 인류전체의 자산이 될 가능성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문제는 타인의 도구를 활용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유산을 거기에 새겨 넣어 실질적인 제것화를 달성하느냐이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한글과 영어의 공존의 방식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영어에 대한 준비와 아울러 한글의 세련화를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이중적 과제로 떠맡아야만 한다.
5 <국어를 박물관 언어로 만들자니> 박광민 98.07.15
복거일 씨의 '국제어시대의 민족어'를 비판한 남영신 씨 글과 이에 답한 복거일 씨 글을 읽었다. 결론적 느낌부터 말한다면, '영어를 사용하는 강대국도 드러내 놓고는 입에 담지 않을, 황당한 영어 공용어화 주장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복거일 씨는 '지금 인류사회들이 느슨하게나마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었다'고 했는데 복거일 씨가 말한 '하나의 제국'은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화만 지선이 되는 조지 오웰의 'Big brother'가 지배하는 일국체제인가. 복 씨는 또 '민족주의는 점점 현실에서 유리되고 비적응적으로 되어 간다'고 했는데 우리가 민족주의를 버리면 서구인도 유색인종에 대한 우월감이나 민족주의를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영어는 분명 국제적공용어요, 영어를 공부해 국제사회에 일원이 되는 것을 나무랄 일도 아니다. 현재 세계의 언어별 사용 인구는 영어권 4억9천7백만, 스페인어권 4억9백만, 프랑스어권 1억2천7백만, 독일어권 1억2천6백만, 포르투갈어권 1억8천7백만(THE WORLD ALMANAC 1998) 정도이고, 한자(한자) 사용권은 중국을 포함 17억 정도라고 한다. 복거일씨가 자존심 강한 프랑스나 독일,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는 스페인어권을 젖혀두고 무슨 근거로 '영어의 공용어화'가 대세라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대세가 기울면 옳은 일이든 옳지 않은 일이든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가. 대한민국 어린이에게 영어를 잘 가르치는 방법이 하나 있다. 복 씨 말대로, '열린 민족주의'라는 교언으로 국민을 속이고 민족 언어를 복거일 씨가 조어해낸 '박물관언어'로 팔아먹은 후 영어를 사용하는 강대국의 '한주'가 되는 것이다. 일제(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조상들이 독립 운동을할수 있었던 것은 우리언어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고 국어가 '박물관언어'로 남은 후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강대국은 힘 하나들이지 않고 대한민국을 자치주정도로 병탄할 수도 있을 게다. 필자는 복거일 씨의, "당신은 과연 어떤 삶을 자식에게 권하겠는가? 아예 그에게서 선택권을 앗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졸고를 끝맺이하고자 한다. "국어를 지키는 것이 조금 불편하고 손해 보는 일이라도 옳은 길을 갈 것이며, 그런 연후에 영어든 프랑스어든 스페인어든 자유롭게 배울 것이며, 복거일씨의 영어공용어화론이나 국어의 박물관 언어화라는 패역스런 논리에는 귀 기울이지 말라. (박광민- 한국어문교육연구회연구위원. 국어문교육연구회연구위원)
6<탈 민족주의에는 찬성> 박이문 1998.07.17
- 영어 공용어는 시기상조
지난 반세기 민족주의는 아무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터부에 정면으로 도전한 복거일의 용기는 대담하다. 한 사람의 언어는 곧 그 사람과 구별될 수 없으며, 한민족의 언어는 그 민족어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럼에도 영어 공용어화를 계획해야 한다는 그의 논지는 혁신적이며 이를 전개하는 방식은 통쾌하다. 세계화는 가속화하고 있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이다. 세계화는 다양한 문명권들이 '세계제국'으로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인류 문명권으로의 통합과정이며 세계 제국은 서구 특히 미국을 축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싫건 좋건 참여하지 않고서는 어떤 민족이나 국가도 고립화, 주변화, 퇴화, 그리고 화석화를 면할 수 없다. 세계화에의 참여는 국내적 혹은 지역적 경계를 넘어서 국제적 차원에서의 밀접하고 신속한 정보 교환을 전제로 하며, 이러한 정보 유통은 모든 민족과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언어 즉, 국제어를 필요로 한다. 싫건 좋건, 부당하건 정당하건 상관없이 앞으로 몇 세대 아니 몇 세기 더 전개 될 인류공통 '모국어'가 영어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는 누구에게나 필수적인 생존 조건의 하나이며, 영어의 능숙도는 세계화 속에서의 번영과 쇠퇴 정도를 상대적으로 가늠하는 필수 조건의 하나이다. 세계사의 흐름, 그리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 한국의 위상에 대한 냉철한 인식, 새로운 인류문명을 창조하는 '세계제국'에의 적극적 참여, 그리고 그러한 참여를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서의 영어 문제 등에 대해 우리는 가정적으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혁명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우리를 감정의 게토 속에 가두어 놓아 객관적 현실을 왜곡시키고, 새로운 인류 문명에 세계인으로서, 인간으로서의 동참의 길목들을 막아놓고 있다는 것이다. 복거일의 폐쇄적 민족주의 비판은 민족주의가 산을 못 보게 하는 나무와 같다는 데 있다. 그의 민족주의 비판은 투명하고 옳다. 그러나 세계화의 구체적 그리고 기본적 방법을 위한 영어 공용어론이 한국어보다는 영어를 더 기본적 의사소통 매체로 삼자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의 영어공용어론은 그의 민족주의 비판만큼은 설득력이 없다. 중세 유럽지식인들이 학문과 문명화를 위해 지방어를 버리고 '라틴어'를 공용어로 택한 것은 현명한 일이며 또한 그들은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 사정은 그와 똑같지 않다. 설사 공용어화가 바람직하다 해도 그것은 몇 세기 후 영어가 널리 자연적으로 보급된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더구나 그러한 공용어화가 가능하더라도 7천만이 반만년 동안 물려온 정신적 유산을 담은 민족어를 생판 외국어로 대치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인가는 심각히 더 논의될 문제이다. 저자가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언어는 도구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복거일은 우리 주위에서 보기 드물게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의 영어 공용론의 합리성은 의심스럽다.
7<영어 능동적 도입해야> 함재봉 조선일보 98 07/19
배타적 민족주의는 열등의식의 발로이다. 만일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이 올바른 것, 즉 보편 타당한 것이라면 꼭 지켜야한다. 그러나 아무리 '내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보편타당한 것이라는 자신이 없으면 과감히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문화교류에 있어서도 궁극적인 기준은 객관적인 옳고 그름일 수 밖에 없다. 물론 국제사회에서의 보편성이란 곧 '강자의 것'이라는 냉소적인 주장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강대국이나 할 수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약소민족 국가가 생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편적인 가치와 원칙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뿐이다. 실제로 한민족은 이러한 원칙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생존과 번영을 기약해왔다. 우리는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보편적인 사상과 철학,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삼국 시대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는 불교를, 조선조에서는 유교를, 근세에 들어와서는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가장 보편적이고 수준 높은 문명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사상과 제도는 특정 민족과 사회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토착화 과정을 거치면서 굴절되고 재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외래문명과 문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문화를 살찌웠다는 역설 아닌 역설이 성립된다. 불교와 유교는 '외래' 문명이지만 우리 특유의 모습으로 일구어왔다. 팔만대장경과 조선 왕조 실록은 모두 한문, 즉 중국글자로 되어 있지만 지극히 한국적인 보물들이다. 그러면서도 한문이라는 국제어로 쓰여 졌기에 보편성도 확보하고 있다. 민족문화는 결코 불변의 고정태가 아니다. 늘 바뀌고 변화하고 진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얘기는 결코 무국적의 보편주의자나 자유주의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역시 '우리의 문화', '우리 민족'의 번영과 미래를 기약해 보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얘기들이다. 복거일 씨의 말대로 '사람은 누구나 민족주의자'이다.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어떻게 우리에게 맞게 수용하는가이다. 복거일 씨는 영어를 국어와 함께 공용어로 채택하는 것이 새로운 사상과 체제를 보다 빠르고 올바르게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민족주의를 보다 잘 하기 위해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역설이 있고 동시에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던지는 철학적, 사상적 도전이 있다. 그렇다면 영어를 국어와 함께 우리의 공용어로 채택하는 것이 올바른 길인가? 그것이 진정한 민족의 번영을 보장하는 방법이라면 충분히 고려될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과거에 한자를 도입하였듯이 영어를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도 입한다면 그 결과 생겨나는 새로운 문화의 변형은 역시 한국의 것일 수밖에 없다. 한국어와 한글, 한자와의 지속적이고 균형 잡힌 사용과 발전을 전제로 한 영어의 도입은 한국인의 인식의 지평을 다시 한번 세계적인 차원으로 넓혀주는 기폭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어로 표현된 한국 문화는 그만큼 보편화될 수 있다. 우리의 찬란한 문화와 전통, 고유의 사상과 미풍양속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은 현실적으로 볼 때 영어라는 국제어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영어 공용어 채택여부는 철저하게 민족과 국가의 실익 차원에서 따져야 할 문제이지 반민족주의적인 발상으로 매도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연세대 정치 외교학과 교수>
8 <영어공용화론 서구 패권주의 연장>……최원식 1998.07.20
솔직히 말해서 복거일 씨의 영어 공용어론에 대해 이처럼 여러 사람이 나서서 토론을 벌일 필요가 있는 것인지 약간의 회의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반대론 못지않게 찬성론도 만만치 않은 세를 얻어 가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격세지감이 없지 않다. 그 동안 물 밑에서 은밀히 떠돌던 것이 특히 IMF사태를계기로 복거일 씨를 대변인으로 삼아 수면 위로 부상했다고 보아도 좋다. 그는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고 과감히 제안한다. 물론 일정기간 영어와 '조선어'를 함께 공용어로 삼자고는 하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감안한 제스처일 뿐이다. 영어가 국제어로서 지구촌을 석권하는 과정에서 '조선어'를 비롯한 각 민족어들의 운명이 사멸의 길을 걸으리라는 그의 관측에 의하건대, '조선어'의 자연 폐기는 시간문제로 된다. 이 제안에는 국제조류에 둔감한 채 IMF사태를 초래한 김영삼 정부의 무능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함축되어 있다. 또한 박정희 시대 이후 강력한 정치적 동원력을 행사해 온 우리 사회의 '닫힌' 민족주의를 제어하고자 하는 제안자의 원망이 내장되어 있기도 하다. 사실 한 나라의 언어만큼 그 문화의 완강한 독자성, 또는 침투 불가능성을 표상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영어 공용어론은 한국 민족주의를 해체하고자 하는 그에게 일종의 전략적 요충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여튼 IMF사태 이후 우리 사회를 규율해 온 발전모델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그의 제안에 일리가 없지 않다. 어떤 점에서는 우국적 충정도 얼비치고 있어서 이 제안을 간단히 왕년의 친일파 다루듯 봉쇄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나는 그의 제안을 검토하면서 일본의 메이지(명치) 초기 녹명관(1883년 개관) 시대를 연상했다. 일본의 서구추종이 절정에 달한 이 시기에서 구인과의 결혼을 통한 인종 개량론과 함께 나타난 것이 가나(가명)를 폐기하고 알파벳을 채택하자는 운동이다. 그런데 이후 일본사회는 녹명관 시대를 한 때의 철부지 에피소드로 돌리고 서구주의로부터 국수주의로 급회전한다. 나는 복거일 씨의 제안이 오히려 '닫힌' 민족주의 또는 국수주의의 부활을 가져올까 우려한다. 기실 서구주의와 국수주의는 단순한 대립물이 아니라 일종의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서양을 모방하여 서양을 따라잡겠다는 서구주의의 뒤집어진 형태가 국수주의니, 그것은 서양패권주의의 전화라고 할 수도 있다. 그의 영어론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규율해왔던, 민족주의적 동력에 근거한 국가주의를 해체하고 서구, 특히 미국의 시장주의를 한국에 이식하고자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시장주의는 국가주의만큼 독재적, 독점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장에 대한 한국사회의 일방적 적응만을 강조하는 그의 서구주의는 민족주의의 매우 특이한 변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국가의 우상과 시장의 우상을 함께 넘어서는 새로운 모델의 탐색이다. 아마도 그것은 영어보다는, 김수영이 노래하고 있듯이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 이라도 좋다"의 그 전통, 즉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에서 솟아오를 것이다.
첫댓글 아예 영어를 배우지 말아요ㅋㅋㅋㅋ
'소탐대실' 이라고..... 영어 공용화 문제랑 똑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