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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에 이어서 전합니다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긍휼(헬, 엘레에몬)은 자비로운, 동정을 베푸는, 불쌍히 여기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자비”로 번역을 했습니다. 영어성경은 대부분 “the merciful”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국어 사전에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엽게 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성경적인 긍휼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서 나오는 용서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동정을 베푸는 마음이요,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사야 54: 7]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 그래서 긍휼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가장 큰 긍휼은 죄인된 우리들을 일체 오래 참으심으로 용서하여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딤전 1:15-16).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에서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하면서,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의 괴수인 자신이 하나님의 큰 긍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전부 탕감받은 긍휼인 것입니다 (마 18:21-35)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입니다.
우리들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어지는 긍휼이 필요합니다. 구원은 내 힘으로 안됩니다.
그러므로 죄인된 우리들은 반드시 긍휼을 입어야 사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 이런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 위해서는 나도 남에게 긍휼을 베풀라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큰 죄인이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너희도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 야고보서 2장에서도 남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면 긍휼없는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 오늘 말씀도 긍휼이 있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 긍휼이 없는 자의 특징이 무엇일가요?
사랑과 자비가 없습니다. 무정하고 용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잔인합니다.
저는 이제는 살아있는 물고기고 못 죽입니다. 생명이 그렇게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모기는 사정없이 잡습니다.
말세에 이런 긍휼이 없는 시대가 다가올 것입니다.
→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는데 사람들이 무정하며, 사나워진다고 했으며, 로마서에서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자로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3]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로마서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무정하고, 자비가 없으면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긍휼은 자비,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누가복음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자비가 없으면 긍휼을 베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에 대해서도 관용이 없는 시대에 우리들이 먼저 자비로운 마음으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긍휼을 입을 것입니다.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청결(헬, 카다로스)은 깨끗한, 순결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깨끗한”로 번역을 했습니다. 영어성경은 대부분 “the pure”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순수함과 가까운 단어입니다.
몸도 자신의 환경도 위생적으로 청결해야 합니다. 사탄에 잡혀 있는 자의 주변은 항상 더럽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음(헬, 카르디아, heart)이 청결한 자입니다. 이 마음(헬, 레브)은 우리들의 속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아의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이 중심이 깨끗하고 순수할 때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 그러면 먼저, 청결한 마음, 순수한 마음, 깨끗한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보는 순결한 마음이요, 정함이 있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 마음이 가난한 것은 자신의 부족함으로 하나님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마음이지만, 청결한 마음은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지 않는 마음입니다. 다윗처럼 마음이 하나님께로 확정되고 확정된 마음입니다.
[시편 57: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그러므로 혼잡하지 않는 마음, 하나님을 이해관계로 대하지 않는 마음, 오직 사랑으로 바라보는 마음, 하나님을 향한 정결한 처녀와 같은 마음입니다.
영적으로 다른 남편을 두지 않는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이런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세상 것들에 우리 마음들이, 눈이 빼앗겨 있기 때문입니다.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과 같이 비둘기와 같은 눈처럼 오직 주님 만을 바라보는 눈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마음을 빼앗고 놀라게 할 수 있는 눈이 되는 것입니다.
[아가 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아가 4: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우리들이 주님 앞에서 정결한 처녀가 되어야 하는데, 때로는 다른 것들이 마음이 빼앗긴 음녀처럼 되고 있습니다.
음녀의 화려함에, 사치스러움에, 세속적인 것에 마음이 빼앗겨 가증한 음행의 물건으로 말미암아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정함이 없고 두 마음을 품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이해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부자되기 위해서, 건강하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교회에 가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땅의 무엇을 바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관계 속에서 자기가 생각한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버리고 맙니다. 순결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 가족이 죽을 병이 걸려 살리기 위해 기도원에 가고 철야도 하고 새벽기도로 했지만 정작 죽고 나면 그의 삶은 완전히 예전대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 본다(헬, 호라오)는 것은 보다, 깨닫다, 의식하다, 알다, 경험하다 등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원래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출애굽기 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죄인의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가지고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죄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열거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고린도전서 6: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죄들이 예수님의 피로 해결되어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먼지와 같고, 열방도 한방울의 물과 같은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축복된 일입니까?.
[시편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사야 40: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이런 존재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다.
▶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한 가지 유일한 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청결해지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반석 틈에서 보았습니다.
[출애굽기 33:21]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반석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도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고백할 때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이 이 땅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같이 눈앞에 있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죽이고 핍박한 것입니다.
마음의 청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청결한 자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세에 주님 오실 때에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주님의 신부가 된 자들이 재림의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순결한 신부의 마음이 청결한 마음인 것입니다.
▶ 많은 사람들은 주님도 필요하고 세상의 다른 주님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혼잡하여 주님을 못 만나고 못 보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예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주님의 보좌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볼 날도 있을 것입니다.
▶ 마음이 청결하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피로 씻겨져야 합니다.
그 이후에 오직 나의 주님이신 예수님 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죄를 씻는 것이 우선입니다. 죄가 가득한데 순결하다, 청결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죄를 씻고 오직 주님 만을 바라 볼 때에 그는 성령을 받고 청결한 사람으로 주님을 볼 것입니다.
그러면 영의 눈이 열릴 것입니다. 영의 눈이 밝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빛 안에서 하나님을 볼것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볼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태복음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마음이 청결하여 주님을 보는 은혜가 부어지시길 기도합니다.
7)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화평(헬, 에피레노포이오스)은 “평화”라는 단어 (에이레네)와 “행하다”라는 단어(포이에오)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행하는 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적인 단어입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화평, 평화로 번역을 했습니다. 영어성경은 대부분 “the peacemaker”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툼을 일으키는 the troublemaker와는 반대 개념인 것입니다.
▶ 성경적인 가장 큰 화평은 원수된 우리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죄인으로서 믿기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입니다.
[에베소서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화평을 이루지 못하면 사람과의 화평도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면 이웃과의 화평도 자연히 이룰 수가 있습니다. 화평은 하나됨을 이루게 합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의 관계는 율법적으로는 도저히 하나됨을 이룰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없는 화평은 진정한 화평이 아닙니다.
▶ 화평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 5:22)
성령의 열매는 모두 예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을 때 주어지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화평을 이룰수 있지만, 성경적인 화평을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과 먼저 화평을 이루고 그러면 모든 자들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 화평의 반대개념은 다툼, 분쟁, 갈등, 미움일 것입니다.
화평의 배후에는 성령님이 계신 것처럼, 다툼과 분쟁, 미움 배후에는 사탄 마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사탄이 가져다 주는 열매입니다 (잠언 10:12)
싸움과 전쟁을 좋아하는 자는 결코 화평하게 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마귀의 종인 것입니다.
→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화평한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는 곳에 다툼이 일어나는지? 화평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사탄의 아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경험한 자는 다른 사람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싸울 일이 있어도 피하거나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도록 부드러운 말을 하게 됩니다.
가족 간의 화평도 이루시고, 이웃 간의 화평도 이루시고, 국가 간의 화평도 이루시기 바랍니다.
→ 그러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화평은 하나님의 아들됨의 열매이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면 화평해야 합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화평하지 못하면 참 아들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아들의 칭호는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영광스러운 칭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는 것은 가장 큰 변화입니다.
일컬음(헬, 칼레오)은 부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러주겠다는 것입니다. 화평하지 못하고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겨도 하나님 인정하지 않으면 아들이 아닌 것입니다.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10)
이번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아니라, 여기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을 받는 자입니다.
박해(헬, 디오코)는 도망하다라는 “디오”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도망가야 할 정도로 박해를 받는 상황의 단어인 것입니다.
의인들이 받는 복이 “천국”임을 고려할 때, 박해를 받는 그들은 마치 지옥과 같은 상황이라는 것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6절에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의는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11절을 보면 그래서 “나로 말미암아” 욕먹고 박해를 당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의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의인 것입니다.
→ 그런 삶을 살 때에 따르는 박해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기 저기서 예수님을 믿을 때, 따를 때 다가오는 박해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최고 수준의 박해는 순교일 것입니다.
▶ 바울이 받은 박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영, lashes, 후려치는 것, 신 25:3), 세 번의 태장 (헬, 랍디조, 몽둥이로 맞는 형벌, 곤장), 한번 돌에 맞고(행 14:19,루스드라),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자지 못함, 굶주림, 춥고 헐벗는 등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고후 11:16-27) 결국 그도 순교를 당했습니다. 의를 위하여 살면서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사람들로부터 욕도 먹고, 박해받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듣게 되는 등의 박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은 죽임을 당하는 등 많은 박해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 예수님과 똑 같은 삶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 로마제국 시대에 로마황제들의 박해를 피해 카다콤에 숨어서 한 평생을 보낸 자들도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의가 되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의를 위한 핍박인 것입니다.
수많은 나라에서 복음이 들어갈 때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열두 제자들이 흩어져 대부분 순교를 당했습니다. 나다나엘과 같은 경우 인도에서 산체로 몸의 껍질이 벗기면서 죽였고, 열심당원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거꾸로 매달린 상태로 톱으로 몸을 짤리면서 순교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교의 피가 뿌려진 곳에 복음의 꽃이 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확장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순교자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이들 무리 속에 들어가는 것이 영광일 것입니다.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그들에게 천국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상 (헬, 미스도스) 크다는 것입니다. 큰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를 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위하여 박해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나요?
최소한 주님을 위하여 죽음까지는 가지 않아도, 주를 위하여 감옥에 갇히고, 욕을 먹고, 때로는 얻어 맞을 핍박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를 때에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이 각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오늘날 이런 박해가 너무 없어서 안일해지고 있습니다. 안일한 자는 망합니다 (잠 1;32, 사 32:9,11, 슥 1:15)
영적 야성미가 사라졌습니다. 영적 전사와 같은 자가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 우리들은 술람미 여인과 같이 군인과 같은 신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가 6:10]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박해를 통하여 성장했습니다.
중국의 기독교는 지금도 박해를 받지만, 1935년도에 6300교회 48만명 신자였는데, 지금은 1억명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박해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자가 엄청납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들은 정말 안일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너무 편하게 믿음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선교지를 한번 가 보세요. 그러면 눈이 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