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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희망의 땅에 피어난 들꽃
김 형, 연전에 말씀드렸던 정춘근 시인을 만나고 왔습니다. 늘 한번 보고 싶었던 터라 한편 설레기도 했고 철원의 독특한 풍광을 다시 느껴 보고도 싶었습니다.
터미널에 마중 나온 시인은 첫 시집에 나온 자신만만한 삼십대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윗머리가 듬성듬성한 꽉 찬 중년, 어느새 우리 또래가 그런 나이가 되었더군요.
처자식 걱정, 집안 걱정, 살아갈 세상 걱정, 앞뒤 양옆으로 꽉 껴서 막막하고 아득하지요.
하여간 정 시인의 모습에서 초로에 들어서는 우리들, 주변과 세상을 어떻게든 떠메고 가야만 하는 쓸쓸한 또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그는 흔히 볼 수 있는 섬약한 예술가라기보다 지방 소읍의 농사도 같이 짓는 자영업자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정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00년 무렵 창비 사이트에 누가 소개한 글을 보고서였습니다. 90년대 들어 동구권이 무너졌네 하면서 시들이 맥이 빠지더니 아예 현실을 받아내지 못하는 반신불수가 되어가는 양을 얼마나 가슴 치며 답답해했습니까.
IMF라는 난생처음 겪는 엄혹한 시절에도 현실은 자지러지는데 문학은 애먼 데서 놀더란 말입니다. 동구권이 무너진 것과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분단 상황이 변했습니까. 외국군대가 철수했습니까. 재벌이 해체되었습니까. 기득권에 집중되는 권력이 분산되었습니까. 과거사 하나 제대로 해결 된 게 있습니까.
여전히 서민들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는데 절차 민주주의 하나 획득해 놓고 모든 것을 이룬 듯이 나자빠져 버린 게 그제나 이제나 별반 달라 진 게 없는 우리의 모습이지요.
그러던 중 그를 발견하고는 그의 첫 시집 ‘지뢰꽃’ 한권 사들고 단숨에 읽어치웠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제 딛고 선 곳을 보는 사람, 먼 데가 아니라 살아온 땅과 거기서 살아가는 자신과 이웃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아파하면서 자신의 언어로 담담히 말하는 사람.
시가 별거겠습니까. 참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그와 그의 후배 차에 동승하여 그가 안내하는 막국수 집으로 갔습니다.
시인이 시켜주는 막국수 맛은 조미료가 느껴지지 않아 좀 텁텁했습니다. 산업화되기 이전 고향에서나 맛볼 수 있었던 그런 맛이라고나 할까요.
도회지의 막국수와 다른 철원만의 느낌을 주고 싶은 배려인 듯도 하였는데 시인은 패스트푸드로 대표되는 미국문화에 찌들어 입맛마저 변해가는 세태를 무척 안타까워하더군요.
그렇지요. 기껏 300년밖에 안된 저열한 뜨내기 문화에 사로잡혀 넋이 나간 우리가 기막힐 뿐이지요. 그들의 문화 바탕에는 공존 상생이라는 개념을 찾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문학판 이야기, 그의 두 번째 시집 이야기, 출판사가 없어져 버렸다는 ‘지뢰꽃’의 복간을 물었더니 빙긋이 웃으며 ‘누가 읽겠어요’ 그럽니다.
그러면서 3판이나 찍었는데 다나갔더라고 인천 쪽 노동자 문학회에 합평 교재로도 쓰였다는 소문도 들리고. 그냥 묻히기엔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대로 관심을 가졌던가봅니다.
민영 선생과의 인연 또한 오 년간 작품을 보내드렸는데 한 번도 좋은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답니다. 그런 후로는 평생에 유일한 제자라 그러신다구요. 하여간 선생 특유의 깐깐한 시 읽기에 고향에 대한 사랑이 얹혀 져 꽤나 시달렸던 모양입니다.
선생은 그의 첫 시집 발문에 ‘질경이’란 시를 올려놓으셨더군요.
허리가 늘어질 정도로 밟혀야 봄이 온다고 했다
땡볕에 등짝을 태운 뒤에야 여름이 온다고 했다
뼈마디가 짓이겨져야 가을이 온다고 했다
등골이 다 빠져나가야 겨울이 온다고 했다
짓밟힌 자리에 다시 씨를 심는 것을 희망이라 했다
힘없는 이 천만근 발걸음을 느껴야 사는 것이라 했다
농부인 아버지는
「질경이」전문 - ‘지뢰꽃’에서
끄트머리에 ‘부디 부지런하고 용감하고 지혜로워라’ 그렇게 맺으신걸 보면 수련의 정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밥을 먹고 시인이 이끄는 대로 승일교로 갔습니다. 해방 후 소련식으로 만들다 중단된 것을 전쟁이 끝나고 미국식으로 완성하였답니다. 그래서 이름도 이승만과 김일성 이름자를 따서 승일교인데 과연 아치의 북쪽은 칸이 넓고 남쪽은 칸이 촘촘하여 두 방식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어느 외국인은 좌우가 함께 만든 다리로 동구권이 무너진 후 세계유일의 문화재라 하였답니다.
시인과 강을 바라보며 철원의 독특한 지형에 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위에서 바라보면 어디에 강이 흐르는지 알 수 없는 화산지대라 용암이 흐르면서 생긴 협곡을 따라 강이 생겼는데 이곳에 댐을 만든답니다.
하류야 어떤지 몰라도 가뜩이나 큰물이 오면 넘치는데 철원은 생존이 걸린 문제라서 철원 댐 반대대책위원회를 꾸려 시인이 대변인을 맡았다 합니다. 화산맞뚜레(동굴)가 많아 댐을 쌓아도 별 효과가 없을 거랍니다.
시인은 다른 얘기를 하나 합디다. 김 형, 우리가 알기로 휴화산은 백두산과 한라산 두 군데라 배웠습니다만 철원도 휴화산이랍니다. 댐 반대 일을 하면서 이 기록 저 기록 뒤지다 보니 ‘세종실록지리지’에 가스 분출기록이 보이더라네요.
철책선 부근 오리산에 작은 분화구가 있답니다. 분화구는 부대가 주둔하여 메워져 버렸는데 그곳에서의 분출기록이래요.
요즘도 일 년에 한 두 차례는 지진이 난답니다. 멕시코에서는 멀쩡한 산도 폭발하여 수 만 명이 죽었다는데 따져봐야 될 문제입니다.
철원은 우리 사회가 잊어가는 심각한 문제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 끊임없이 우리를 일깨우고 있는 곳 중 하나입니다. 전쟁이 격화되어 엎치락덮치락 하면서 도시하나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 또한 태반이 죽거나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거의 외지에서 흘러와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랍니다.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
부모들이 팔아 넘긴 처녀들이
땡볕 먼지를 뒤집어 쓴
낡은 트럭을 타고 찾아오면
난리 통에 장가 못간 노총각들 홀아비들
고물 팔아 품 팔아 꼬깃꼬깃 모은 돈으로
여자들을 샀네
물 한바가지 떠놓지 못하고
초야를 치르고 살았네
팔려온 억장 가슴 서러워
흰 수건 질끈 동여매고
삽날이 보이지 않는 저녁까지
호미 날을 더듬어 찾는 새벽녘에도
이슬을 장딴지 적시며 들에 나가 일을 했네
손가락 발가락이 뭉툭해지도록
논두렁 밭고랑에서 평생을 살았어도
집 있고 땅 있어 후회 없이 행복했네
「팔려온 여자들-수복지구」전문 - ‘지뢰꽃’에서
시인에게 토착 문화에 대해 물은 멍청함에 그는 남도 문화에 대한 부러움을 말하더군요.
한때 한 나라의 서울이었던 곳, 금강산과 원산을 거쳐 함경도, 연해주로 가는 길목이라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으며 자연스레 물산이 모여들어 넘쳐난 곳, 한양성에 버금간다는 궁예성지가 비무장지대에 걸쳐있어 철원평야의 생산력과 함께 그 영화를 짐작 할 수 있는 곳이 단하나 모심기 놀이 비슷한 것이 남았답니다. 우리는 이제 유명한 노동당사로 이동합니다.
색깔 아르레기는 없는가 당신은
붉은색만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입안 가득 고여 드는 경계심
나는 세뇌된 파브르의 강아지인가
붉은 천 조각에 무작정 달려드는
투우장 황소인가
온 세상이 붉어지는
가을은 불안하다
새빨간 단풍나무 그늘을 지나가는
군인들 배후가 의심스러운 나는
초등학교 시절 경전처럼 외웠던
붉은 번호를 떠올리며
핸드폰 배터리를 확인한다
파란색의 하늘이
이유도 없이 안심 된다
색깔로부터 자유로운가 우리는
파란색에 집착하는 자폐 증상으로
빨간색을 볼 수 없는 색맹 아닌가
단지 바람에 단풍잎 떨어진 것뿐인데도
지독한 최면에 걸린 것처럼
붉은 별을 달고 쓰러지는
추레한 병정들 모습이 떠올라
박수를 치고 싶은 내 몸에
붉은 소름이 돋는다
「단풍」전문 - ‘수류탄 고기잡이’에서
분단은 이제 우리들 내면 깊숙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 알게 모르게 사사건건 간섭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데는, 생산하여 부를 이루고자하는 욕망과 나누어 더불어 살고자하는 지혜가 늘 함께하여 왔지요. 왜냐하면 어느 생명집단이나 번성하고자하는 본능이 우선하는 자연현상일 테니까요.
분단의 가장 큰 폐해는 남과 북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뉘어 극단화 되었다는 것, 두 사회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용인치 않아 결국 안으로 허약해져서 겨레의 잠재적 역량을 심각하게 갉아먹는 것을 넘어 생존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온 것은 아닐까요.
보다 직설로 말하면 남쪽 사회는 일인당 소득 2만 불이다 어떻다 떠들지만 신용불량자 800만에 사회구성원 태반이 빈민화하여 겉보기만 번드름한 속빈 강정이 되어가고 있잖습니까. 사회주의 정책이 절실한데도 눈 하나 깜작 않는 야비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북은 어떨까요. 그 사회에서 과연 정주영 같은 사람이 꿈을 펼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빨갱이라면 그랬듯이 반동이라 불에 덴 듯 펄쩍 뛰었겠지요. 욕망이 거세된 그들의 생산력은 동구권이 무너진 것과 미국의 훼방을 감안해도 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유럽사회가 왜 이리 부러운지요. 무지개처럼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여 제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사회는 얼마나 건강할까요. 국력은 그런데서 나오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이 숨 막히는 상황이 60년이 넘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형상화 합니다.
한반도는 지금 몇 시인가
남한의 모든 총과 대포는
12시 방향에 맞추어져 있고
북한은 6시로 고정되어 있다
남한의 시계 바늘이
6시로 가기 위해서는
3시 방향에 미국을 지나야 하고
북한 시계 바늘도
9시 방향 중국을 지나야 하는
가장 멀고 아득한
12시와 6시 사이
다시 생각하면
우리 분단의 시차는
한나절 6시간
그 짧은 시간 사이로
정지된 시계를 수갑처럼 찬
두 세대가 지나갔다
「6時와 12時 사이」전문 - ‘수류탄 고기잡이’에서
이 질곡은 해방 되면서 그어진 38선에서부터 비롯되었겠지만 분단이 광증으로 돌변한 것은 6.25전쟁 이후겠지요.
조선과 일제를 거치면서 내재한 민족 내부의 모순들이 동서 이념의 대리전으로 터져 나와 씻을 수 없는 생채기를 남겼습니다, 시인은 전 세계 어디에 이렇게 멍청한 경우가 있더냐고, 우리는 오지의 미개한 종족보다 더 무지한 겨레붙이들 아니냐고 통탄하더군요.
아무리 전쟁 상황이었다지만 왜 그리 서로 잡아 죽였을까요. 외세야 우리를 노랗게 생긴 원숭이쯤으로 봤겠지만.
빨간 모자를 벗어라 관광객들아
여기를 로마 유적쯤으로 생각하려거든
냉큼 떠나라
이곳은 원통하게 죽은 귀신들이 쉬는
유일한 사당이니
어떤 자리에 서서
찍는 사진이 폼이 날까
망설이는 구둣발 아래
누구 기억에도 인화되지 못한
귀신이 울고 있나니
셔터를 누르는 집게손가락에
그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던 총알에
죽은 귀신들이 몸서리치나니
구멍난 건물보고 경탄하는 눈
철새들 아우성이나 듣는 귀
한탄강 얼음물에 정갈히 씻고
망자의 마음으로 다시 와
밤에 뜨는 총총한 생별보다
더 많은 귀신들이 가슴에
총칼자국을 지우고 있는 신음 소릴
무릎 꿇고 같이 들어보자
「노동당사」전문 - ‘지뢰꽃’에서
노동당사 앞에 섰습니다.
철근을 쓰지 않은 러시아식 건물로 해방 후 집집마다 추렴하여 5년간 지었다고 합니다. 안내판을 보니, 당사 주위로 일제 이래 관공서들이 짜임새 있게 들어선 제법 큰 도시가 당사 빼곤 단 한군데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야산과 논밭이라 누가 거기가 도시였다는 것을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용케도 살아남은 건물을 보며 시인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박 형, 저게 타임캡슐인거 아십니까?”
이 냥반이 뭔 소리를 하나
“당사 지하에 저만한 공간이 있는데 전쟁 직후에 콘크리트로 메꿔버렸답니다.”
“아니 왜요?”
“좌우 혼재된 학살 유골이 켜켜히 쌓인 채로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기록에 남아있습니까?”
“웬걸요, 그런 걸 기록해둘 턱이 없지요. 어른들 구전입니다.”
“확실할까요?”
“분명 누군가가 공사를 했겠고, 유족들도 어딘가는 있겠지요.”
“아니, 이 민주화된 대명 천지에 유족들이 안 나설까요?”
“지역 특성상 워낙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수도 있겠고, 살아남았다 해도 누가 나서겠습니까? 뿔뿔이 흩어져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었을 텐데요.”
교과서에도 실리고 ?열린음악회?도 했던 친숙한 노동당사가 거대한 무덤이었다니요. 김 형, 전쟁 중 죽은 사람이 남북군인, 민간인, 외국군대까지 모두 합하여 600만 명이라고도 하고 500만 명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추정 불가능이라고도 합니다. 미군 폭격과 전쟁주력이 쓸고 간 자리에 남아난 게 없어서 호적이고 뭐고 일가가 떼죽음은 물론이요 마을이 없어져 버린 경우가 부지기수라 어디 근거가 남아 있지 않답니다.
말해 무엇 합니까. 북쪽은 *1950년 8월까지의 기간에 연 2만 500대의 B29가 폭격하였고 같은 해 10월 29일까지 연 5만대가 출격하여 북한 지역의 도시와 농촌 산간벽지에 있는 민가들까지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었답니다. (*‘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에서)
1000만인지 500만인지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겁니다.
어른들이 말하는, ‘비행기가 제일 무서웠다. 어른이고 애고 사람만보면 쫓아다니며 갈겨댔고 사람 모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쏘아대더라.’
전쟁 주력이 지나간 곳과 멀리 떨어진 제 고향이 이럴 정도면 다른 곳은 오죽했을까요. 치가 떨리는 것은 왜 서로 그리 잡아 죽였느냐는 것 입니다. 남이나 북이나 모르쇠로 발뺌들을 하지만 유골들이 한두 군데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민간인 학살은 전국에 산재한 채 그냥 묻혀 지금까지 덮여 있습니다. 분명 명령권자가 있었겠고 실행한 자가 엄연할 텐데 그런 일 없었던 듯이 자연사들을 하고 있는지, 그 자손들 또한 펄쩍 뛰겠지요만 일본 우익의 난징학살 부정과 무엇이 다릅니까.
김 형, 기록들을 볼까요. 학자들은 *한국(남북) 측 사상자 500만 가운데 학살된 민간인 총 수를 113만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쟁 초기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민간인 학살을 합의 공모하고 한국 전역에서 정치사상범, 보도연맹을 비롯한 예비검속자, 죄 없는 민간인을 후퇴 과정에서 학살합니다. (민간인 학살 총수 113만 명, 지역별 경남 25만 명, 경북21만 명, 전남 21만 명, 전북 19만 명, 제주 8만 명, 경기 6만 명, 충북 5만 명, 충남 3만 명, 강원 3만 명, 서울 2만 명, -2000년 1월 20일자 대구매일-)
좌익에 의한 학살 또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조선인민군은 후퇴 과정에서 남한 전역의 형무소와 경찰서에 수감 중인 군경가족, 친일파, 지주, 우익인사 등 12만 9천명을 학살합니다.(*‘조선 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에서)
위 기록은 미군과 국군이 북진하면서 저지른 북한 주민에 대한 학살과 김일성 정권이 만주로 퇴각하면서 자행한 북한 지역 우익인사 학살이 빠졌습니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어느 칼럼에 그럽디다.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됐다고요.
*죽이는 모든 방법이 동원된 한국전쟁
참으로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때려죽이는 타살(打殺), 구살(毆殺), 주먹으로 쳐 죽이는 박살(搏殺),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박살(撲殺), 격살(擊殺), 쏘아죽이는 사살(射殺), 총살(銃殺), 포살(砲殺), 칼로 찌르거나 베어 죽이는 자살(刺殺), 찢어죽이는 육살(戮殺), 육시(戮屍), 생매장해 죽이는 갱살(坑殺), 바퀴로 치어 죽이는 역살(轢殺), 단근질해 죽이는 낙살(烙殺), 밟아죽이는 답살(踏殺), 깔아 죽이는 압살(壓殺), 독을 먹여죽이는 독살(毒殺), 껍데기를 벗겨 죽이는 박살(剝殺), 끓는 물에 삶아 죽이는 팽살(烹殺), 불에 태워죽이는 분살(焚殺), 소살(燒殺), 베어죽이는 참살(斬殺), 여기서도 머리를 베어죽이는 참수(斬首), 허리를 끊어 죽이는 요참(腰斬)이 있다. 또 물에 빠뜨려 죽이는 익살(溺殺), 수장(水葬), 잡아 죽이는 포살(捕殺), 굶겨죽이는 아살(餓殺), 목 졸라 죽이는 교살(絞殺), 액살(縊殺), 채찍질하여 때려죽이는 추살(추殺), 철퇴로 쳐 죽이는 추살(鎚殺), 몽둥이로 쳐 죽이는 추살(椎殺), 발로 차 죽이는 축살(蹴殺), 높은 데서 내던져 죽이는 척살(擲殺), 곤장으로 때려 죽이는 장살(杖殺), 폭탄을 터뜨려 죽이는 폭살(爆殺),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책살(책殺), 꾀어내어 죽이는 유살(誘殺), 죽일 사람이 없을 때 가족 등 다른 사람을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 등 인류의 역사에 있었던 사람 죽이는 방법이 모두 동원된 것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현실이었다.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고 학살이 일어난 곳도 전국 방방곡곡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문자 그대로 죽은 자들의 뼈도 못 추렸다는 것이다. 고양 금정굴에서, 지리산 외공마을에서는 일부나마 유골을 발굴하다가 쏟아져 나오는 유골을 감당할 길이 없어 다시 흙을 덮어버렸고,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는 지금도 유골을 발굴중이다. 발굴된 유골의 신원을 확인하는 문제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부끄럽게도 연구자들은 도대체 몇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는지 가늠조차 힘들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만, 어쩌면 100만 명이 ‘빨갱이’라는, ‘반동’이라는 손가락질 하나로, 심지어 그런 가족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한겨레21,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우리는 무덤 위에 서 있다’에서.)
우리 피 속에 이런 인자가 숨어 있다니요.
어렸을 때 할머니들은 벌레 한 마리만 못살게 굴어도 ‘죄로 간다’를 연발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옛부터 우리 민족이 가슴 깊이 품어온 소중한 심성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끊임없이 들려주시던 할머니들의 한스러운 이야기들이 철들면서 새롭게 다가와 그것 ‘죄로 간다’가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안건 한참 후였습니다.
무서운 일이지만
지뢰가 묻힌 철조망 밖에는
정교하게 세뇌된
우익 지뢰 인간 4천만
좌익 지뢰 인간 3천만
7천만 개 지뢰가 있다
이념 문제 앞에
뇌관을 세우고
언제라도 터질 것 같은
우리들 머리 속 지뢰
좌익 뇌관, 우익 뇌관도
장착되지 못한 나는
불량품인지 모른다
지뢰 인간들 세상에서는,
「지뢰인간」전문 - ‘수류탄 고기잡이’에서
김 형, 우리가 캄보디아 이전 이 땅이 킬링필드였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 보다, 학살된 유골들 원통하게 죽은 영혼들을 추스르고 다독이지 못했다는 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때 그 광기의 구조가 한 치도 변함없이 온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김 형이나 나나 정 시인이나 이런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일어났던 일 아닙니까. 곰곰 새겨 보면 요즘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자기와 생각과 입장이 다르거나 이익을 내는데 불필요하다하여 배척해 버리는 습성들은 학살의 기억이 집단 무의식화 하여 나오는 결과가 아닐까요.
학살은 겨레집단 내에서의 극단적인 정리해고가 아닐런지요. 아낌 받지 않는데 자기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지향하는 규범들을 지켜낼 필요를 느끼겠습니까. 역사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금 실감합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 있는 노동당사는 우리 사회의 무지와 무덤덤함을 몸으로 말하는 듯합니다. 세계 11위 경제대국의 화려한 거리, 우리들이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사랑을 나누어 자식을 낳고 피나게 일하는 바로 우리가 딛고 사는 발밑에, 한 서린 유골들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이 묻혀있으며, 원통하게 죽은 귀신들의 피울음이 온 산천을 적시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자각하지 않는 한, 우리와 우리의 가족들도 그와 같은 운명을 벗어날 수 없겠지요. 그래서 다시 또 서로 미친 듯 잡아 죽이는 역사를 반복할지도 모를 거라는 무서운 예감을 떨치고 싶을 뿐입니다.
새들이 천연기념물이면
하나 뿐인 분단의 땅은
세계 보물이겠지
점령군을 해방군으로 믿고
소를 잡았던 사람들이
다시 돼지 배를 갈라
쓸개 간 내장으로
핏칠하는 민통선 들판
피 냄새 맡고 날아오는
천연기념물 독수리들에게
땅이고 집이고 다 내주면 되는데
흔해빠진 까치들은 왜 싸우는 걸까
독수리들이 물러 간 뒤
돼지 내장은 까마귀 몫이고
날개 꺾인 까치 목덜미를
들고양이 물어뜯어도
지뢰밭 아카시아에 까치들은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다
「까치」전문 - ‘수류탄 고기잡이’에서
우리는 양지리 철새 보는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토교 저수지 뚝방에 독수리들이 해바라기하는 모습이 꼭 염소 떼가 점점이 놀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 아래 논에는 까마귀, 까치 떼가 독수리 먹이로 준 것들을 뜯고 있었구요.
주변 사육장에서 폐사한 놈이나 내장들을 갖다 놓는데 녀석들은 습성이 꼭 죽은 고기만을 먹는다네요. 사냥을 못해서 사람이 먹을 것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다 굶어 죽을 거랍니다.
지역유지가 여섯 번 보를 쌓고 여섯 번 국회의원을 해 먹었다 해서 천천히 뚝이라 불리운다는 뚝방에 올라보니 꽤 너른 저수지가 펼쳐지더군요. 그 봇물이 철원평야의 중요한 농수랍니다.
저수지에 청둥오리가 떼로 놀던데 ‘어쩐 일이지’ 하며 시인이 초병들한테 물어요. 그 친구들 말이 밥 먹으러 갔다네요. 아침에 들로 나가서 저녁에 돌아온답니다. 아니 얼마나 되길래.
저수지 너머 산등성이 도로가 철책선이랍니다. 남북협정으로 대남대북방송이 그쳐 조용하데요. 좌우 야산들이 다 지뢰지대라는데 구분을 못하겠어요.
잠시 군대시절의 회한에 젖었습니다. 야간에 부대 이동하여 철책선에 처음 투입되었는데 대남대북방송은 왜 그리 와글대던지요.
흥분과 긴장 속에 말로만 듣던 비무장지대 철책선의 아침은 ‘이거 우리 시골이나 똑 같잖어’ 였습니다. 어디 유별난 데가 있어야지요.
전쟁이 만약 남쪽에서 끝났다면 금강 가에 철책이 둘러쳐졌겠지요. 고향동네서껀 주변 모두 지뢰밭이었겠구요.
분단이란 게 그런 거 아닐까요. 하긴 우리에게 분단은 날벼락이었지요. 시인은 미군 중령 놈이 30분 만에 그은 게 우리가 나뉜 시작이라고 아까부터 두런대고 있어요.
주변 밭과 들은 지뢰와 불발탄이 널린 황무지를 개간하여 일군 땅이랍니다.
특히 대마리 ‘두루미평화관’이 들어서 있는 들은 개간 때 경운기를 자동으로 놓고 저 편까지 보내면 중간에 뻥뻥 지뢰를 터트리면서 끝까지 간다네요. 그러면 그쪽에서 다시 돌려세워 보내고 그러면서 개간했는데, 그 마을 사람들 열에 둘 셋은 발목이 없답니다.
나라에서 만평씩 줘서 목숨 걸고 개간해 놨더니 서대문 어디 사는 주인이란 자가 재판해서 뺏어가 버렸다네요.
나라는 농사지으라고 줬지 소유권까지 준 것은 아니라고 판결이 났답니다.
미제 라디오 부속품으로 만든
지뢰 탐지기로 한발 한발 개간한 땅
써레질하던 소 발목이 지뢰에 끊어지던 땅
논두렁에 걸어 놓은 점심 화덕에
불을 지피다가 흙에 있던 칼빈 총알이
솥 단지를 뚫고 나온 땅
벼가 익을 무렵
온통 한문이라 읽지도 못한
낡은 등기 한 장 들고 찾아온 서울 놈이
자기 땅이라고 우기던 땅
촌 것이 난생 처음 법정에 나가
벌벌 떨다 말도 못하고 빼앗긴 땅
소작으로 부치는 논에 가다가도
멀찍이 바라보면 목이 메이는 땅
「빼앗긴 땅-수복지구」전문 - ‘지뢰꽃’에서
위 사례는 통일 국면에 중요한 문제점을 시사합니다.
언젠가는, 아니 어쩌면 느닷없이 닥칠지도 모를 통일 상황에서 민통선과 비무장지대지역 또 북한지역에 대한 남하한 이들의 토지 소유권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거기에 대한 법령 마련 등등의 준비가 꼭 필요할듯한데 즉흥적인 것을 좋아하는 우리네 기질이 과연 해 놨을까 싶네요.
지뢰밭 뽕나무에 오디가 익던 날
우리들은 사격장에 탄피나 캐러 가고
배가 고프면 아카시아 꽃이나
따먹으면 배부른걸
내 친구 영섭이는 지뢰밭
가시철망에 올라가 오디를 따다가
발을 헛 딛어 지뢰밭 안으로 떨어 졌었네
지뢰가 터져 두 다리가 끊어져서도
철조망 밖으로 기어 나와
사방공사에 나간 에미를 부르다
죽은 내 친구 영섭이는
두 손에 거무죽죽한 오디를 꼭 쥐고 있었네
시퍼렇게 뜬 두 눈은 뽕나무를 보고 있었네
「오디가 익던 날-수복지구」전문 - ‘지뢰꽃’에서
시인은 어릴 때부터 폭발물 사고 지뢰사고를 일상으로 겪고 살았답니다. 겉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야산과 들에 지뢰가 수도 없이 매설되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합니다.
전후 개간과정에서 불발탄을 건드리거나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거나 발목이 나간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네요. 이것은 전방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국 기지 주변에 묻힌 데가 한두 곳이 아니라는 보도를 본적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서울 우면산 예술의 전당 근처에서도 사고를 당했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을 정도로 우리는 무척이나 둔감하게 살고 있나 봅니다. 가슴 아프게 형상화된 그의 시편입니다.
금학산 자락 밑
외딴집에 사는 고물장사 내외를
춘천댁이라 불렀네
박격포 불발탄을 모아 들여
구리 놋쇠 분해하여
운천에 내다 팔고 살고있었네
유난히 금학산 노을이
피 보라를 치던 저녁에도
춘천댁 내외는 정답게 앉아
불발탄을 분해하고 있었네
박격포 옆에서 놀던 젖먹이가
잘못 건드린 뇌관이 터지면서
마당에 불발탄들 폭발한 자리에는
춘천댁 내외는 없었네
젖먹이도 없었네
마당에는 웅덩이만 남았었네
나뭇가지에 걸린 살점을 뜯어내
묻어야 할 구덩이만 남았었네
「춘천댁-수복지구」전문 - ‘지뢰꽃’에서
철원에는 포 사격장이 널려 있어서 그곳서 흘러나오는 오염원 또한 심각하답니다. 동양 최대의 미군 사격장이 있는 마을은 암 발병률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데, 취수장이 사격장 아래쪽에 있어 물 오염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랍니다.
이곳은 화산지대라서 물이 지하로 흘러들어 오염이 광범위 할 것이라 시인은 걱정이 태산이더군요.
시인이 나고 자란 마을을 보고 싶었습니다. 깨복쟁이 시절부터 부벼대며 놀았을 학교와 골목들 산천들의 기운을 느껴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동송 읍내 그의 모교인 초등학교로 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방과 후 특별활동으로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더군요. 어린 시절과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학교는 여느 시골학교처럼 별로 새로울 것 없이 평범하였습니다.
그의 모교 운동장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아주 아기 때부터 일상생활로 대남방송, 폿소리, 총소리, 군가소리, 군화소리를 자장가 삼아 듣고 자랐답니다.
시인이 정색을 하며 그러데요.
“여기서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생사의 문제입니다. 푸에블로 호 사건, 판문점 도끼 사건 때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를 부여안고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세상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어야하는 불쌍한 것들’하면서 말입니다. 개전 즉시 우리는 죽습니다. 무슨 사건이 벌어지면 우리는 당장 목숨의 위협을 느낍니다.”
남쪽 사람들은 결코 느끼지 못할 엄혹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지금껏 이어지는 기억들이 시 세계의 바탕을 이뤘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포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총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탱크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트럭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 귓속의 낯선 침묵에
평형 감각이 개처럼 짖어대는 밤
예리한 고요가
온 몸 세포를 찔러대는 밤
「불안한 밤」전문 - ‘지뢰꽃’에서
어릴 적 주변 산이 온통 벌건 벌거숭이였다는 얘기, 학교 도서관에 빈병을 갖다 주면 독서카드를 줘서 샘표 간장병에 든 간장을 다른데 따라 붓고 가져가 아주 허름한 갱지로 된 동화책을 본 기억,
어린 시절 동네에 월남에서 돈을 많이 벌어온 부자가 있었는데 그 집에서 문학전집들을 어지간히 봤다는 얘기, 고등학교 때 교지에 시 모집하길래 냈더니 선생님이 불러 ‘니가 쓴 거냐 너 국문과 가야겠다’ 그러셨다는 얘기.
그리 끄적이다 본격적으로 쓴 것은 서른 넘어 죽을 고비를 넘기는 와중에 철원병원에서 서울병원으로 가다가 마침 벽제화장터를 지나는데 내가 남긴 건 뭔가 생각하니 허무하더라 건강을 회복한 다음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창비 시집 1권서부터 200권까지 밑 줄 치며 읽고 나니 좋은 시와 안 좋은 시가 눈에 들어오더라 학교졸업하고 공무원을 수년 간 했는데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그만 뒀다 거기서 안사람을 만났고 그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문득 태어나 여지껏 산다는 그의 집이 보고 싶었습니다.
거기서 그가 그토록 애닯게 노래하는 부모님들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의 부모님들은 실향민입니다. 아버님 고향은 황해도 연백, 어머님 고향은 평북 정주라네요. 시인은 어머니로부터 시적인 자질을 받았다 이야기합니다.
모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인의 집은 철원도서관을 지나 고등학교 바로 앞집이었습니다.
시인이 젊을 때 옛집을 헐고 새로 지었다는 허름한 단층양옥은 강원도 특유의 산세로 앉은 금학산이 뻗어 흘러내린 산자락 아래에 있었습니다. 청년시절 책을 읽곤 하던 뒷산 숲, 지금은 복개된 집 앞 개울에서 피라미 미꾸라지를 잡던 기억들, 어릴 때는 아버지 어머니 실향 얘기 고향 얘기가 지겨웠었는데 나이 먹고 보니 그처럼 절실한 게 어디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든답니다.
어머니는 전쟁 중 열여섯에 정주에서 목선을 타고 오빠와 함께 목포로 남하 했답니다. 시인은 두 번째 시집 자서에 ‘황해도 소년이었던 아버지가 귀향 꿈을 접던 생의 마지막 순간 눈가에 맺혀 있던 서러운 눈물방울’을 이야기합니다.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지요.
저기 아버지가 쓰던 낫이 걸려 있다
저 낫으로 앞산 참나무 오리나무를 베어
아버지가 삼 년 병치레하던 뒷방에
군불을 지펴 놓고
야윈 손을 잡아 보고 싶다
낫 한 자루만 있으면
추수를 하는 논에서나
나뭇단을 지고 오던 산에서나
당당한 가장이었던
아버지 따스한 정이 그리워지는 날
철없는 아들 손을 잡고
묵묵한 빛으로 세상을 밝히고 있는
초생달을 바라본다
아버지 손때 묻은 채
하늘에 걸린
낫 한 자루를 바라본다
「초생달」 전문 - ‘지뢰꽃’에서
시인의 부모님은 전쟁의 포화가 가시지 않은 폐허에서 불발탄과 지뢰가 널린 묵정밭을 개간하며 삼남매를 키워 냅니다. 실향민인 그들이 믿고 의지할 것은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낳아 길러내는 삼남매라는 알토란이었겠지요.
그의 금학산 연작 중 ‘겨울’을 볼까요
일곱 살 때 겨울이던가요
부모님은 내게 두 동생을 맡기고
나무하러 가시고는 했지요
문 앞에 서있던 우리 삼 남매를
몇 번이고 돌아보시며
금학산으로 나무하러 가시고는 했지요
기다리다 지쳐 잠들은
아득한 꿈결 속이던가요
삼 남매를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에 문을 열면
산비탈을 내려온 바람이
우리 귓불을 먼저 쓰다듬었고
저만치 아버지 지게 뒤에서
저녁 햇살에 빛나던 산등성이를
눈이 부셔 바로 볼 수 없었지요
물론 겨울밤 아랫목을 데워
삼 남매 뼈마디를 키워준 것도
지금은 꾸부정한 부모님 등허리와
금학산 자락 나무였지요
「겨울-금학산」전문 - ‘지뢰꽃’에서
‘문 앞에 서 있던 우리 삼남매를 몇 번이고 돌아보시며’, 저는 이 구절을 이 글을 마쳐가는 이제야 이해하였습니다.
김 형, 어린것들을 두고 불발탄과 지뢰가 깔린 산으로 나무하러 가야하는 그분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우리 부모님들은 너무도 험한 세월을 사셨던가봅니다.
집안에 안계신줄 알았던 시인의 어머님이 나오셨습니다. 아직도 소녀의 생기가 가득한 아주 해맑은 할머니셨습니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는 것을 시인의 공부방에 들러야 한다고 굳이 사양하고 나서는데 길가까지 나와 배웅하시는 모습에 시인이 왜 어머니로부터 시적인 자질을 받았다하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동송 시내 한가운데 제일 번화한 곳에 시인은 둥지를 틀었더군요. ‘시인 정춘근 공부방’이라고 대문짝 만 하게 간판도 걸었구요.
이곳에서 아이들 글쓰기 논술 지도도 하고 어른들 시 창작교실도 한답니다. 아이들한테 ‘다른데 말고 네 주변을 써라’ 그랬더니 서울 백일장에 가서 2등 3등 입상을 해 오더랍니다.
차 한잔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신탄리역까지 바래다줘 역에서 헤어졌습니다.
우리네 땅 어디라도 뼈저린 사연이 배지 않은 곳이 있을까마는 철원의 아픔은 유독 더 한 듯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그곳에서 우리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가장 외지고 아픈 곳, 살육의 끄트머리에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일궈낸 땅, 그곳에서 피어난 작은 들꽃, 지천으로 피어날 들꽃들의 싹을 저는 감히 희망이라 부르겠습니다.
폐허가 된 노동당사에 올랐다가
문득 월정역이 보고 싶어 가는 길
방금 지뢰밭을 기어 나온
칡 넝쿨손이 내게 구원을 청한다
지뢰밭에서 꽃이나 피우는
아카시아는 모를 것이다
기어서라도 찾아가야 하는
그리운 곳이 있다는 것을
뼈마디가 으스러지도록
안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넝쿨이 손을 뻗어 잡으려는 세상은
철조망 안에도 없었고
철조망 밖에도 없었다
넝쿨손을 잡아 주는 사람도 없었다
얽히고 설킨 넝쿨 손아귀를 빠져 나온
산비둘기가 불쑥 날아오르는 하늘
코브라 헬기가 맴돌고 있다
「넝쿨손」전문 - ‘지뢰꽃’에서
이제야 우리는 우리 무지렁이들의 절박한 아픔을 봐내는 시인을 가졌습니다. 무지렁이들이 절실하게 내미는 넝쿨손을 잡아주는 시인을 말입니다. 남북 공히 늘 문밖에서 떨고 있었을 뿐인 우리 무지렁이들을요.
저는 정춘근 시인의 시들이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과 함께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아랍어로 번역되어 지금 고통의 한가운데 있는 중동의 민중들 그중에서도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사람들과 함께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50년 전 우리가 그렇게 겪었노라고, 지금도 상황은 끝나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노라고.
김 형, 북녘 동포들께 아사의 위기가 또 다시 닥친답니다. 우리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나 봅니다
첫댓글 카페 깊숙히 들어오는 초여름 저녁빛보다 더 붉은 감동이 가슴을 물 들입니다. 정춘근시와 함께 쓴 님의 글이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을 말끔하게 씻어주네요. 박민규씨 이 많은 글 올리느라 수고하셨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