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샛절드는 날은 1995년 제주도청에서 발행하는 <제주도>지 제98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금주 토요일이면 봄이 왔다는 입춘입니다. 매서운 추위도 점차 가라앉고 따뜻한 날이 올테죠.
입춘을 맞아 옛 조상들의 삶을 살펴봅니다.
2012년 금년도의 입춘 즉 샛절드는날은 2월 4일(토요일)이고
입춘이 드는 시간은 오후 7시22분으로 만세력에 쓰여있군요.
샛절 드는 날
이홍식
입춘立春은 음력으로 1년을 24절후로 나눈 첫 번째 절후이다. 입춘은 봄이 왔음을 알리는 첫날이며 또 작은 뜻으로 새해의 시작을 의미한다. 입춘 절후가 시작되는 첫날은 0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입춘이 드는(시작되는) 시간이 있어 그 시각이 해마다 다르다.
입춘 날은 우리 지방에서 ‘샛절드는 날’이라 하여 여러 가지 금기 사항도 있었고 또 관민이 모여 함께 지낸 ‘입춘 굿’도 있었다. 이 날만은 여자는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남자는 집안에서 조용히 한 해의 일을 계획하며 수신하고 나들이는 자중했다. 세태가 달라진 오늘날에도 그 유습으로 샛절이 드는 시간만은 남의 집을 방문하는 일을 금기시하는 습속이 여전히 남아 지켜지고 있다.
이날 특이한 습속으로 여자가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과 병행 남자도 수염이 있는 자는 같은 맥락에서 방문하는 것을 꺼렸다. 반대로 이날 상제喪制를 만나면 그 해에 운이 대통한다고 믿었다. 특히 정월 초하루와 입춘 날은 돈 등 재물財物를 내치지 않는다고 하여 돈이나 물건을 타인에게 주지 않았다. 차용한 금전도 지불만기일이 이날이면 날을 넘겨 지불했으며 또 이날은 돈을 빌려주지도 않았다.
이날 본도에서만 행해졌던 고유의 민속놀이인 입춘굿은 문헌상에만 남아 있고 사라져 이를 구경하지 못함이 아쉽다. 하루 빨리 발굴 재현하여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곳을 누비며 관광객과 어울려 공연한다면 어느 놀이보다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본다.
입춘 날에는 궁중이나 서울 지방을 가리지 않고 각 가정에서 좋은 뜻의 글귀를 써서 대문 기둥 등에 붙였는데 이를 입춘첩立春帖 춘첩春帖 또는 입춘문立春文 춘방春榜 춘축春祝이라 했다. 이런 풍속은 악귀惡鬼를 막고 초복招福을 바라는 주술적 사고에서 발생했다고 본다.
제주와 인연이 있는 인물인 추사 선생의 입춘첩에 관한 일화를 들면.
제주도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말하는 ‘갑인년(서기 1794년)흉년에도 먹다 남은 게 물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와 같이 속담이 생길 정도로 혹심했던 흉년이 연 4년째 계속되었다. 갑인년 다음해인 정조 19년 을묘乙卯년에 제주의 기근을 진휼賑恤하여 의녀반수가 된 의녀 김만덕의 전기를 쓴 사람은 번암 채제공樊岩 蔡濟恭(1720~1799)이다. 그는 입춘 후 서울의 각 집의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을 감상하며 지나다 한 집 앞에서 글씨가 특이하므로 그 글을 쓴 사람을 찾으니 7살 난 어린아이였다. 이에 번암은 장차 이 아이가 명필名筆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남겼다는 고사도 있다. 그 아이가 후일 현종 때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圍籬安値되어 추사체를 완성한 김정희 선생이시다.
입춘첩은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입춘 날 각 가정에서 써 붙였던 것이며 그 글귀의 종류도 수백 종에 달했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 있는 입춘첩을 소게하면
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
거천재去千災 래백복來百福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요지일월堯之日月 순지건곤舜之乾坤
애군희도태愛君希道泰 우국원풍년憂國願豊年
부모천수년父母千年壽 자손만대영子孫萬代榮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 사방무일사四方無一事
국유풍운경國有風雲慶 가무계옥수家無桂玉愁
재종춘설소災從春雪消 복추하운흥福遂夏雲興
북당훤초록北堂萱草綠 남극수성면南極壽星明
천상삼양근天上三陽近 인간오복래人間五福來
계명신세덕鷄鳴新歲德 견폐구년재犬吠舊年災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백복래開門百福來
봉명남산월鳳鳴南山月 인유북악풍麟遊北嶽風 등 대련과 단첩들이 있다.
본도에서 특이한 것은 안방문 위에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는 글귀를 붙이거나 글씨 대신에 돌하르방의 모습을 그려 집안의 문마다 붙이는 집들도 있었는데 이 또한 잡귀를 막을 수 있다는 입춘첩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복이 집안에 들어오기를 빌며, 액막이를 하고, 풍년이 들고, 백성이 잘 살며, 나라가 태평하기를 염원하는 주술적 글귀들이다.
입춘첩도 붙이는 장소에 따라 글귀가 각각 다른데, 수필가 서상은의 ‘입춘첩’에 있는 내용을 들면
소슬대문 우측에 세화년풍歲和年豊 좌측에 국태안민國泰安民이 붙고 중문 우측엔 삼양三陽 좌측엔 태회泰回가 붙는다. 판목창고문에는 취지무금取之無禁 연탄창고문에는 충일노적充溢露積이라 써 붙이니 <아무리 쓰더라도 돈 달라는 사람 없고 풍년이 들어 노적가리가 많이 쌓여짐>을 바라는 뜻이다. 곳간에도 적어외積於外라 붙였다. 동방문에는 하늘을 섬기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을 붙였다. 사랑방문 좌측에는 정좌간서일매장靜坐看書一昧長 우측에는 충효지외무사화忠孝之外無事華라고 써 붙였으니, 조용히 앉아서 책을 보며 날을 보내니 충효 외에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사랑방 축문 우측에는 승우래운勝友來雲 사랑방 문 좌측에는 이문회우以文會友라 붙인다. 좋은 친구가 구름 같이 모여들고 글로 벗하는 친구가 모여든다는 것이다.
우측 사랑방 축문에는 학우등사學友?蛇라고 써 붙여 많이 배우면 벼슬을 한다는 염원을 담아 두었다. 사당 문에는 감고이미입춘敢告已未入春을 적어 그해의 봄이 왔음을 알렸다.
일각문 우측에는 만사형통萬事亨通 좌측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을 붙여 일년동안의 성공과 행운을 빌었다고 그 뜻과 붙이는 곳을 쓰고 있다.
할머니방 뒷문에는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앞문 우측에는 만수무강萬壽無疆 앞문 좌측에는 재수대통財數大通을 붙이고 새 색시방 앞문에는 만사여의萬事如意 뒷문에는 정좌간서일매장靜座看書一昧長을 붙였다. 또한 할머니방 다락문에는 금과 비단 등 재물이 많기를 바라는 금금진진金錦陳陳을 붙였고, 안방 측문에는 강복양양降福洋洋을 적어 복이 쏟아지기를 빌었다.
안방 측문 중앙에 만당여기萬堂如氣, 안방 앞문 우측에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좌측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부엌 기둥에 신수자족薪水自足이라고 붙여 땔나무나 먹는 물 등이 풍족함을 말하였고, 항상 재수좋은날을 바라는 서운상일瑞雲祥日, 건양다경建陽多慶을 부엌 후문 우측과 좌측에도 붙였다.
집 창고 문에는 감차지甘且旨, 도장 문에는 충어내充於內를 붙여 항상 좋은 일과 안으로
더욱 알차고 충실한 것을 고했다.
안방 다락문에는 주효진진酒肴陳陳이라고 해서 술과 안주가 푸짐해서 먹을 것이 풍족함을 말했고, 곳간에는 용지불갈用之不渴이라고 해서 아무리 사용해도 달아 없어지는 일도 없어 자연그대로 언제나 빈 것이 없이 존재한다는 글을 붙이고 봄기운이 온 집안을 감싸기를 바랬다.
이들 예들이 옳고 그름을 논할 바가 안 된다. 우선 입춘첩은 그 글을 쓴 이의 바라는 바나 좋아하는 구절을 썼을 것이며, 지방마다의 특색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 글귀를 써 붙이는 장소도 가옥의 구조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즉 본도의 경우 대문 대신 정낭으로 시설되었을 경우 정낭에 붙일 수 없으므로 상방上房(大廳)문 앞에 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근래에는 연립 주택이나 아파트의 생활이 보편화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붙일 곳이 마땅치 않다. 뿐만 아니라 한문도 일상생활에서 멀어지고 붓글씨도 잘 쓰지 못하여 입춘첩을 써 붙인다는 것 또한 어렵게 되었다. 근래에는 입춘첩도 부적과 같이 작게 인쇄하여 철학관에서 판매하거나 나누어주므로 마루나 현관 한켠에 붙이는 가정도 있다.
옛은 새해와 새 절후를 맞는 입춘날 춘첩을 써 붙임으로써 한해의 모든 액막이를 했고, 그 해에 복이 오기를 빌며, 나아가 풍년과 나라의 평온을 빌었다.
이 또한 우리의 전통 풍속 중의 하나였는데 오늘에 사는 젊은 우리들이나 외국인의 눈에 신기한 일로 비쳐지고 있으니 세태도 너무 변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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