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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시성시복 위원장 박윤점 시몬 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 입니다. 저희 시복시성위원회 에서는 9월 한달 동안 평일 미사 때 순교자의 삶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땅에 천주교 전파의 밀알이 되셨던 순교자들의 삶을 돌아보면서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첫번째로 순교자 이벽 세례자 요한의 삶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광암(曠菴), 1754년 경기도 포천의 기호학파 남인 집안에서 부친 이부만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무반 집안으로 유명하였으나 그는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고 뜻이 맞는 선비들과 어울려 학문을 연마하는 데만 노력하였습니다.
1776년 녹암 권철신을 스승으로 받들고 '녹암계'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1777년부터 정약종, 정약전 등의 학자들과 천진암에 모여 토론하면서 학문 연구를 계속하였고, 1779년에는 녹암계 회원들의 강학에 서학서를 제시하고 천주교 교리를 강학의 토론 주제로 정하면서 녹암계의 인물들에게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수용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벽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선교사가 없는 조선에서 독학으로 책을 통하여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자생적으로 조직을 키워나간 것은 가톨릭 교회 역사상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벽의 고조부인 이경상이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북경을 다녀온 이후 그의 집안에는 서학과 천주교에 관련된 서적이 있었으며 그것들은 통해 이벽이 서학과 천주교를 자생적으로 익혀온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후 이벽은 이승훈을 중국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하였으며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때 함께 세례 받은 사람들이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윤하 등 남인 양반 학자들과 중인 김범우 등이었습니다. 이는 조선에서 거행된 최초의 세례식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로 간주됩니다.
그 뒤 천주교의 의식이나 전교를 위해 교단조직과 교직자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껴, 다른 신자들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교단 조직인 이른바 ‘가성직자계급’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벽은 이 교단 조직의 지도자로서 포교,·강학,사법 등의 천주교 전례의식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나 1785년 이벽의 주도로 모인 신자들의 집회도중에 형조의 금리들에 적발되어 모두 형조로 압송되는 추조적발사건이 발발하였습니다. 일부는 귀양을 가고 이벽은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으며 거부하였으나 부친 이부만은 동료들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 그를 집에 연금시켰으며, 32세의 나이에 선종하셨습니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굶어서 아사 하셨다는 설과 병사 하셨다는 설이 있습니다. 유해는 화현리의 선산에 묻혔다가 현재는 경기도 퇴촌의 천진암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비록 그 대가는 죽음과 박해로 이어져야 했지만 이벽의 열정과 노력은 이 땅에 천주교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벽 순교자의 정신을 잊지 말고 이어 나가야 할 것 입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찬미예수님!
오늘은 순교자 이승훈 베드로의 삶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승훈은 1756년 서울 남대문 밖 반석방 중림동에서 태어났으며 한국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한국교회 최초의 영세자 입니다.
1780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이 남인 소장학자들 사이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서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서학 모임의 중심 인물인 이벽과도 자연 친교를 맺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으며 1783년 이벽의 권유로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약 40일간 그 곳에 머물면서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뒤,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습니다.
1784년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 묵주, 상본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 권일신, 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상의하여 명례동의 김범우 집을 신앙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인 신앙의 모임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지던 중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된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하자 한때 배교하였지만, 곧 교회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등 가성직제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회법에 어긋난 행위임을 알고는 이 조직을 해산하고 성직자영입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1790년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2월 서부도사를 거쳐 6월에 평택현감이 되었습니다. 때마침 1790년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의 명을 전하자, 그의 신앙은 유교와 천주교회법의 대립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어 고민하던 끝에 다시금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 권상연의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서양 서적을 구입해 온 사실과 1787년에 성균관유생들이 명례동 집회를 비판한 반회사건이 문제되어 문초를 받고 관직을 삭탈당합니다.1795년 주문모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을묘실포사건이 일어나 천주교서적을 조선에 전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충청남도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나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정약종,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되어 4월8일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었습니다.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습니다.1868년에아들 이신규와손자 이재의가순교하였고,1871년에 증손자 이연구,이균구가 제물포에서 순교하였 습니다.몇번 배교하기는 하였으나 금새 뉘우치고 하느님께 되 돌아온 그는 그심정을 ''달이 비록 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늘에 남아있고 ,물이 솟구치더라도 연못에서 다하는 것같이 내 신앙은 항상 천주 안에 있다.''라는 글을통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찬미예수님!
오늘은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의 삶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김범우는 1751년 서을 명례방에서 중인 신분인 역관의 8형제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학문을 좋아하여 이벽과 친하게 지냈고, 그런 인연에서 이벽이 1784년 처음으로 천주교를 설교할 때 그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며,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입교 후 김범우는 천주교신앙의 열렬한 전파자가 되어 두 동생, 김이우와 김현우를 입교시켰고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등 초기 천주교 신앙 선조들과 한국교회 최초의 신앙공동체인 명례방 공동체를 만들고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을 했습니다. 먼 훗날 한국 천주교를 상징하는 서울 명동성당이 들어서게 되는 장소 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한 이후 김범우는 중인과 양반은 물론 같은 역관 집안에서 여러 사람을 개종시켰으며 장례원 앞 그의 집에서 천주교 집회를 자주 가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 및 권일신 부자 등 양반과 중인 수십 명이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형조의 관리가 도박으로 의심하고 수색한 끝에 예수 화상(畵像)과 천주교 서적들을 압수하여 형조에 바치게 되었습니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양반집 자제들은 알아듣게 타일러 돌려보내고 중인 신분인 김범우와 최인길 만을 가두었는데 이것이 1785년 봄에 일어난 을사추조적발사건 이었습니다. 이에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이윤하, 이총억, 이정섭 등 5인을 거느리고 형조로 들어가 김범우와 같은 교인이라고 하며 성상의 반환을 요구하였습니다.
형조판서는 그들이 사대부의 자제이므로 그들을 타일러 돌려보내는 데 그쳤고, 중인인 김범우에게는 천주교를 버리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형조판서의 가혹한 심문에 “서학(西學)에는 좋은 곳이 많고 그른 곳을 모릅니다.” 라고 대답하여 더욱 심한 옥고를 치른 후 마침내 밀양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소장했던 책자를 모두 형조의 뜰에서 불사르고 서학을 금하는 효유문을 전국에 돌렸는데, 이것은 천주교를 공공연하게 공격하고 금한 최초의 공문서가 되었습니다. 한편, 김범우는 유배된 뒤에도 그곳에서 계속 천주교를 신봉하면서 큰소리로 기도하고 전도하였으나, 장형을 당한 상처의 악화로 유배된 지 1년 만에 죽었습니다.
김범우는 한국 천주교의 첫 번째 증거자라고 불립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오랜 기간 뒤에 숨지게 되면서 순교로 불리지는 못했으나 최초의 순교자였던 진산사건의 윤지충, 권상연보다 4년 앞서 순교를 한 최초의 순교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신유박해 순교자로한국교회 토대 다진 하느님의 종 ‘내포의 사도’이 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를 말씀 드리곘습니다.
충청도 아산지방으로부터 태안반도에 이르는 일대의 평야를 내포(內浦)지방이라 한다. 이 내포평야의 접경에 천안군 「여사울」이란 곳이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해당하는 여사울에서 이존창(루도비코곤자가는, 1752~1801, 일명 단원)은 농가의 양민으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여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으나, 더 깊은 학문에의 열정으로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 때 삼남에 그 위명이 자자하던 권일신선생 형제들을 알게되어 그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권일신은 젊고 총명한 농민출신의 학자인 이존창의 자질과 품성에 이끌려 그에게 마음을 쓰고 있던 중,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어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즉시 이 신앙의 은혜로움을 제자인 이존창에게 전하였다. 스승은 제자에게 특히 천주교에서 믿어야 할 중요한 신조뿐만 아니라 천주교인의 본분과 그 실천방법까지 철저히 전수하였다.
이존창이 루도비코곤자가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 때, 스승 권일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그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는 스승의 명에 따라 고향으로 가서 머무는 동안 가족과 친척, 그리고 벗과 이웃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였고 그의 지식과 덕행을 보고 따르는 많은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저 유명한 내포천주교회의 기초가 이렇게 이루어 진 것이다. 이존창에 의해 이루어진 내포천주교회는 다른 어느 곳보다 열심했고, 이후 백년간의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여 한국교회의 굳건한 토대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복음을 널리 전파한 이존창은 오늘날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게 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을 갖고 있었기에 한국초대교회에 있었던 평신도에 의한 임시성사집행기에 그도 평신도의 임시 성직단(聖職團)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품성사를 받지 않고 성사와 전례를 집행하는 것이 잘못인 줄을 알자 그 일을 즉시 중단하고 사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어 윤유일, 지황, 최인길 등과 함께 사제영입운동을 도와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당하여 심한 고문과 교활한 꼬임에 빠져 한 때 배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도 베드로처럼 즉시 뉘우치고 이 배교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그의 땀이 어린 고향 내포지방을 떠나 새로운 회개의 삶을 살게 되었다. 홍산(鴻山)으로 이사한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고 전교에 힘썼다. 이로 인하여 그의 눈물과 땀으로 전교한 내포와 홍산 지방에서는 박해 중에 불굴의 증거자들이 잇달아 배출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그의 전교로입교하였는데, 김대건신부의 할머니가 그의 조카딸이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이며, 실로 이 땅에서 12년간 사목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오늘이 있도록 기여한 최양업 신부는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된다.
이렇게 그가 전교한 그의 친인척 가운데 사제가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전교한 결과로 입교하게 된 한국초대교회의 신자들에 의해 오늘날의 교회가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활동은 온갖 기대를 넘어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우의 상당부분이 그의 전교로 입교한 교우들의 자손들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전교상의 공헌은 지대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1795년 말에 이존창은 지방관리들에 의해 다시 체포되었다. 그는 고향인천안으로 이송되어 사도직 활동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강제로 연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연금생활 중에서도 이존창은 열절한 기도와 탁월한 교리지식으로 주변에 많은 감화를 주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정조가 재위 24년만에승하하고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순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궁중의 어른인 정순왕후 김계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권력의 변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인 1801년의 신유박해를 맞게 되었다. 이때 이존창은 6년간의 연금생활 끝에 그 해 3월 18일(음력 2월 5일)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801년 4월 8일 명도회 초대회장 정약종 선생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사형은 출신지 감사가 있는 곳인 공주로 호송되어 이루어졌다.내포의 사도 이존창, 그의 일생은 사도적 열성으로 불탔고 그의 전교업적은 교회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공주에서 장렬하게 참수되어 순교할 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역사는 내포가 늘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훌륭한 순교자의 못자리로 기억될 때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고 곤자가도 함께 기억될것이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찬미 예수님
오늘은 한국 초기 교회의 큰 기둥이었으며 103위 성인 中 평신도 대표 성
정하상 바오로의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복자의 삶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760년 경기도 광주군 마재 에서 태어난 복자는 진주 목사 정 재원의 유명한 네아들 약현,약전,약종,약용중 셋째로서2014년 8월16일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되었다.
곧은 성격과 명석한 두뇌로 연구심이 남달리 뛰어나 일찍부터 삶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과거 공부는 뒷전으로 한 체 철학과 윤리에 대한연구에 몰두 하였으며,한 때는 도교에도 심취하였고 또한 의학을 깊이 익혀 유명하기도하였다.
1784년 북경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 승훈 베드로로부터 이 벽,권일신과 중형 약전과 동생약용 형제들이 세례를 받을 때 복자는 좀더 진지하게 교리를 탐독 연구하면서 입교를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참 진리를 깊이 깨달은 2년 후인 1786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입교에 대한망설임이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비슷하다고 여겨 이 위대한 학자를 주보로모시고 드디어 세례를 받았는데 입교 이후에는어떠한 탄압과 박해에도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림 없이 험난한 믿음의 길을 올곧게 걸어갔습니다.
교회의 제사금지로 선각자 들이었던 양반들이 대거 교회를 떠났을 때에도
뒤 이은 1791년 윤 지충의 폐제분주 사건 곧 진산 사건으로 일어난 신해박해 때에도 부친을 비롯한 일가 친지들과 문중의 천주교를 버리고 교회를떠나라는 부단한 강요와 핍박이 있었지만 항구한 인내심으로 이를 참아받으며 신앙의 본분을 지켜나가는 치열한 삶의 자세를 보였습니다.
복자는 1794년 조선에 입국한 첫 선교 사제 주 문모 신부를 충실히 보좌하며 평신도 교리연구 및 선교 단체인 “명도회”가 창설되자 초대회장으로 임명되었고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그동안 연구한 교리를 바탕으로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상,하”2권을 저술하여 누구나 교리를 쉽게 이해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도 하며 선교에 지대한공헌을 하였습니다.
양반 학자로서 한문에 능통하였음에도 양민, 평민, 상민등 일반 대중을 위해 그 시대에 언문이라고 불리던 한글로 교리서를 저술하였음은 성서에서 깨달은 평등의식을 사회 공동체의 생활면에까지 실천한 활동하는 지식인 실천하는신앙인이었음을 보여줍니다.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가장 먼저 체포명단에 올랐고 극심한 고문과 문초에도 신앙을 부정하는 말이나 교회와 신자들에게 해가 되는 어떠한 말도 발설하지 않고 고통을 참아 받았으며서소문 네거리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복자의 얼굴은 밝게 빛났다고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며 죽기를 원한복자는 1801년 4월8일 영원한 천상교향을바라보며 마흔 한 살의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용기와 신앙적인 모범은 아내와 아들 딸에게 그대로 이어져 실천되었으니 1801년 신유박해에 한달 후 같은 곳에서 순교한 큰 아들 철상 가롤로는 아버지와 함께 복자품에 올랐고.1839년 기해박해 때 극심한 매질에 옥사한 아내 성녀 유 소사 체칠리아,나이 어려 화를 면했던 성 정하상 바오로, 딸 성녀정혜 엘리사벳이 아버지와 형이 순교한 38년 전의 바로 그 자리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의 화관을 받아 세분 모두 103위 성인의 반열에 오르니 일가족 모두가 성인,복자 품에 오른 화려한 마재의 성가정 순교자의 집안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한 참신잉인의 모범을 보여 주므로써 신앙의 후손인 저희들에게 길이 길이 귀감이 될 것입니다.복자가 태어나고 묻히신 마재 성지는 성가정 성지로 선포되었습니다.
한국의 성인 복자 순교자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찬미예수님!
오늘은 순교자 최창현 요한의 삶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최창현 요한은 1759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이승훈, 이벽 등 남인학자들과 교류하다가 천주교서적을 얻어 보게 되었고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한 최창현 요한은 곧바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게 됩니다. 글을 잘 알았던 그는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을 조선말로 번역하는 데 열중하였는데 이때 그가 번역한 책들이 『성경광익』, 『성경직해』, 『성경직해광익 등 이었으며 이 책들은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평온한 마음과 조심스러운 행동을 지녔으며, 모든 일을 부지런하면서도 공정하게 처리하였습니다.
지도층 신자들은 최창현 요한을 총회장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교우들이 타당하게 교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쳤고, 교회 일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1791년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제사를 폐지한 것이 문제가 된 <신해박해>가 발발하면서 조상 제사 폐지를 수용할 수 없었던 일부 지도층 신자들이 교회를 멀리하였는데도 최창현 요한만은 꿋꿋하게 교회를 지켜 나갔으며 더 나가 동료들과 의논하여 성직자를 영입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이 일을 앞장서서 추진하였습니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최창현 요한은 정식으로 회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고 그에게 성사를 받았으며, 언제나 미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정성스럽게 준비하였고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도 노력하였습니다.
최창현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집니다. “최창현은 조용하고 슬기롭고 견식이 넓고 마음이 용감하고 확고한 사람이다. 겸손과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은 그에게는 천성과 같았으며, 교우들에게서 그보다 더 존경 받고 사랑 받는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직후, 최창현 요한은 다른 교우의 집으로 잠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병 때문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사이 밀고자가 데리고 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포도청으로 끌려갔으나,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있었으므로, 곧바로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습니다. 의금부에서 처음 문초를 받을 때, 최창현 요한은 한때 마음이 약해져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 용맹한 마음이 되살아 났고, 이내 전날의 약했던 마음을 진실히 뉘우치며,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최창현 요한은 자신이 천주교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습니다.
최창현 요한은 2014년 8월 16일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 되었습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찬미 예수님 !
순교자 성월을 맞아 오늘은 순교자 윤 유일 바오로 (1760~1795)의 삶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박이라고 불리던 윤 유일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로 이주해 살았다.1801년 순교한 윤 유오( 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 (아가다)와 윤 운혜 (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이다
양근으로 이주한뒤 권철신(암브로시아)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윤유일는 그후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스승의 아우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데 열중하였다.
1789년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어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이때 밀사로 선발된 예비신자 윤유일 이었는데 그 이유는 성격이 온순한데다가 심지가 굳고 학식과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윤유일은 북경을 왕래하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옷 안에 숨긴 후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나 북경에 도착하였다.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또 윤유일으 북경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 로오 신부로 부터 조건세례와 구베아 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다.그리고 주교로부터는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1790년 봄 윤유일 바오로가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이 일 때문에 윤유일 바오로는 그 해에 다시 한 번 북경을 다녀와야만 했다. 구베아 주교는 다음 해 조선 신자들과의 약속에 따라 도스 레메 디오스 신부를 조선에 파견 하였다.그러나 그 신부는 조선의 신자들과 만나지 못하므로서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윤유일 (바오로)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지황(사바),최인길 (마티아)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12월에는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윤유일 (바오로)은 북경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이와 관련된 모든 신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대 주문모 신부는 신자들의 재빠른 행동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주문모 신부께서 거처하시던 집주인 최인길(마티아)는 신부님의 피신을 돕기위해 그 대신 신부노릇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박해자들은 마침내 신부님의 입국 경위를 알게 되었고, 또 신부님의 입국을 도운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사바)의 이름을 알아내고 말았다.그 결과 그들은 즉시 체포되어 최인길(마티아)와 함께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결코 신부님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였다.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쩔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한 뒤, 비밀리에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로 당시 윤유일(바오로)의 나이는 35세 였다.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윤유일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이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 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답변하였습니다.
2014년 8월16일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된 시복식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찬미 예수님
오늘은 강완숙(골롬바)의 삶과 신앙을 알아 보겠습니다.
강완숙은 충청도 내포지방의 아버지는 양반아고 어머니는 후처였기에 반 양반으로 태어났다. 머리가 영리하며 성격이 활달한데다 구변이 좋아서 어려서부터 당시의 여자들과는 남 다른데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충청도 덕산에 사는 홍 지영에게 후처로 시집갔어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항시 속세를떠나고 싶은 생각에 젖어 있을 때 , 천주교가
충청도 지방에 까지 전해지자 책을 구해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서 믿고 좇았을 뿐 아니라 집안을 권유하여 식구들을 교화시킴은 물론 이웃의 여러 마을의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에는 감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주는등 밤낮으로 그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체포되어 몇일동안 갇히는 몸이 되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곧 풀려났다.
평소 강완숙의 열렬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입교를 주저해오던 남편 홍지영은 천주교 박해로 자신에게 까지 후한이 미칠까 두려워서 헤어져 살기를 원하므로 감옥에서 나온 강완숙은 시어머니와 자신의 딸과 전처의 아들인 홍필주(필립보)를 데리고 한양으로 이사하였다.
한양으로 올라온 강완숙은 여러 교우들과 접촉하면서 전교에 힘쓰는 한편지황(사바)와 윤유일(바오로) 등이 사제영입 운동 과정중에 경제적인 일을 담당하는 등 큰일을 하였다.
1794년 12월 조선입국에 성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신부님은 최 인길(마티아)의 집에 숨어서 1795년 6월까지 전교에 힘을 썻다.
그러나 한 영익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님의 거처가 알려져 체포령이 내리자 강완숙은 자기의 집 나무 광에서 사랑방에 기거하게 하여 향후 6년간 그곳을 중심으로 전교활동을 계속 할수있었다.
미사를 봉헌하는 장소로도 강완숙의 집이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신해박해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엄중하던 시절이라 국사범을 보호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에 속했다.
1795년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초로 여회장에 임명되어 주 신부님을 도와 교회 일을 맡아 처리했고 당대의 일부 학자들과도 교류하여 교리를 토론했으며 당시 왕족인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등 궁녀들에게까지 천주교를 전하는 대담한 전교활동도 전개 하였다. 벼슬하는 집안의 부녀자들과 많은 처녀들도 감화시켜 입교하는 자가 많았다.
주문모신부 입국당시 4천여명에 불과햇던 신자수는 5년만에 1만 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여 신도의 수가 절대 다수였음을 볼때 복녀의 활약을 짐작할수 있다.
1800년 6월 28일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하니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며 강완숙도 그의 일가족과 함께 잡히게된다.체포되는 순간에도 신부님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체포를 모면할수 있게 하였다.주신부님의 체포에 혈안이 된 포도청에서 갖은 고문으로 신부님의 행방을 다그쳤으나 끝내 함구하며 함께 갇힌 부인들과 옥중에서도
심신수업에힘쓰며 순교하는 날만을 기다렸다.
그동안 모진 형벌인 주뢰를 여섯 번이나 받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이렇듯 갖은 고문을 받은지 만 3개월만인 그해 7월2일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나가는 길에서도 여교우들을 격려하고 주의영광을 노래하며 제일 먼저 목숨을 바치니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녀의 위대함은 순교자로서 그치지 않는다. 남성과 중인 중심의 조선교회 최초의 여회장으로서 당시 신자들과 초기 조선교회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다양한 자선활동을 펼쳤고 동정녀들과 과부들을 입교시켜 공동체를만들어 조선 최초의 수녀회와 같은 동정녀단체를 만들었으며 전교에 주력하여 조선교회의 기초를 다질수 있게 하였다.
2014년 8월16일 광화문 광장에서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완숙의공헌과 신앙의 모범을 기리기 위해 복녀로 선포하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아멘
찬미예수님!
오늘은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의 삶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김종한 안드레아는 충청도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났습니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의 아들이고, 김 데레사 성녀의 아버지이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할아버지 이십니다.
김 안드레아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년 뒤, 맏형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김 안드레아의 부친인 김진후 비오는 처음에 입교를 거부하였으나, 계속되는 자식들의 권유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었습니다.
김 안드레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 생활과 이웃을 위한 애긍,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 행위는 거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밤에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가르쳤으며,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노력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습니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 안드레아는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가 대구 감영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가 잠시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어 감영 문을 나가고 있었는데 이것을 본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였고, 이에 감화되어 그녀는 다시 관장 앞으로 나아가 신앙을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대구 감영에서 관장은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권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여러 차례의 형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김 안드레아는 조용하면서도 꿋꿋하게 천주교가 진리임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자 감사는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조정에 보고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김 안드레아는 옥중에서 편지를 보냈는데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만약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김종한 안드레아가 옥에 갇혀 있은 지 1년 6개월 정도가 되어서야 임금은 사형을 윤허하였습니다. 그러자 대구 감사는 즉시 천주교 신자들을 옥에서 끌어내 처형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김 안드레아가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제일 먼저 칼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는 1816년 12월 19일 이었습니다. 김 안드레아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습니다
김종한 안드레아는 2014년 8월 16일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습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찬미예수님!
오늘은 순교자 황 일광 시몬의 삶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 시몬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렵게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그에게 이러한 생활을 보상해 주시고자 놀랄 만한 지능과 열렬한 마음과 매우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을 주셨습니다.
황 시몬은 1792년 무렵 홍산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우연히 이존창 루도비코 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접하자마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교우들은 황 시몬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애덕으로 감싸 주었고 양반집에서도 다른 교우들과 똑같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농담조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나의 이러한 신분에도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1800년 2월 황 시몬은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회장의 이웃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사영 알렉시오, 김한빈 베드로 등 여러 교우들과 자주 교류하였고 그의 열심은 날로 더해져 모든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뒤, 정 아우구스티노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하자, 황 시몬도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하여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습니다. 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기쁨도 얻게 되었습니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황 시몬은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모든 것을 굳건하게 참아 냈으며 재판관의 추상같은 호령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천주교 신앙을 올바른 길로 생각하여 깊이 빠졌습니다. 이제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찌 배교하여 천주교 신앙을 저버리겠습니까?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그 결과, 황 시몬은 다리 하나가 부러지고 으스러질 정도로 잔인하게 매질을 당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조정에서는 이와 함께 ‘황일광을 고향으로 보내 참수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황일광 시몬은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었는데 이때 그는 걸을 수조차 없어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본래의 명랑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합니다.. 황일광 시몬은 홍주에 도착하자 곧바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는데, 이때가 1802년 1월 3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습니다.
황일광 시몬은 2014년 8월 16일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습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찬미예수님!
오늘은 순교자 최 경환 프란치스코의 삶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두 번째 방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부친으로 충청도 홍주군 다래골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의 계명을 지키며 자랐습니다.. 이후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우상숭배에 빠진 주위 사람들 속에서는 참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를 하자마자 외교인과의 송사 문제로 가산을 탕진하게 되어 가족을 이끌고 산골로 들어가 살게 되었는데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생활하다가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곳이 과천 고을 수리산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베풀기를 좋아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하였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훗날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습니다.” 라고 회고하였습니다.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신도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체를 매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순교에 대비하여 성패와 성물을 감추어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1839년 7월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을 때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고 포졸들에게 아침 음식을 대접하고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 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가고,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서 옥을 향하였습니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으나 그는 “형제들아 용기를 내고 분발하라. 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오 주 예수를 보라!”고 하며 격려하였습니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냈습니다.
아침이 되자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게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분이 치밀어서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습니다. 다른 많은 교우들은 석방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와 일가 부인 3명뿐이었습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셨습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찬미예수님 !
오늘은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의 삶과 신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인 유진길은 소년 성인 유대철의 아버지이며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1791년에 태어났다.
성인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심이었으며 특히 철학, 종교적 사색을 즐겨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성인을 '만권의 책과 동서 고금의 학문이 가슴에 가득한 인물' 이라고 일컬었다. 이처럼 진리를 향한 갈망을 해소하기 위해 불교와 도교를 10년 이상 연구했으나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을 당하면서 기뻐한다는 소문을 듣고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성인은 천주교에 진리가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가 있었지만 천주교 교리를 배울 길이 없었다. 이어진 박해로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지 않았고 천주교 서적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성인은 우연히 자기집 장롱에 바른 헌 종이에 영혼, 각혼, 생혼이란 글자가 적혀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떼어 앞 뒤를 맞추어 보니 그것이 곧 천주실의 라는 서적임을 알았다.
성인은 천주교 교리를 연구한다는 정귀산을 찾아가 그의 소개로 홍암브로시오에게 교리를 배우고 교리서를 얻어 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천주교의 모든 계명을 충실히 지켜나가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하상 성인은 동료 교우들을 모아서 선교사 영입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지 않아 정하상 성인을 알게되었고 1822년 동지사의 수석 역관으로 들어가 북경으로 갔다. 성인은 북경 구베아 주교로부터 아우구스티노 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조선교회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않자 이듬해 1825년 정하상, 이여진과 함께 로마 교황님께 청원서를 올려 조선의 딱한 사정을 알리고 하루 빨리 신부를 보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이편지 덕분에 1831년 9월 9일 자로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고 이어서 선교사들도 입국하게 되었다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고 이어서 파리 외방전교회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엥베르 주교가 각각 입국하게 되었다.
그래서 복음의 씨앗이 움틀무렵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다. 유진길 성인은 주요 인물이었으므로 즉시 체포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형제와 친지가 찾아와 배교를 강요 했으나 성인은 "나 때문에 당신들이 고초를 당할것을 생각하니 대단히 마음이 괴롭지만 천주를 안 뒤에 그분을 배신할 수 없으며 육신의 사정보다 영혼의 구원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 교우가 되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포장이 서양 신부가 숨어 있는 곳을 대라고 하자 성인은 "서양 선생들이 우리나라에 오신 것은 오직 천주의 영광을 현양하고 사람들에게 십계명을 지키게 해서영혼을 구제해 주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도리를 전하여 죽은 후에 지옥의 영원한 괴로움을 면하고 천당에 올라가 끝없는 진복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훌륭한 교를 전하려고 생각하면서 어찌 스스로 나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만약 명예와 돈과 쾌락을 구하려면 무엇 때문에 훌륭하고 돈 많은 고국을 버리고 죽음을 무릅쓰면서 이역 만리 먼 곳에 있는 이 나라에 왔겠습니까 ? 그들을 맞아들인 자는 바로 저입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끝나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결국 성인은 선교사들이 숨어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죄로 주리형과 줄톱질형을 받은 형벌에도 의연한 자세로 믿음의 위대함을 보여 주었고 국법을 어겨 매국노와 공모한 사학의 무리라는 죄목으로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모든 진리의 근원이신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나이는 49세 였으며 1925년 7월 5일 비오11세 교황님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해 방한하신 교황 성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찬미 예수님
오늘 말씀드릴 순교성인은 대구대교구 제2주보이신 이윤일 요한성인입니다.
성인은 충청도 홍주(오늘날의 홍성)에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인의 아버지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을 데리고 경상도
상주갑골이라는 산속으로 이주 합니다.성인은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온화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를 얻기 시작합니다.
상주 갈골에 살다가 부친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시자,결혼을 하고서는 처가 식구들(순교자 박사의 후손)이 많이 살던 문경 호항리(여우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여우목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수계생활을 하였으며, 공소회장을 맡아 외교인들을 권면 입교시키며 신자들을 잘 이끌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터지면서 성인의 아들 이 시몬이 먼저 체포되어 공주에서 치명하고 이후 여우목 마을에 들이닥친 문경 포졸에 의해, 성인의 여덟 식구와 동네 교우들 합쳐 약 30여명이 문경 관아에 끌려갔습니다.
이윤일 회장은 문경관아,상주진영,대구 경상감영으로 끌려다니며 심문과 고초를 당하셨고 .그동안 성인의 두 살난 손녀가 죽었습니다.
성인은 교우들을 권면하며 옥중에서 아침 저녁 기도를 함께 바치며항상 웃으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상주 감영에서는 신자를 세편으로 갈랐는데, 빈곤한 사람과여자와 어린이 등 풀어줄 사람들, 배교하지 않겠다고 말하여 죽여야 할 사람들, 그리고 이윤일 성인과 한실 공소회장 김예기와 그의 형제 김인기 세 사람은 사학 괴수라 하여 따로 사형 받을 사람들 이렇게 갈랐습니다. 이때 성인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와 큰 며느리 박 아녜스와 모친과 누이가 풀려납니다.
그러다가 성인이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될 때 자손들을 불러 말합니다. “나는 이제 치명하러 가니 너희는 가서 열심히 수계하다가 나를 따르라.”하고서는 치명하는 장소에는 오지 말고 치명 장면도 보지 말라 하였습니다.
상주에서 대구 경상감영으로 끌려온 지 삼일 째 되는 날인 1867년 1월 21일에 이윤일 성인과 김예기 김인기 형제는 각기 마지막 상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고 울었지만 성인은 “천주가 먹으라 하신 음식을 먹지 않고 울긴 무슨 연고이냐?”며 권면하고 음식을 다 먹었다고 합니다.
성인과 김예기, 김인기 형제는 관덕당 앞에 묶인 채 끌려나왔는데 사형터에는 사지를 묶는 막대기 넷이 땅에 박혀 있었습니다.
첫 차례로 성인이 처형 받게 되자, 주머니에서 엽전 닷 냥을 꺼내 희광이에게 주며 ‘자네들이나 나나 고생하지 않기 위해 한 칼 단번에 내 목을 잘라주게.’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희광이가 성인을 엎드리라고 하자, 성인은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 성호를 긋고 스스로 엎드려 나무토막을 목에 괴고, 사지를 각각 잡아매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인은 관덕당 사형장에서 장날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참수 순교 하셨으며, 당시 성인의 나이는 52세였습니다.성인의 유해는 관덕당 형장 근처에 임시로 매장되었다가,
2년 후 후손들이 대구 비산동 날뫼 뒷산으로 이장하였다,(현재 비산성당 부근) 1912년 후손들이 경기도 용인군 묵리로 이사를 가면서 그곳으로 이장하였다, 1976년 6월 24일 미리내 성지의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 성모당 제대에 안치하였고,그날 이문희 대주교님은 이윤일 성인을 대구대교구 제2주보로 선포하셨습니다. 한국천주교창립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관덕정 순교기념관이 건축되고 나서 이곳 관덕정 순교기념관성당 돌제대에 1991년 1월 20일에 모셨습니다.
이윤일 성인 관련 성지는 홍주, 상주 갈골, 여우목, 상주 진영, 경상 감영, 관덕정입니다.
여우목 성지는 여우목 아랫마을 자리로, 관덕정 순교기념관에서 세운 이윤일 성인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한편 이윤일 요한 성인이 사셨던 곳은 여우목 큰 마을이라 불리며 여우목 성지에서 조금 더 차를 타고 이동하면 <여우목교우촌>이라는 팻말이 나옵니다.
마을 중간에 <여우목 교우촌 성지>를 조성하고 2017년 9월 20일에 대구대교구 조환길 대주교님과 안동교구 권혁주주교님께서 축복미사를 거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순교자들 또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사셨습니다.
1984년 한국 천주교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바오로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오름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찬미예수님
오늘은 103위성인 평신도 대표성인 순교자 성 정하상 바오로의 삶에 대해말씀 드리겠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1795년 남인 양반의 후예로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주교요지 상,하 두권을 집필한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맏아들인 복자 정철상 카롤로와 함께 한달 차이로 순교하였고, 어머니인 성녀 유 체칠리아는 기해박해의 여파로 1839년 11월 순교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할 당시 겨우 여섯 살이었던 정 바오로와 누이동생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은 어리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함께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가산이 적몰당해 살길이 막연해지자 그의 숙부 정약용 요한에게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숙부인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을 떠난 후 천주교를 믿지 않던 친척들로부터 갖은 천대와 냉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정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충실히 배웠지만 외교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려워 20세 때에 단신상경하여 교우 조증이 집에 기거하며,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해 함경도 무산에 귀양가 있는 한학자 조동섬 유스티노에게 학덕을 닦았고 신유박해로 오직 한분이던 주문모 신부와 대표적인 평신도들이 순교한 후 교회부흥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양반 신분을 감추고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1816년 겨울 만21세의 나이로 처음 북경에 가서 세례와 견진과 성체 성사를 받고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변문 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습니다.
그는 성 유진길 아우구티노와 조신철 카롤로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 있는 삼촌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으로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북경주교를 대상으로 영직자영입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간파하게된 정하상은 세계 가톨릭의 최고수위권자인 로마 교황에게 청원하기로한 세계적 경륜의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825년 유진길과 의논후 성직자 파견 및 조선교회에 대한 영속적인 구원을 위한 대책을 청구하는 매우 함축적인 내용을 딤은 대교황청청원문을 올렸던 것이다. 이 청원문은 포교성성 장관 신부의 의견이 첨부되어1827년로마교황청에 전달되어.1831년 9월조선독립교구가 설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됨과 동시에 파리외방 전교회 전교 성직자였던 브르기에르 주교의 조선전도 자원이 있어 1831년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이고,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까지 모셔 들여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한편 제2대 앵베르 주교는해외 에서의 사제양성이 너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므로 조선내에서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그때까지 독신을 지키며 살아온 정하상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긴 앵베르 주교로부터 속성 신학교육을 받고 성직지가 되기위해 선택된 평신도 지도자였으며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제상서 작성하여 전주교가 진리의 종교이며 박해의 부당함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문서로 힘있게 주장하였습니다.
1839년 7월 11일, 포졸들이 정 바오로의 집에 몰려와 그와 노모 그리고 누이동생을 잡아 포도청에 압송하여 바오로와 4대 조상까지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 문초를 시작하였는데 정 바오로는 무서운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나갔고 배교하라고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자 옥에 가두었습니다. 며칠뒤 다시 끌려 나와 톱질 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 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한 그는 샤스탕과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대라는 심문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후 두 신부가 자수한 다음 또 심문을 받고 세 차례의 고문을 더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1839년 9월 22일, 서양 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 죄명을 쓰고 서소문 밖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정 바오로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셨습니다.
정하상의 일생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고귀한 삶이었다. 9월 순교자 성월 시복시성 위원회에서의 2022년 순교자 소개를 마치면서 순교성인들의 빛이 우리삶을 강하게 비춰주시길 기도합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아멘
첫댓글 시복시성 위원님들! .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순교한 성인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