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우리나라 마지막 궁중악인 중의 한 사람인 김천흥 옹이 향년 98세로 별세했다. 그는 13살 때부터 80년이 넘도록 궁중 전래 음악을 전승해 온 마지막 ‘궁중악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음악인생의 출발점이 바로 일제강점기 궁중음악을 담당했던 이왕직 아악부이다. 이왕직 아악부 교육생의 한사람이었던 김천홍은 당시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남아 있던 궁중악사들에게 궁중음악을 배웠다. 현재 김천흥 선생처럼 아악생으로 시작해 평생을 국악계에 몸담고 살아온 분들로는 성경린, 이창규, 김종희 선생이 있다.
이왕직 설치되면서 산하기관으로 출발 이들 원로 악사들이 10대 때부터 악기를 들고 매일 출퇴근을 했던 이왕직 아악부는 지금의 계동 현대빌딩에서 비원 쪽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왕직 아악부를 ‘일소당’이라고 불렀다. 이 청사는 전보다는 훨씬 조건이 좋았다고 한다. 1922년 이전까지 아악부는 당주동에 위치해 있던 봉상시(奉常司) 건물의 일부를 빌어 썼다고 한다. 봉상시 자리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쯤이다.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왕직은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후 조선왕조의 마지막 상징처럼 남은 왕실가족들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의 ‘천황’아래 존재하는 궁내성의 산하기관으로 만든 것이다. 일제는 조선왕조를 이왕가(李王家)로 격하시키고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조선정부 대신 국정업무을 수행케 하기는 했으나 왕실의 존재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왕가가 가지고 있는 조선의 전통을 일본의 전통과 접목시켜 내선융화의 발판이자 모델로 삼기 위해 남겨 둘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구차한 명맥만 남아있던 이왕직이지만 제사와 연례 등 옛 궁정의식을 소략하게 나마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의식, 즉 예(禮)에는 악(樂)이 따라야 했다. 따라서 천 여명의 악인들을 거느렸던 그 옛날의 찬란했던 장악원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흉내라도 내야했던 기관이 아악부다.
일제 ‘아악’ 대신 ‘국악’이란 용어 사용 아악부는 이왕직제 공포 이후인 1911년 ‘아악대’란 이름으로 이왕직 산하에 설치됐다가 1925년에 아악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통상 1910년 국권피탈 때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이 기관을 아악부라고 지칭하지만, 아악부의 수장이 처음 임명된 시점이 1907년 임을 감안하면 통감부시기부터 사실상 ‘아악부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초대 아악사장은 김종남이었다. 이때부터 1932년에 취임한 제5대 함화진까지를 역대 아악사장이라고 한다. 1907년 당시의 관보를 보면 재정고문이었던 메가타 타네타로오(目賀田鍾太郞)가 주도한 관제 개정에 따라 ‘교방사’를 장악과로 고치고 국악사장 이하 305인을 둔다는 규정이 있다. 메가타는 조선에 부임하기 몇 년 전 일본에서 ‘국악창성론’을 주창해 일본국민음악의 준말인 ‘국악’을 일으키자고 한 사람이다. 이 국악사장이 초대 아악사장이라고 할 수 있다. 김종남에 이어 2대에는 함재운이, 3대에는 명완벽이, 4대에는 김영제가, 5대에는 함화진이 아악사장을 했다.
초대 아악사장에게 ‘국악사장’이라는 명칭을 썼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오늘날에는 우리 전통음악을 ‘국악’이라는 용어로 일반화해서 쓰지만 당시까지는 전혀 일반화되지 않은 특수용어였다. 애초에 ‘국악’이란 용어는 단지 몇 년간, 그것도 궁중악인의 수장에게만 쓴 용어에 불과했다. 하지만 해방 직후 5대 아악사장을 역임한 함화진이 수장으로 있었던 ‘대한국악원’이란 이름의 창악인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의 명칭으로 쓰면서부터 일반화됐다. 이어 아악부 출신들이 낸 ‘아악부 국영안’에서 ‘국립국악원’이라는 명칭이 정착됐다.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아악’이 ‘국악’으로 변화된 셈이다.
근대적 악사 선발 방식 도입 아악부가 설립되면서 그나마 수십 명의 옛 악사들이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그러나 이들만으로는 조선왕조에서 공연됐던 수많은 레퍼토리의 전통음악과 춤을 계승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계승은 고사하고 겨우 유지하고 있던 아악부마저 폐지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아악부를 이끌었던 김영제, 함 |